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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 1월 18일. 첫 기사가 생나무에 걸렸다. 오기가 발동하여 같은 날 두 번째 기사를 썼고, 버금에 오른 이후 2009년 7월 9일 나는 1664번째 기사를 쓰고 있다.

아니, 기사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며 느끼는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내 삶에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오마이뉴스>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오롯이 담긴 내 삶의 흔적

이렇게 물으신다면, 내 삶의 한 조각의 값어치라고 답합니다.
▲ 오마이뉴스 이렇게 물으신다면, 내 삶의 한 조각의 값어치라고 답합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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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책으로 출판되어 나오기도 했고, 일부는 그냥 남아있다. 아이들에게도 간혹 아빠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려면 <오마이뉴스>에 남긴 아빠의 글을 보라고 한다. 간혹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남긴 나의 글을 보라고 한다. <오마이뉴스>에 남긴 글은 나의 소개서인 셈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때론 분노하고, 때론 기뻐하며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장이 나에게는 <오마이뉴스>였다. 그래서 개인 카페보다도 더 많은 글이 <오마이뉴스>에 남아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역사적인 현실들은 이렇게 하나 둘 쓴 기사(?)들로 내 역사를 만들어 놓았고, 개인의 소소한 역사를 보면서 또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내 삶의 흔적이 들어 있는 <오마이뉴스>이기에 나는 내 삶의 한 조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토대 다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2004년으로 기억되는데 제주도에 살 때 오연호 대표가 일부러 제주도 동쪽 끝마을 종달리에 있는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 관련된 기념행사에서 서너 차례 만났고, 그냥 먼발치에서 혹은 책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오연호 대표를 알게 되었다.

거의 동년배이고 동시대를 살아온 오연호 대표. 그는 내게 '성공한 CEO'였다. 물론 걸어가는 길은 달랐지만 나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 오연호 대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광화문에서 상암동으로 <오마이뉴스> 사무실을 옮기고, 강화도에 오마이스쿨을 여는 것을 보면서 '이제 오연호 대표는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경제적인 토대를 다 만들어 놓았다'라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나는 여전히 경제적으로도 언제든지 최하위층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 처해 있었고,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나름 인정을 받지만(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평생을 걸고 하고 싶은 일을 아직 시작하질 못했다.

아주 특별한 사람과 나를 비교함으로써 도전도 받았지만,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시샘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연호 대표의 '10만인클럽 희망선언'이 나오기까지 <오마이뉴스>는 성장일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삶의 한 조각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나는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했다 . 오마이뉴스를 통해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민기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때론 나와 반대의 견해를 가진 이들과도 소통하면서, 흔히 말하는 보수언론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마이뉴스> 소비자로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마이뉴스>는 나를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로 만들었고, 생산품을 만든 대가로 원고료를 지급했다.

때론 과분하게 배치되기도 하고 때론 섭섭하게 배치되기도 했지만 나는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판단이 옳을 것이라 믿었기에 기사배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다(혹시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쯤은 있지 않았을까도 싶다).

<오마이뉴스>로부터 받은 원고료 (대략 1900만원)는 참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일부는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한 성금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급한 일에 변통하기도 했으며, 아내에게 선물을 사주기도 했다. 또 기자의 필수품인 카메라를 장만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연호 대표에 대한 시샘(?)과 단돈 만원이라도 어렵던 상황에서 언제부턴가 매달 1만원씩 참여하던 ARS를 해지했다.

그런 까닭에 어제 오연호 대표의 글을 보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기사를 읽고 바로 '10만인 클럽'에 가입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아무튼, 내 삶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오마이뉴스>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현 정부들어 중앙정부기관 광고 0건이었다니...

빈 곳을 여러분이 채워주십시오.
▲ 10만인클럽 화면 빈 곳을 여러분이 채워주십시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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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라는 것은 무릇 읽혀져야 맛이다. 조회 수에 연연하는 사람들을 못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인가 조회 수의 폭탄(?)을 맞아보니 그것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베테랑들에게는 우스운 조회 수겠지만 한 기사의 조회 수가 20만명이 넘자 내 생각을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기사로 말미암아 통쾌한 것보다는 <오마이뉴스>의 다양한 기사 덕분에 스트레스가 격감한다. 보수언론의 허구를 드러내는 기사, 누구도 말하지 못할 때 말을 하는 언로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덕분에 내 입장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보면서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현 정부 들어 <오마이뉴스>가 중앙정부기관으로부터 단 한 번의 광고도 수주하지 못했다는 야기를 듣고는 경악했다. 이런 수준 미달의 언론정책을 가진 나라에서 <오마이뉴스>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특산품이다.

오연호 대표의 제안은 내게 참으로 솔직하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광고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건실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을 때 광고주들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광고주로부터의 자유, 요원한 일이긴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그동안 어느 언론에서도 해내지 못했던 기적을 또 한번 이뤄내길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시민기자들이여! 오마이뉴스를 지켜야 할 때를 놓치지 말자

<오마이뉴스>의 창간 모토 '모든 시민은 기자다', 이것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그동안 오연호 대표와 상근기자들이 애를 써 왔다. 물론 그간의 시민기자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마음으로만 응원하기에는 우리 현 시대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가 않다.

경제불황도 경제불황이겠지만 노골적인 현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와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오마이뉴스>의 기자인 시민이 <오마이뉴스>를 지켜야만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다. 이 시기를 놓치면 우리는 <오마이뉴스>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오마이뉴스> 5단계의 마지막 단계까지 보고 싶다. 오연호 대표는 이제 겨우 5단계 중에서 1단계의 끝에 와 있다고 말했다. 그 완성점, 그것을 보고 싶다.


태그:#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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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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