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0 19:33최종 업데이트 23.05.20 19:33
  • 본문듣기
지난해부터 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물가와의 전쟁이다. 자고 나면 터지는 물가 폭탄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모든 물가가 오르고 있다. 문제는 언제까지, 무엇이 오를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가 올리기를 엿장수 가위 치듯 하는 집권자들이 입만 열면 외쳐대는 '민생 우선'이라는 단어는 이제 양치기 소년의 목소리가 되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정부가 갑자기 집어 던진 난방비 폭탄으로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보았다. 난방 기간이 길 수밖에 없는 수십 곳의 커피 재배 농가들이 입은 피해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여름이 다가오니 이제 냉방비 폭탄이 언제 터질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에어컨 대신 선풍기, 그것도 어려우면 부채를 꺼내 들어야 할 두려운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커피를 포함한 음료의 가격도 이미 많이 올랐지만, 상승 폭이 좀처럼 둔화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 가격 인상이 촉발한 커피 가격 인상 붐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제 편하게 찾던 동네 카페도 가격표 보며 조심스레 찾아야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국가가 물가를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세금이다. 국가는 나라를 경영해야 하기에 세금을 부과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고, 국민은 국가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 세금 납부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납세의 의무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국가일수록 정부에 대한 국민의 평가에서 세금으로 국민의 삶을 편하게 해주느냐, 세금으로 국민을 힘들게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주절거리는 '민생'이란 말의 핵심은 세금으로 국민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다. 그런 일을 잘하는 정부나 정치인을 뽑을 줄 아는 국민은 행복하고, 그렇지 못한 국민은 불행하다. 우리는 지금 안타깝게도 불행의 길로 들어섰다는 징후가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고 나면 없던 세금 생겨나 
 

일제강점기 시절 남대문역 앞 거리. 후반기에 접어들며 일제가 부과한 세금은 거의 폭탄 수준이었다. ⓒ 눈빛


일제강점기에도 물가 폭탄으로 유난히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1940년대 초반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침략 야욕이 부른 전쟁을 마치 동아시아 지역에서 서구 제국주의를 척결하는 성스러운 전쟁인 양 '대동아전쟁'이라 부르며 조선 사람 모두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전선이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했기에 일제 후반기에 접어들며 그들이 부과한 세금은 거의 폭탄 수준이었다. 자고 나면 있던 세금은 오르고, 없던 세금이 생겨났다.

세금 폭탄을 미화하기 위해 저들이 외친 구호가 '납세 보국'이었다. 세금을 납부해서 나라를 돕자는 희한한 운동이었다. 납세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데 왜 납세 보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용어를 붙였을까?

저들이 세금을 폭탄처럼 부과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지나사변)의 시작과 함께였다. 예컨대 1938년 4월 1일부터 '지나사변 특별세'의 하나로 '교통세'라는 것을 도입하였다. 열차, 버스, 연락선 등 모든 교통수단 이용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신보>는 이를 보도하면서 "발에도 세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극장에 '입장세'가 붙으면서 관객이 감소하였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물품특별세'로 물건값이 오를 것에 대비해 사재기 열풍이 불었다. 1939년 3월 경성부가 재원 마련을 위해 쓰레기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증세는 이어졌다. 1941년 12월 1일을 기해 '유흥음식세'가 대폭 인상되었다. 종로 네거리에는 기생을 태운 인력거의 그림자가 줄었다. 왜였을까? 기생의 화대에 10할 그러니까 1백 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한 결과였다. 카페 웨이트리스에게도 팁을 주고 3할의 세금을 내야 했다. 손님 감소로 요정의 수입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카페도 30퍼센트 이상 수입이 줄었다.

그런데도 <매일신보>는 요정 주인이나 카페 주인들이 시국을 원망하거나 실망을 느끼는 빛은 없었고, 끝까지 국책에 순응하여 협력하고 "물이든 불이든 뛰어들 각오와 대책을 세우기에 바쁜 것이었다"라며 권력 편에 서서 보도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문제가 많아서가 아니라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 많아서이고, 다수 국민을 이런 길로 이끄는 것은 본분 잊은 언론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1942년에 이르자 납세 보국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힘은 세금으로부터"라는 구호가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심지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일본 본토로 귀국할 때 세금 완납 증명서가 없으면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일제는 1944년 2월 16일을 기해 수많은 비행기, 군함, 대포 등을 만들기 위해서 물품세, 유흥음식세, 입장세, 특별행위세 등을 대폭 인상하였다. 그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것은 유흥음식세였다. 카페와 바(bar)에서 음식을 먹거나 음료를 마시면 그 값에 붙이던 6할의 세금을 13할로 올렸다. 식음료 가격의 1.3배의 세금을 부과하였던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컸다.

요정의 음식에 부과하던 5할 세금은 10할로 인상되었다. 카페나 바보다 요정 음식에 부과하는 세율이 조금 낮았다. 일본인들은 요정을 즐겼고, 조선인들은 카페나 바, 다방을 즐긴 것이 배경일 수 있다. 세금에서도 교묘한 차별은 존재했다.

<매일신보>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까지 요정 등에서 호세를 부리던 층도 이제부터는 "세를 마시고, 세에 취하는 것을 삼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한다. 대중음식점이나 숙박업소의 세금도 결코 낮지는 않았다. 2원 50전 미만의 음식에는 3할의 세금을, 10원 이상의 여관에는 7할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세금 폭탄과 서양풍 배격 운동 속에서 커피를 파는 카페, 다방, 바 등은 문을 닫거나 세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중음식점으로 전향하였다. <매일신보> 기사에서 커피라는 단어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944년 6월 18일이었고, 카페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춘 것은 1944년 3월 24일 이후였다. 커피라는 단어가 신문에 등장한 지 60년, 카페라는 표현이 신문에 등장한 지 30년 만에 사라졌다. 물가폭탄, 납세보국의 소란함 속에 조선 땅에서 커피 향이 사라졌다.

식민지 후반 일제가 벌이고 언론이 동조하여 벌였던 세금 폭탄, 납세 보국 운동 속에 등장했던 가장 흥미로운 사건은 기생의 화대에도 세금을 부과하였다는 점이다. 1944년부터는 무려 화대의 3배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언론의 표현대로 "유흥층에 통봉"(痛棒; 좌선 때 집중 못하는 스님에게 사용하는 몽둥이)이 내려진 것이었다.

아무리 언론이 국민의 눈을 가린다 해도, 팁이나 화대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납세보국 운동은 6. 25 이후 이승만에 의해 재현되었고,통봉을 들고 국민을 때리던 권력은 민주주의의 통봉을 맞고 무너졌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 <매일신보> 1938년부터 1944년까지의 기사 다수.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