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현재 45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는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 올해 영화판에서 한국 영화로는 마지막으로 500만을 돌파하고 내년 1월에는 1천 만 관객에 근접하거나 올라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적절히 분포된 에피소드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신이 자연스레 다가온다. 또한 황정민, 오달수라는 개성파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현대사의 고단함을 무겁지 않게, 가끔은 웃음을 자아낼 수 있게 하는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국제시장> 중공군의 남하를 피해 부산의 <국제시장>에 자리잡은 덕수는 항상 자신보다 가족을 위한다. 흥남철수 작전 당시 잃어버린 아버지의 당부이기도 하지만 역사 안에서 가정과 국가를 아우르는 이념이 그런 그를 만들었다.

▲ 영화 <국제시장> 중공군의 남하를 피해 부산의 <국제시장>에 자리잡은 덕수는 항상 자신보다 가족을 위한다. 흥남철수 작전 당시 잃어버린 아버지의 당부이기도 하지만 역사 안에서 가정과 국가를 아우르는 이념이 그런 그를 만들었다. ⓒ CJ엔터테인먼트


올 여름 극장가를 흔들었던 영화 <명량>이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역사적, 민족적 열등감의 반작용이 거대한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국제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도 버젓이 살아있는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몸소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가감 없이 보여준 것이 영화관을 찾는 이로 하여금,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를 다시 꺼내어 눈시울 짓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팔려 다니는 <국제시장>, 대한민국

'국제시장'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항상 강대국들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시기도 그 강대국의 이익관계에 의해 강제로 남북이 분할된 격동의 세월이다.

흥남철수 작전으로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고 남으로 내려온 덕수는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가족을 위한 고단한 삶을 꾸려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그리고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뭐든지 한다.

공부를 하고 싶어 고시학원에도 가보고 나중에 경찰대 시험에 합격하게 되지만 미련 없이 포기한다. 남동생의 서울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동생의 시집 갈 밑천을 벌기 위해. 그리고 잃어버린 아버지와 여동생 막순이가 언제 찾아올지 모를 고모의 '꽃분이네 가게'를 지키기 위해…….

덕수는 독일 광부로 가기 위해 면접에서 뜬금없이 애국가를 부른다. 베트남으로 돈을 벌러 가려는 덕수를 막아서며 눈물로 호소하는 부인 앞에서도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벌떡 일어서서 가슴에 손을 얹는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국가란 무엇이며 소시민들에게 어떤 존재냐는 것이다.

<국제시장> 부산의 용두산 공원에서 지리한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돈벌러 가겠다고 이미 마음을 굳힌 덕수는 때마침 울리는 애국가 소리에 벌떡 일어서서 가슴에 손을 얹는다. 이를 보던 아내도 눈시울이 불거진 채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는다.

▲ <국제시장> 부산의 용두산 공원에서 지리한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돈벌러 가겠다고 이미 마음을 굳힌 덕수는 때마침 울리는 애국가 소리에 벌떡 일어서서 가슴에 손을 얹는다. 이를 보던 아내도 눈시울이 불거진 채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는다. ⓒ CJ엔터테인먼트

한국전쟁 이후 전 국가적으로 실시한 애국애족과 나랑 사랑 의식 고취는 많은 소시민들에게 가부장적 제도를 공고히 해 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반공정신이란 정치색이 더하면서 평범한 국민들의 일상에 이념적으로 세뇌되었다. 가정에서 시작된 가부장제도가 국가라는 넓은 의미에서 '국가주의'와 결합한 것이다. 덕수의 가정을 향한 희생정신도 아버지의 유언을 넘어 시대가 만들어 낸 이념의 결과이다.

그러나 독일 광산에서 갱도가 무너져 생과 사의 경계를 헤맬 때 그가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들도 아니다. 독일에서 만난 간호사 영자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덕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간 덕수로 돌아온 것이다.

유교적 가부장 시대가 만연화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어린 덕수가 짊어졌던 짐은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응어리를 끊임없이 인내하며 울분을 내면화시켜 버텨왔건만 정작 그의 진심은 이 모든 짐에서 벗어나고 싶다.

덕수의 고집스런 가수 '남진' 사랑, 왜?

영화 중반, 파독 광부들의 이야기가 관객의 호응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관람객들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소리 내어 흐느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콧물만 훌쩍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 눈물 짜내기는 영화 종반 덕수의 독백에서 정점을 찍는다. 영화관 안은 나지막이 흐느끼는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이것은 억지로 관객을 울려야 한다는 의도적 연출이라기보다, 아직도 덕수의 굳은 살을 간직한 이들의 기억이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에 대한 공감대는 들음으로써 시작되고, 눈으로 보면서 배가되고, 경험함으로써 내 것이 된다. 덕수의 가수 '남진'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 역시 경험에서 비롯된다.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것이 일제시대 이야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야기이다. 못 살고 못 먹으면서도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몸을 내던진 우리 부모님의 삶은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어왔다. 우리 부모님들의 고집스러운 생활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국제시장>에서 조금이나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왜 쌀 한 톨에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는지, 천 원짜리 한 장에 목숨을 거는지 말이다.

기구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은 도저히 앞뒤가 꽉 막힌 옹고집으로 비칠 때가 많다. 아무리 알아듣게 얘기를 해도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분들 말이다. 영화 종반에 이런 고백이 나온다.

'내는 그리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참 우리네 부모들다운 대사다. 격랑의 세상을 자신들이 먼저 겪어서 우리 자식들이 고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거다. 수십 년 세월을 그리 살아왔으니 그 굳은 살에 박인 고집은 오죽하랴! 사사건건 자식들과 시장 상인들과 부딪히는 덕수의 언행은 그가 살아왔던 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힘들게 가정을 지켜온 만큼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은 것이다.​

<국제시장>의 유일한 악역은 '역사'

​​영화는 덕수로 대표되는 전후 세대의 인생사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딱히 악역이라 할 만한 역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긴장감은 종반까지 풀어지지 않는다.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많은 소시민들이 주인공이며 희생자이고, 유일한 악역은 바로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국제시장> 베트남 전쟁 오로지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가리지 않고 일했던 덕수는, 파독 광부로 베트남전쟁 물자 수송역을 자청한다.

▲ <국제시장> 베트남 전쟁 오로지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가리지 않고 일했던 덕수는, 파독 광부로 베트남전쟁 물자 수송역을 자청한다. ⓒ CJ엔터테인먼트


담배 하나 물고 영웅담처럼 들려주었던 그들의 과거 이야기는 스크린으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비로소 처절했던 현대사를 지탱해 온 전후세대의 고집을 가슴으로 품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20세기 대한민국을 온몸으로 지켜온 숨은 공로자라고 치켜세울 수도 있으나 그러기엔 못다 한 말들이 너무 많다.

'국가'는 <국제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국민들의 눈물과 피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국가'는 국민이 요구한 '국가'가 아니다. 덕수 같은 소시민들이 감내해야 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럽고 한 맺힌 인생사이다.

'하버드 후퍼'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전쟁을 선언하는 자는 늙은이지만,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이는 젊은이다'.

이보다 더 <국제시장>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은 없는 듯하다. 그리고 한국이 왜 아직도 <국제시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말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통치체계는 소수의 선언자들과 다수의 희생자들이 존재한다. 그 소수의 선언자들 역시 더 강력한 소수의 선언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수의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

덕수와 달구, 영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과거를 살아왔던 사람들은 다수의 희생자이다. 자녀 세대와 소통이 되지 않는 고집스러운 굳은 살을 만든 것도 소수의 선언자들이 만들었던 역사에 기인한다. <국제시장>은 철저한 이익관계를 위해 선언했던 소수에 의해 돌아가는 재래시장이다.

국제시장 흥남철수작전 베트남전쟁 파독 광부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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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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