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어느 공간, 닥터(데이비드 테넌트 분)와 로즈(빌리 파이퍼 분)가 잔디밭에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닥터가 말한다. "지구에 있던 건 모두 사라졌지만 인류는 지구를 떠나 살아남았지. 지구가 태양에 불타자마자 사람들은 향수에 빠졌고 지구 부활 운동이 일어나서 여기가 생겼어. 지구 크기에 같은 공기, 멋지지? 모든 인간들이 여기에 왔어."

그들이 누운 행성은 뉴뉴욕, 지구가 파괴된 후로부터 또 많은 시간이 흐른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먼 미래다.
 
뉴뉴욕은 다른 많은 것들로 유명하지만 그중에도 특별히 대단한 부분이 있다. 의학기술이 극도로 발전하여 우주의 거의 모든 질병과 맞서 싸우는 중이다. 고양이 얼굴을 한 성직자들이 병원을 운영하며 성실한 간호로 환자들을 돌본다. 여전히 노화며 죽음을 극복하진 못하고 있으나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어왔던 지난시대의 질병 상당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그야말로 산뜻하고 건강한 시대가 열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닥터 후 포스터

▲ 닥터 후 포스터 ⓒ BBC

 
인간으로 인간을 치유하는 미래
 
그러나 전 우주적 소동극 <닥터 후>가 그저 그렇게 끝날 리 없다. 드라마는 이내 진면목을 드러낸다. 병원의 이면에 감춰진 지하공간을 슬며시 내보이는 것이다. 다름 아닌 수많은 캡슐들과 그 캡슐 마다 한 명씩 들어 있는 환자들의 모습이다. 쾌적한 병동의 환자들과는 전혀 딴판인 이곳엔 심각한 질병에 감염돼 고통을 겪는 인간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환자가 아니다. 실험대상이다. 말 그대로 '휴먼 팜'이다.
 
분노한 닥터에게 고양이 얼굴을 한 성직자가 다가와 말한다. "사람을 돕는 게 수녀의 의무"라고,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실험을 위해 특별히 배양된 존재로, 육체만 인간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닌 실험대상이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존재하는 질병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려면 실험은 불가피하다고, 동물보다 인간과 유사한 육체에 실험을 하는 게 비할 바 없이 효과적이라고 말이다. 덕분에 많은 인간을 구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이 체계는 대의다.
 
참혹한 실험 대상들을 바라보며 눈앞의 고통에 눈을 뜨라는 닥터에게, 그녀는 "우리 덕분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라"고 반박한다. 닥터는 이렇게 답한다. "이 덕분에 산다면 살 가치가 없다"고.
 
닥터 후 스틸컷

▲ 닥터 후 스틸컷 ⓒ BBC

 
우리의 오늘이 딛고 선 진실
 
뉴뉴욕 병동에서 벌어진 <닥터 후> 뉴 시즌 2, 첫 화의 이야기는 오늘의 인류에게도 다분히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안녕을 위해 대체 어디까지 파괴해도 되는가를 이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시민들을 위하여 인간과 동일하게 배양한 신체조직을 실험대상으로 쓰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시민들을 위하여 수없이 희생되는 동물들을 실험하고 착취하는 일은 허용되는 것일까. 인간을 조금 더 안전하게 하기 위해 매년 한국에서 죽어나가는 300만 마리 가량의 동물들에겐 존엄이며 가치가 없는 것일까.
 
더 많은 인간의 행복과 건강을 바라보라는 수녀의 말과 "이 덕분에 산다면 살 가치가 없다"는 닥터의 말 가운데, 오늘의 시민들은 어느 편에 서 있는 것일까.
  
닥터 후 스틸컷

▲ 닥터 후 스틸컷 ⓒ BBC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 진실을 떠올리다
 
흥미로운 건 <닥터 후> 속 뉴뉴욕 시민들이나 오늘 서울의 시민들이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둘 모두 병원과 실험기관이 자행하는 실험과 그로 인해 스러져가는 목숨들에 대하여 충분히 잘 알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만 매년 최소 300만 마리의 생명체가 실험대상으로 쓰이다 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건강이 그들의 고통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이 알려 하지 않는다.
 
<닥터 후>가 인상적인 건 우리 사회가 감추고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 진실을 자연스레 드러내 모두 앞에 내보인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양편의 주장을 적나라하게 보이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놀랍게도 주인공인 닥터가 말하는 바는 우리 사회의 주류, 법, 질서로부터 떨어져 있고, 그리하여 우리의 감정과 실태가 제법 격차를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만약 우리의 안전이 불의에 빚지고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를 직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 드라마가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 앞에서 시청자는 스스로 되묻게 될 밖에 없다. 우리는 어째서 우리 방송국으로부터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는가 하고.
  
닥터 후 스틸컷

▲ 닥터 후 스틸컷 ⓒ BBC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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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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