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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책, <불안>에서 불안의 원인들 중 하나가 불확실성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운 요즘 힘이 실리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안을 극복하는 것까지는 못하더라도 그 크기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있지 않을까? 보통이 제시한 다섯 가지 해결책은 이렇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이 다섯 가지 것들을 아우를 만한 책을 한 권 읽는다. 뜬금없을지도 모르지만, 제목은 <서양미술사>다. 참고로 저자 E.H. 곰브리치가 붙인 원래 제목은 <The Story of Art>, 그냥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서양의 유물이나 건축물, 미술품들 위주의 이야기가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말 제목도 일 리 있다.

미술의 기원

<서양미술사> 표지
 <서양미술사> 표지
ⓒ 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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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미술을 말하자면 벽화다. 최초의 동굴벽화로 알려진 스페인의 동굴 얄타미라에는 후세의 발견자들이 '들소'라고 명명한 벽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몇 만 년 전의 인류에게 들소는 두려움과 먹잇감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원시시대의 그림과 조각이 주술적 의미를 갖는 이유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 년 전의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164). 주술적인 의미에서 시작된 미술이 인간이 존재하는 장소 또는 묘지를 장식하기 위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물을 모방하기도 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콜로세움이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우아한 건축물과 밀로의 비너스 상과 같이 인체에 미적 완벽성을 가미한 걸작들이 탄생됐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보다 신이 우선하게 되는 이른바 중세시대에는 미술이 종교를 보조하는 수단이 되면서 아름다움보다는 교화에 목적을 두게 된다.

화가들의 눈에 비친 또 다른 세상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작품들에는 작자 미상이 많다. 중세시대까지 화가는 그 지위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노예에 준하는 신분이거나 아니면 교회에 달린 처지였기 때문에 당시의 미술가들은 자발적인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주어진 업무에 충실한 장인에 가까운 기술자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3대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다. 이들은 모두 그 전 시대의 화가들처럼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통해 기본적인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걸작을 창작하게 된다.

화가의 지위를 끌어올리게 된 그들의 탄생 배경에는 길드가 있다. 15세기 초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guild)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유사하다. 길드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했다"(248).

이들 3대 화가들은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들인데 이들의 특징은 미술에서 구성을 중시했고, 티치아노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파는 색채를 중시했는데 이는 훗날 바로크시대에,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됐다고 한다.

유럽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파가 형성됐고, 아카데미라고 해서 일정 수준에 도달한 화가들을 위한 등용문이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유파와 미술교육의 발전이 반드시 미술 자체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학교 교육이 가지는 한계와 관련이 깊다. 현대미술의 개척자들이었던 세잔, 고흐, 고갱은 모두 유파와 아카데미를 거부하고 홀로서기를 실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낙향하여 노신사로 지낸 세잔과 불후의 명작과 불운한 삶의 아이콘이 된 미치광이 빈센트 반 고흐, 타히티 섬에서 외로이 작품 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고갱 등 이 세 화가들은 살아생전 제도권 바깥으로 밀려나 고독한 삶에 찌들어 있던, 그래서 타인들의 시선으로는 이른바 '루저'들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특별한 눈이 있었다.

"오늘 날 우리가 현대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났다. 이 세 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 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해결방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을 일으켰고, 반 고흐의 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켰으며, 고갱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즘(Primitism)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이 세 가지 운동이 '미친'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555)

보통은 불안의 원인들로 불확실성 외에 애정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등 네 가지를 보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위대한 습작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던 것이나, 미켈란젤로가 4년 동안 시스티나 성당에 매달려 천장화를 그린 것, 고흐가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 시도 등은 모두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의 결별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순간엔 알아주는 이 하나 없었어도 그들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진짜배기를 추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희열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서양미술사> E.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 1997년 초판(16차 개정증보판)



서양미술사 (1997년 판)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예경(1997)


태그:#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세잔, #고흐,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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