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31일은 작게는 광주광역시, 크게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날이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군의 실세였던 전직대통령 고 전두환씨의 손자 전우원씨가 국립 5.18 묘지를 참배하고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죄했기 때문이다. 전씨 본인은 물론이고 전씨의 직계가족이 5.18 묘지에 참배를 하고 유족들에게 사죄의 뜻을 밝힌 것은 역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최초의 일이었다.

하지만 전씨의 손자 전우원씨는 1996년생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잔인했던 신군부의 학살이 있었을 땐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전우원씨가 단지 전씨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우원씨는 용기를 내 할아버지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광주의 유족들 앞에서 할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사죄했다. 

광주학살의 당사자이자 당시 군의 최종책임자였던 전두환씨는 지난 2017년 회고록을 통해 '자신은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는 202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유족들에게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2012년에는 상상력에 기반해 광주 학살의 유족들이 최종책임자를 단죄한다는 내용의 '팩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강풀 작가의 원작 웹툰을 영화화했던 < 26년 >이었다.
 
 영화 <26년>은 원작웹툰의 연재가 끝난지 6년이 지난 2012년에야 영화로 완성됐다.

영화 <26년>은 원작웹툰의 연재가 끝난지 6년이 지난 2012년에야 영화로 완성됐다. ⓒ 영화사청어람(주)

 
5.18을 바라보는 대중매체 속 여러 시선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형사건이기 때문에 이미 많은 대중매체들을 통해 등장한 바 있다. 지난 2007년에 개봉해 730만 관객을 동원했던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주연의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에 끝까지 맞서 싸웠던 시민군의 투쟁을 담은 작품이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5.18의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의 시선에서 5.18의 비극을 바라본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지난 1995년 6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신생방송국 SBS를 자리잡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래시계>는 5.18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드라마였다. 주인공 태수(최민수 분)는 후배를 만나러 광주에 내려왔다 사태에 휩쓸리게 되고 같은 시기 또 다른 주인공 우석(박상원 분)은 계엄군으로 차출돼 광주로 내려온다. 당시 5.18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었던 시청자들은 <모래시계>에서 표현한 광주의 실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17년에 개봉해 1218만 관객을 동원했던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는 외부인의 시선에서 본 5.18을 묘사한 대표적인 영화다. 1980년 서울에서 택시를 운전하던 만섭(송강호 분)은 10만원을 준다는 손님의 말에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치만 분)를 태우고 광주로 떠났다. 광주에서 참혹한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만섭은 혼자 서울로 돌아오다 광주에 홀로 남겨진 손님 피터를 태우기 위해 다시 광주로 향한다.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 김현석 감독의 <스카우트>는 전혀 상관 없을 거 같은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 선동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엮어서 만든 영화다. 선동열(이건주 분)을 Y대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출장을 떠난 호창(임창정 분)은 점점 변해가는 광주의 분위기를 애써 외면하고 선동열 스카우트에 열을 올린다. 그렇게 선동열과 아버지(백일섭 분)의 마음을 사로잡은 날, 호창은 폭도로 오인 받아 현지경찰에게 잡혀 행방불명 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준환 감독의 < 1987 >에서는 5.18이 자료화면으로 등장한다. 민주화 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던 대학생 연희(김태리 분)는 학교에서 우연히 선배가 틀어준 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데 그 영상이 바로 1980년 광주학살을 담은 자료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연희에게 영상을 보여준 선배는 바로 강동원이 연기했던 고 이한열 열사였다.

영화에서라도 '사이다 결말'은 힘들었을까
 
  한혜진은 <26년>에서 '그 사람'을 저격하려는 5.18 희생자의 유족이자 국가대표 사격선수 심미진을 연기했다.

한혜진은 <26년>에서 '그 사람'을 저격하려는 5.18 희생자의 유족이자 국가대표 사격선수 심미진을 연기했다. ⓒ 영화사청어람(주)

 
영화 < 26년 >은 2006년 한 포털사이트를 통해 연재됐던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대부분의 인기웹툰들은 연재가 끝난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유료로 전환되기 마련인데 < 26년 >은 최대한 많은 독자들이 봤으면 한다는 강풀 작가의 바람에 따라 2010년대까지 무료로 연재됐다(2023년 5월 현재는 유료).

이처럼 < 26년 >은 연재 당시는 물론이고 연재가 끝난 후에도 큰 화제가 된 웹툰이었지만 영화로 완성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 26년 >은 웹툰이 나온 지 6년이 지난 2012년이 돼서야 영화로 완성됐고 그 해 11월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 < 26년 >은 손익분기점이었던 200만 관객을 가볍게 돌파했고 최종적으로 296만 관객을 동원하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영화 < 26년 > 역시 원작과 차이가 있다. 원작에서 '그 사람'(장광 분)의 흉상을 제작하는 조각가 이치영과 이치영의 아내인 역사교사 한선영이라는 캐릭터가 영화 자체에서는 삭제됐다(기자주-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그사람 장광'으로 소개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기사에서는 '그 사람'으로 통일해 칭하려 한다).

원작에서는 김갑세(이경영 분)의 군시절 동료로 엔딩 장면에서 심미진(한혜진 분)이 마지막 한 방을 쏠 수 있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호실장 마상길(조덕제 분) 역시 영화에서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영화로 각색되면서 삭제되거나 비중이 줄어든 장면이 있는 것처럼 영화화되면서 새롭게 추가된 내용도 있다. 원작에선 거의 보이지 않았던 곽진배(진구 분)와 심미진의 러브라인이 대표적이다.

심미진의 총성과 함께 결말을 보여주지 않고 막을 내리는 웹툰과 달리 영화 < 26년 >은 엔딩 장면에서 '그 사람'의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광주 유족들의 작전이 실패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라도 희생자 유족들과 광주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주는 '사이다 결말'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끝까지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난 '그 사람'
 
 장광은 <도가니>에 이어 <26년>에서도 관객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은 '그 사람' 역을 맡았다.

장광은 <도가니>에 이어 <26년>에서도 관객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은 '그 사람' 역을 맡았다. ⓒ 영화사청아람(주)

 
< 26년 >은 원작 웹툰이나 영화 모두 전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맡으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 26년 >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활약을 선보였던 캐릭터는 단연 진구가 연기한 광주의 조직폭력배 곽진배였다. 곽진배는 위험한 순간마다 스스로 앞에 나서기를 자처했고 뛰어난 싸움실력과 과감한 판단력으로 계획을 실행시키는데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원작 웹툰을 본 관객들은 영화 < 26년 >에서 보컬그룹 2AM 출신 임슬옹이 연기했던 교통계 순경 권정혁 캐릭터에게 실망을 느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연재 막판 무기고에서 권총과 총알을 가지고 '그 사람'의 집에 난입해 '그 사람'에게 총을 쐈던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의 권정혁은 중반부터 경찰의 편에 선다. 물론 경찰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 권정혁의 행동은 분명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이경영은 전직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다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대기업 회장 김갑세 역을 맡았다. 젊은 시절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죽게 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돼 '그 사람'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다. '전직 대통령 암살'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평생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하면서 대기업 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영화에서는 원작에 비해 비중 및 활약이 상당히 줄어든 캐릭터이기도 하다.

2011년 <도가니>로 관객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던 성우 겸 배우 장광은 < 26년 >에서도 전두환씨를 모티브로 한 '그 사람'을 연기하며 관객들을 분노케 했다. '그 사람'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전씨라고 언급된 적은 없지만 전씨를 연상케 하는 말투와 행동을 선보였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감정이 안 좋은 가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처럼 전씨가 생전에 했던 망언을 그대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26년 조근현 감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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