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알베르게의 내부다. 27년 동안 그곳을 책임지고 있는 까밀라가 일하는 주방과 커다란 식탁이 보인다.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하게 일하는 까밀라를 집시 풍의 옷을 입은 페넬로페가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못 참겠다는 듯 다가가 말을 걸지만 까밀라는 외면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이 사라져 가는 까밀라는 며칠 후엔 알베르게를 떠날 예정이다. 은퇴라고나 할까.

피곤한 밤을 보낸 숙박객들이 출발을 서두르는 시간에 도착한 호세는 딸 마리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까밀라의 알베르게에서 하루 묶기로 결정한다. 까밀라 대신 곧 알베르게의 관리를 맡게 될 파블로 신부와 순례 중 얻은 부상으로 출발하지 못한 정신과 인턴 세실리아가 함께 하는 저녁식사. 그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며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신다.

그런데 호세에게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파블로와 세실리아의 응원을 받은 호세는 옛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프랑코 독재 시절 비밀경찰이었던 호세는 과거 까밀라가 마드리드에서 운영하던 음식점 <쁠라테로>의 단골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두 사람은 눈을 맞춘 채 플라멩코를 춘 적도 많았다! 하지만 까밀라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
   
이 뮤지컬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사건이 발생했다. 정신의 어떤 부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말하고, 돌이키고, 감정을 분출하면서 치유되는 과정을 밟을 수도 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이 방법이 아니면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또 하나는 망각이다. 덮어 버리는 것이다. 스페인이 선택한 길이다. 1937년 7월에서 1939년 4월까지 스페인은 내전을 치렀다.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 같은 작가들이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들뿐 아니라 유럽 각국의 젊은이들이 내전 한가운데에서 직접 총을 들었고 3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광주광역시 정도의 인구가 내전 중에 사라진 것이다.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빨갱이 소탕'이라는 이름으로 이후 10년 동안 5만 명 이상을 처형했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프랑코는 1975년 11월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지킨다. 이 또한 낯설지 않다. 그가 통치한 기간 중 불법 투옥, 고문, 살해, 처형당한 사람들의 숫자 또한 엄청났다. 그러니 프랑코의 사망 이후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테러가 발생한 것도 이해는 된다.

마침내 1977년, 스페인은 선택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진실을 찾아내 그 원혼들을 위로하는 대신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 협력' 하기로 결정한다. 침묵협정 혹은 망각협정(Pacto del Olvido)이라고 부르는 구두계약이 좌파와 우파의 합의로 탄생한다. 계약의 법적 형식은 사면법으로 구체화됐다.

사면법은 내전과 내전 이후의 모든 정치범죄를 사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전에 패했던, 그래서 프랑코 독재 하에서 고통받은 공화주의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해고자들의 복직을 허용했다. 대신 프랑코 독재 체제에 부역했던 모든 이들의 죄 또한 묻지 않았다.

망각은 괜찮은 방법처럼 보였다. 1986년 스페인 내전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는 '내전은 역사일 뿐 더 이상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잘 진행되던 망각의 균열은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비슷하게 독재를 겪고 있던 칠레 때문이었다. 1988년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살인 고문 테러행위 죄목으로 스페인의 법정에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검사가 영국에 있던 피토체트에게 구속 영장을 발부하는 데 성공한다. 영국 대법원은 영국 스페인 간의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피노체트를 스페인 법정에 서도록 결정했다. 복잡한 정치상의 셈법과 이유 때문에 결국 피노체트는 칠레로 소환되고 그곳에서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한다. 발타사르 가르손 검사는 이후 칠레의 피노체트가 권좌에 앉기까지 미국 CIA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 내기도 한다. 이런 멋진 검사는 낯설다.

비록 피노체트는 놓쳤지만 이 일은 스페인 국민을 깨웠다. 피노체트는 프랑코와 동일시되었고 협정이 맺어질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 세대들은 협정을 거부했다. 기억은 소환됐다. 그리고 2004년 선거에서 승리한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는 취임 연설에서 내전 초기 프랑코 세력에 의해 처형됐던 그의 할아버지의 유서를 인용했다. 기억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쁠라테로>의 배경이다. 뮤지컬로 소화하기 쉽지 않은 무거움이 있다. 하지만 뮤지컬이다. 과거의 기억 혹은 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까밀라와 호세의 진지한 노래가 있는가 하면 이제 막 성인이 된 마리아와 세실리아의 밝고 귀여운 노래도 있다. 호세 역의 한지상 배우가 추는 '결심의 플라멩코'가 있는가 하면 까밀라 역의 신의정 배우가 추는 '자유로운 플라멩코'도 있다.

무엇보다 극의 구성이 탄탄하다. 굳이 망각 속에 머물려는 까밀라와 그녀의 기억을 깨우려는 호세라는 주된 갈등 구조 사이로 아버지를 지키려는 마리아와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려는 세실리아와 파블로의 갈등이 지나간다. 촘촘하게 얽힌 실을 풀 듯 이들의 과거가 드러나야 관객들은 마침내 그 아래 놓인 깊은 슬픔과 마주할 수 있다. 아마도 그 길은 치유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작은 극장이지만 최고의 무대를 보여준다. 큰 극장에 올려도 손색없을 것 같다. 까밀라 역의 신의정 배우와 호세역의 한지상 배우의 열연도 좋았지만 이기적이지만 아버지를 지키려는 마리아 역의 이지수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 모든 출연진의 플라멩코를 함께 즐겨주시기 바란다.

조지오웰은 그의 책 1984에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라고 선언했다. 망각은 해답이 아니다. 굳이 한국의 창작자들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망각의 협정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 이유는 아직 우리에게 4.3을, 군부 독재 시절을, 5.18을, 세월호를 망각하라고 떠미는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망각은 옳은 길이 아니다. 이 뮤지컬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아름답고 격정적인 어조로 건넨다. 6월 2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