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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업은 <우리글 배우기, 두 걸음> 부교재로 첫 시간을 열었다. 이 책은 교과서와 달리 큰글씨로 돼있어서 학생들이 읽기에 편하다. 내용도 학습자가 일상생활에 자주 사용하는 말이 많아서 '받아쓰기 시험'도 이 책에서 주로 출제한다.

학습자들이 사용하는 일상 생활언어를 접하다 보니 글쓰기 실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래서 입말로 하는 것을 써보기 위해 '받아쓰기'는 의도적으로 이 책을 이용한다.

수업 있는 날 하루 열 문제씩 시험을 본다. 채점은 90점 이상만 점수를 쓰고, 나머지는 정답에 ○ 표시만 한다. 오답에는 작대기 표시 대신 수정하고 점수는 매기지 않는다. 그중에 한 개라도 틀리면 마음이 상해서 끙끙 앓는 분이 있어 조심스럽다. 하지만 시험은 시험이니까.

열 문제를 부르고 채점했다. 오! 오늘은 두 명이 100점이다. 휴~ 한 문제라도 틀리면 끙끙 앓으시는 분이 그 두 분 중에 있어서 다행이다.

받아쓰기 시험이 끝나고 책 읽기로 들어갔다. 정 조교님(옆 학생을 잘 가르쳐 주어서 붙인 애칭)이 옆에 앉은 최 학생에게 한 자라도 알게 하려고 당신 책에 연필로 글자를 짚어가며 읽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피어나는 장미꽃 송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이다. 내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안부가 궁금한 사람

코로나19 이전 생각이 났다. 그때 작은 방에 19명이나 되는 학생이 공부했다. 밥상을 펴고 공부하다 좌식이 불편해서 초등학교에서 안 쓰는 헌 책상을 구해다 수업했다. 한 책상에 둘이 앉아 조교 역할을 하던 90세, 이○○ 학생이 뇌리에 번개처럼 스쳤다. 이○○ 학생은 청력이 안 좋아 선생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성○○ 학생을 당신 옆에 앉게 했다.

그리고 선생의 말을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전했다. 아름다운 노 여인의 모습이 밝은 보름달처럼 둥실 떠올랐다. 귀찮아하지 않고 선생의 말을 하나하나 전해서 매 수업을 잘 따라 할 수 있도록 배려하던 모습이 뵙고 싶어졌다. 성○○ 학생은 코로나19로 수업이 중단됐을 때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마을 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 개인 사정으로 중도에 하차한 분들에게 어쩌다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한다. 개인 사정이란 당사자가 건강이 좋지 않거나, 남편이 돌아가셨거나가 대부분이다. 정 조교님 모습을 보자 예전의 이○○ 조교님 안부가 궁금해 이○○ 조교님과 며칠 전 통화했다. 

"어머나 선생님! 저를 잊지 않고 또 전화를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가끔씩 선생님 생각을 해유. 제가 밥 한번 사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 정신은 말짱해유. 다리가 힘이 없어서 걷는 게 비실비실해서 공부하러 가고 싶어도 못 가유. 유모차로 가야 하는데 논둑길이 좁아서요. 큰길로 돌아가자니 너무 멀어서 공부 생각은 있어도 못 가요. 그런데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해주겠어유? 전화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얼마나 사람 목소리가 그리웠으면 전화 한 통화에 감사하단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하실까? 이○○ 조교님은 이제 93세가 되셨다. 연세가 높으셔도 사철하고 말씀에 흐트러짐도 없다.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사투리도 조금밖에 안 쓰신다. 노인 보행 보조차에 의지해야 걸으시는 분이 밥을 사주고 싶다고? 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스스로 밥 해 먹을 수 있고 화장실이랑 일상생활은 할 정도라 자식들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안 하고 싶다고 했다. 그냥 이렇게 지금 이대로 혼자 살다가 저세상 가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이만한 것도 감사하며 살고 있다 하셨다.

걷기가 불편해도 들깨 농사랑 김장거리는 심는다고 했다. 공무원으로 퇴직한 큰아들이 와서 밭농사를 거든다고 했다. 아들 혼자 일하니까 앉아서 뭉쳐 다니며 함께 밭일하여 자식들 김장은 손수 가꿔서 해준다고 했다.

며느리는 무릎 수술을 한 사람이라 제 밥도 제대로 못 해 먹어서 못 온다며 묻지도 않는 며느리 말씀도 했다. 며느리 손에 밥 얻어먹을 생각도 없지만, 내 며느리에게 행여 누가 될까 미리 차단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 기우일까?

자식들에게 불평불만 없는 아흔셋 독거노인의 현명한 대처가 아름다워 고개가 숙여졌지만 왜 내 가슴은 시리다 못해 씁쓸하고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

전화기로 고스란히 전해진 '이조교님'의 마음

"심심하시지 않게 그림 도안을 몇 장 보내드릴까요?"
"그러면 너무 좋지요? 가끔 옛날 배우던 책도 읽고 써보기도 해유. 마을회관에 밥하는 사람이 바로 옆집에 사니까 그분에게 보내주셔유. 고맙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얼른 그림도안 20여 장을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내가 직접 마을 학교 학생작품을 모아 만든 작품집도(198P) 한 권 준비했다. 이 작품집은 내가 없는 시간 투자해서 혼자 편집, 수정, 제호 짓고, 제호까지 직접 써서 인쇄만 맡긴 책이다.
 
작품집 사진
 작품집 사진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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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쓰는 것만이라도 전문가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것도 20만 원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썼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준비한 것을 종이가방에 담아 다음 수업 때 반장님께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이 조교님이 전달받고 전화를 주셨다.

"너무너무 감사해요. 이 은혜 안 잊을게요. 선생님. 심심할 때 외로울 때 그릴게요. 마을 학교 작품집이 너무 좋네요. 나도 계속 다녔으면 책 속에 담겨 있었을 텐데요. 마을 사람들이 그림 그리고 글 쓴 것이라 더 재미나고 좋아유. 두고두고 읽어 볼게요. 고맙습니다. 그림은 언제 한 장 그려서 보내드릴게유."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이 전화기 너머로 따뜻하게 전해왔다.
 
마을 학교 숙제 검사를 하면서.
 마을 학교 숙제 검사를 하면서.
ⓒ 이윤열,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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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러고 보니 아까 이○○ 조교님이 반장을 통해 그림을 보내온 것을 가방에 넣어 둔 생각이 났다. 수업하는 학생들 그림만 붙여놓고, 읽고 맞춤법을 고치고 말았구나. 이분 그림은 자리에 없다고 칠판에 붙이지 않은 생각이 났다.

나는 두 번째 시간에 얼른 그림을 꺼내어 칠판에 붙였다. 정 조교님이 최 학생에게 글자를 짚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에 아차! 옛 조교님이 없어도 배려 깊던 그 분의 그림을 소개하고 싶어진 것이다.

아흔셋 학생의 그림은 훌륭했다. 3년 동안 쉬었던 솜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글은 단 두 줄이다. 글씨를 얼마나 예쁘게 썼는지 난 따라 쓰기 어려울 정도다. 짧은 문장이지만 맞춤법도 틀린 곳이 없다. 놀랍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

어르신들은 꽃을 좋아하나 보다. 예쁜 손 글씨 한 자 한 자 정성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치켜올리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놀라워요. 참 잘하셨어요. 어머나, 어쩜 오랫동안 쉬셨어도 그림도 예쁘게 그리셨어요. 글씨는 또 어찌 이렇게 예쁘게 잘도 쓰셨네요. ○○님도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요. 가끔 색칠 공부도 하셔서 보내주시면 답글도 써드릴게요. 또 그림 도안 보내드릴게요."

논둑길만 조금 넓으면 노인 보행 보조차로 공부하러 올 수 있는데 못 오시는 안타까움에 가슴 아프다. 하긴 오셔도 한 시간 동안만 앉아있을 수 있다고 했다. 아까 수업 시작 때 학습자들 그림과 함께 붙여놓고, 감상하고 맞춤법 고치고 할 것을 그러지 못해 죄송한 마음 한가득하다. '죄송해요. 이 조교님!' 나는 그분이 자리에 계시진 않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마을한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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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마을학교 성인문해교원입니다. 이밖에 웰다잉강의, 청소년 웰라이프 강의, 북텔링 수업, 우리동네 이야기 강의를 초,중학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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