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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들의 경쟁력은 어느 수준인가? 한류 열풍, 한국 경제규모 세계 11위, 한국 스포츠의 세계 속 위상 등과 비교하면 우리의 대학들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QS 대학평가에서 서울대학교는 35위 정도이다. 동양권의 대학들 중 싱가포르국립대학, 홍콩대학, 동경대학, 교토대학 등이 서울대학교 앞에 있다. 국내 대학 중 서울대학교와 카이스트를 제외하고 나면 모두 100위권 밖이다. 500위 안에 드는 대학이 열 개도 안 된다. 한국 대학의 위상은 왜 이렇게 낮을까?

한국대학들의 문제는 단과대학들의 백화점식 나열에 있다. 백화점식 나열은 작지만 강한 대학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모두가 서울대의 모습을 닮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서울대학교가 백화점식으로 단과대학들을 갖추게 된 계기가 된 것이 국대안 파동이다. 국대안은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의 준말이다. 미군정 시기인 1946년 발표되었다.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기존의 경성대학에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9개 관립 전문학교를 통폐합하여 종합대학을 만들자는 안이다.

경성대학 문학부와 이학부를 합쳐서 문리과 대학, 경성대학 법학부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합쳐서 법과대학, 경성사범학교는 사범대학으로,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합쳐서 의과대학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상과대학으로, 경성대학 공학부와 경성광산전문학교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합쳐서 공과대학으로, 경성치과전문학교는 치과대학으로, 수원농림전문학교는 농과대학으로 만든다는 안이었다.

1946년 2월까지만 해도 문교부는 각 전문학교를 대학교로 승격시키는 방안으로 방향을 잡았다. 단지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어떻게 합병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만 있었다. 국대안이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라도 못 세웠는데 국립대학교는 무슨. 그런데 갑자기 7월 13일 유억겸과 오천석이 기자실에 들어 국대안의 실체를 발표했다. 미군정의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좌익세력이 학원가를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해방공간에서 터져 나온 또 하나의 좌우 대립

국대안이 공포되자 당장 해당 학생들과 교수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국대안은 당시 그 누구에게도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조선교육자협회와 전문대학교수연합회가 공동으로 전국교육자대회를 열고 국대안 철회를 요청하였다. 9월에는 동맹휴학에 들어가면서 친일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정지, 미국인 총장의 교체 등을 요구하였다.

이제 국대안 반대운동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좌우익의 대결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좌우익 학생들은 국대안 문제에 대한 동맹 휴학의 유지와 중지로 갈라지게 되었다. 1년여에 걸친 국대안 파동은 47년 10월 미국인 총장에서 이춘호 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국대안이 대학 교육에 끼친 영향

국대안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 대학의 전통에 영향을 끼쳤다. 첫째, 국대안은 대학들의 자주성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많은 학교들은 오직 민족적 자존감을 가지고 학원 민주화를 추구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점령군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국대안은 대학들을 자기들 손아귀에 넣으려는 방안이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대학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관습으로 자리잡아 온 것이다.

두 번째는 '서울대 따라하기'이다. 대학민국 대학들이 너도나도 서울대학교를 따라하는 일이 벌어져 대학이 비대화되어졌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강한 대학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대학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만 관심을 쏟아 이는 결국 대학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들 중에는 어느 한 분야에서 특화된 대학을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대학이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단과대학들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 국대안은 대학의 서열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공룡 서울대를 탄생시킨 것이 국대안이다. 모든 것이 서울대를 중심으로 편성되다 보니 서울대 집중화 현상의 폐해가 나타난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열이 매겨져 있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서열의식과 결부되어 더욱더 공고한 학벌주의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학의 서열화 전통에 국대안이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네 번째는 사학의 문제다. 사학 문제는 한국교육의 고질적인 병 중 하나다. 관립은 다 없애 버리고 지나치게 사학만 번성시켜 이 문제를 잉태 시킨 것이 국대안 파동이다. 서울에 있는 관립 전문학교를 모두 없애버리는 바람에 서울에는 국립대학교가 서울대를 빼고는 씨가 말라버렸다. 반면 당시에 대부분의 사립 전문학교들은 대학교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세 고려 이화 숙명등 많은 사립 전문학교들이 이때에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많은 관립 전문학교들을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국대안 파동은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미국식 교육제도와 일본식 교육제도의 충돌, 교수자치와 관권개입의 대립, 미군정과 한국인의 대립, 경성제대 출신 교수와 전문학교 출신 교수의 대립등 매우 복잡한 구도이다. 국대안 파동의 와중에 좌익 계열 학생들은 자퇴후 군대를 가거나 월북하였고, 좌익 교수들은 사퇴후 김일성 종합대학 건립에 힘을 쏟았다. 묘하게 같은 시기에 북한에서도 국대안이 실시된 것이다. 서울대학교와 김일성 종합대학은 3일차를 두고 개학식을 했다.


태그:#미군정기 교육, #국대안 파동, #대학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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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교사로 산다는 것'의 저자 김재훈입니다. 선생님 노릇하기 녹록하지 않은 요즘 우리들에게 힘이 되는 메세지를 찾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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