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에 개봉했던 케빈 클라인과 시고니 위버 주연의 <데이브>는 뇌사상태에 빠진 미 대통령을 대신해 대통령과 닮은 데이브 코빅이라는 남자가 대통령의 대역을 하게 되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데이브>에는 두 주인공 외에도 <아이언맨3>에서 만다린의 대역을 맡았던 벤 킹즐리가 강직한 부통령을, <슈퍼맨 리턴즈>에서 데일리 플래닛의 편집장 역을 맡았던 프랭크 란젤라가 탐욕스러운 비서실장을 연기했다. 

사실 유명인 또는 지도자를 닮은 누군가가 그의 대역을 맡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데이브>가 처음이 아니었다. 과거 일본에서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대역으로 내세우는 가짜군주를 의미하는 '카케무샤'는 지난 198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1940년에 개봉한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 역시 서로를 쏙 빼 닮은 독재자와 이발사의 이야기를 담은 정치풍자극이다.

국내에서도 지난 2012년 조선의 15대왕 광해군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를 닮은 만담꾼이 왕의 대역을 했다는 가상의 역사물이 제작된 바 있다. 물론 개봉 당시부터 <데이브>를 비롯한 비슷한 설정의 다른 영화들과 유사성이 지적됐지만 이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병헌의 1인2역 연기가 돋보였던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였다.
 
 <광해>는 개봉 당시 표절논란에 시달렸음에도 전국 1200만 관객을 모으며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광해>는 개봉 당시 표절논란에 시달렸음에도 전국 1200만 관객을 모으며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CJ ENM

 
박신양-손예진-전지현 등 1인2역 도전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1인2역은 쌍둥이나 형제, 자매, 또는 모녀, 부자 같은 가족관계다. 피가 섞인 가족들은 서로 닮은 게 당연하기 때문에 같은 배우가 연기하면서 '핏줄'이라고 설정하면 관객들을 이해시키기 쉽다. 지난 2003년에 개봉했던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에서는 손예진이 60년대의 엄마 주희 역과 2000년대의 딸 지혜 역을 동시에 맡았다.

2004년 최동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박신양이 1인2역을 맡았다. 박신양은 김선생(백윤식 분) 일당이 짜놓은 투자사기에 걸려 학교 공금을 날리고 자살한 순진한 국어교사 최창호와 형의 복수를 위해 김선생의 뒤통수를 치는 사기꾼 동생 최창혁을 동시에 연기했다. 특히 최창호 행세를 하고 다니던 최창혁이 길에서 어떤 커플과 시비가 붙었을 때 갑자기 불량스러운 최창혁으로 돌변하는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클래식>의 손예진이 '예쁜 1인2역'이었고 <범죄의 재구성>의 박신양이 '재미 있는 1인2역'이었다면 <도가니>의 장광은 그야말로 '끔찍한 1인2역'이었다. 성우로 유명한 장광은 <도가니>에서 희대의 인간말종이자 성범죄자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했다. 당시 장광은 배우로서 많은 활동을 하지 않던 시절이라 영화 개봉 후 본의 아니게 많은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의 아내조차 큰 충격으로 3일 동안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2015년에 개봉해 1270만 관객을 동원했던 최동훈 감독의 <암살>에서는 전지현이 1인2역에 도전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전지현은 영화의 주인공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암살 작전대장 안옥윤과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안옥윤의 쌍둥이 언니 미츠코를 동시에 연기했다. 참고로 '안옥윤'이라는 캐릭터 이름은 각본을 쓴 최동훈 감독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안중근과 김상옥, 윤봉길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스크린을 장악한 이병헌의 압도적인 연기
 
 이병헌은 <광해>에서 폭군과 인간적인 서민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명연기를 선보였다.

이병헌은 <광해>에서 폭군과 인간적인 서민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명연기를 선보였다. ⓒ CJ ENM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왕위를 둘러싼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광해군이 저잣거리의 만담꾼 하선(이상 이병헌 분)을 자신의 대역으로 세운다는 가상의 역사극이다. 개봉 당시 <데이브>와의 표절시비가 나오기도 했지만 높은 완성도와 재미로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개봉하자마자 폭발적인 관객몰이를 한 <광해>는 개봉 한 달여 만에 한국영화 역대 7번째로 천만 관객을 모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왕위를 둘러싼 당쟁으로 인해 왕이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심각한 이야기는 상업영화보다는 역사 다큐에 더 어울릴 법한 소재다. 하지만 <광해>는 이야기를 무겁고 진지하게 끌고 가지 않고 요소요소에 코믹한 장면들과 멜로 요소를 적절히 배치하며 관객들과 원활하게 소통했다. 실제로 <광해>는 <대장금>이나 <주몽>,<선덕여왕> 같은 퓨전사극에 익숙한 관객들이 보기에 전혀 어렵지 않은 영화였다.

<광해>가 천만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은 바로 폭군 광해군과 그의 대역을 맡은 만담꾼 하선을 모두 맡은 이병헌의 명연기 덕분이었다. 특히 처음 하선을 연기할 때 왕의 흉내를 내지 못해 어색해하던 하선이 점점 왕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대단히 실감나게 보여줬다. 이병헌은 <광해>의 열연을 통해 대종상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씨네21 영화상 올해의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또 한 명의 '1억 배우'가 된 류승룡에게도 <광해>는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2011년 <최종병기 활>, 2012년 상반기 <내 아내의 모든 것>을 통해 흥행배우로 떠오른 류승룡은 <광해>에서 '광해군 대역쇼'의 설계자 허균을 연기해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류승룡은 2013년에도 < 7번 방의 선물 >로 1281만, 2014년에는 <명량>으로 1761만 관객을 동원하며 무려 3년 연속으로 천만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됐다.

2005년 <마파도>를 만들며 데뷔한 추창민 감독은 2006년 두 번째 영화 <사랑을 놓치다>가 흥행 실패했지만 2010년 <그대를 사랑합니다>로 160만 관객을 동원하며 반등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2년 <광해>를 통해 1200만 관객과 함께 대종상 감독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다. 2017년에 개봉한 < 7년의 밤 >이 전국 50만 관객에 그친 추창민 감독은 올해 조정석과 이선균 주연의 신작 <행복의 나라>를 선보일 예정이다. 

천만 배우 등극한 한효주의 탁월한 선택
 
 <동이>에 이어 또 한 번 사극에 도전한 한효주는 <광해>를 통해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동이>에 이어 또 한 번 사극에 도전한 한효주는 <광해>를 통해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 CJ ENM

 
드라마 <동이>와 영화 <오직 그대만>에서 연속으로 주인공을 연기했던 '라이징스타' 한효주에게 <광해>는 그리 어울리는 선택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이병헌의 원맨쇼와 조선시대의 정치투쟁이 중심이 되는 <광해>에서 중전은 기껏해야 '꽃병풍' 정도의 역할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효주가 <오직 그대만>과 <반창꼬> 사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광해>를 포함시킨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효주는 <광해>를 통해 커리어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동원했고 이어 영화 <반창꼬>와 <감시자들>도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작 <동이>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숙빈 최씨를 연기했던 한효주는 <광해>에서 단아하고 우아한 중전의 매력을 선보이며 '한복이 잘 어울리는 여성배우'에 등극했다. 실제로 코미디와 정치드라마 사이를 오가던 <광해>는 한효주가 출연하는 장면에서 멜로로 장르가 변하곤 했다.

한효주의 열연(?)에도 적지 않은 관객들은 <광해> 최고의 여성캐릭터는 '중전마마' 한효주가 아닌 심은경이 연기했던 기미나인 사월이라고 평가했다. 하선의 입맛에 딱 맞는 팥죽을 잘 만드는 사월은 궁궐 안에서 하선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눴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광해>에서 크지 않지만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던 심은경은 2014년 단독주연영화 <수상한 그녀>를 통해 86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배우로 우뚝 섰다.

김인권이 연기한 광해군의 호위무사 도부장은 하선의 정체를 모르는 등장인물들 중에서 처음으로 하선의 정체를 의심했다. 하지만 하선이 부부사이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중전의 비밀을 이야기한 후에는 누구보다 충직한 광해군의 호위무사가 된다. 김인권은 영화 막판 하선의 도주로를 확보해 주기 위해 혼자서 추격하는 군사들을 모두 해치우고 되돌아온 하선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는 명연기를 선보였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창민 감독 이병헌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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