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시의 압력으로 인해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영화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결사항전 분위기입니다. 당장 올해 영화제 개최조차 점점 불투명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오마이스타>는 누구보다 이 사태를 애가 타며 지켜보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그 스물여덟 번째로 영화 <나비와 바다>의 박배일 감독입니다. [편집자말]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던 2016년 영화 <나비와 바다>로 관객과 호흡하던 모습.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던 2016년 영화 <나비와 바다>로 관객과 호흡하던 모습. ⓒ 박배일 제공


나는 '부산 사람' 박배일이다. 만약 내가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꿈꿨다면 부산영화제와 더 오랜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드라마 보기를 좋아했고, 영화 시작 전 암전이 되면 두근거림은커녕 잠부터 오는 사람이었다. <마지막 승부>의 다슬이(심은하)를 만나겠다며 드라마PD를 꿈꿨던 나였다.

어느덧 한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심은하)를 떠나보내고 영화를 꿈꾸게 된 것은 내 머릿속 이야기를 제약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내가 만든 모든 영화는 관객을 만나지 못하고 외장하드에 저장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담당교수의 제안으로 시작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지금까지 만들어오고 있다. 현장을 지키는 독립다큐멘터리 말이다.

지치지 않게 하는 비결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가장 처음 한 일은 그동안 보지 않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당시 시네마테크(부산) 자료실에선 부산영화제 상영작 전부를 무료로 볼 수 있었다. 그 작품들 속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져있었다. 부산영화제가 만들어놓은 영화 도서관에서 나는, 많은 영화가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았다. 영화를 통해 교과서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배웠고, 이야기의 힘을 확인했고, 무엇보다 많이 부러웠다. 나도 저 귀퉁이 어디쯤에서 함께 뛰어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2010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다. 여느 때와 같이 음울한 사무실에서 메일을 확인하고 있는데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메일 한 통이 와있었다. '<나비와 바다>가 2010년 AND에 선정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조용히 옥상에 올라가 촬영감독과 통화하면서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AND는 부산영화제가 진행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지원 프로그램으로, 제작을 위한 돈을 지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작자와 감독들이 네트워킹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당시엔 그 사실보다 2011년에 우리가 만든 작품으로 부산영화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정말 기뻤다. 그 기쁨은 그해 만든 <잔인한 계절>로 미리 맛봤지만 10번을 경험해도 매번 신나는 경험이다.

부산영화제에서 첫 상영한 순간은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극장에 갔을 때의 두근거림, 적극적인 관객 반응에 오히려 커지는 긴장감, 영화 속 주인공에게 보내는 지지와 격려 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까지. 그 소중한 순간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영화 작업 도중 힘들 때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어디선가 힘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놀이터

 2011년 <나비와 바다> 상영 때 영화를 관람한 일본의 소다 카즈히로 감독(중앙)과 함께.

2011년 <나비와 바다> 상영 때 영화를 관람한 일본의 소다 카즈히로 감독(중앙)과 함께. ⓒ 박배일 제공


직접 경험한 부산영화제는 즐거운 놀이터였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를 지지하진 않지만, 내 생각과 조금 다른 영화까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환경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놀이터가 될 수 있었던 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생각을 영화적 언어로 마음껏 표현해도 된다는 무언의 약속 덕이었다. 그 약속을 믿고 관객과 영화인들은 영화로 치열하게 논쟁하며 이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자식 같은 영화가 올곧게 자라기 위해선 관객 속에서 이리저리 치여야한다. 그 과정 속에서 내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고 다음 발걸음을 디딜 수 있다는 걸 부산영화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영화제가 자본과 정치의 눈치를 보고 특정 영화를 배재하는 건 놀이터를 무너뜨려 영화와 감독, 관객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나비와 바다>로 대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대됐을 때 일이다. 그 영화제는 다른 영화제와 달리 시상식에서 경쟁부문의 모든 감독들이 무대에 나와 소감을 한마디씩 이야기했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는 "Thank you! I'm very happy~~"를 외치며 간단하게 인사를 마쳤는데, 다른 감독들은 부산영화제를 언급하는 걸 빼놓지 않았다. 내용인즉슨, AND라는 프로그램 덕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고, 부산영화제에 소개되면서 다른 영화제 상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비와 바다> 역시 부산영화제 AND와 개봉지원 펀드를 받아 기획에서부터 개봉까지 큰 힘이 되었는데 부산영화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많은 감독들이 부산영화제에 고마움을 표했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부산영화제 사태 이후 해외 영화인들과 영화제가 'I SUPPORT BIFF'를 외쳤던 이유는 아시아 영화의 든든한 친구이자 버팀목이 되어준 부산영화제가 망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비와 바다>(2011)로 2012년 대만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당시. 홍효숙(우측에서 두 번째), 김영우(좌측에서 두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수다를 떠는 모습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비와 바다>(2011)로 2012년 대만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당시. 홍효숙(우측에서 두 번째), 김영우(좌측에서 두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수다를 떠는 모습이다. ⓒ 박배일 제공


내가 부산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도 없다. 부산영화제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불킥을 날릴 정도로 답답하고 무력해진다. 한 사람의 (대통령에 대한) 과잉충성과 아집으로 수많은 관객과 영화인들이 만들어낸 영화제가 단 한 번에 쓰레기통으로 내팽개쳐지는 것 같아 화가 난다. 며칠 전 알려진 "<다이빙벨>은 영화제에서 상영될 다큐영화로서 구비요건도 못 갖췄었다"는 부산 시장의 발언은 영화의 놀이터인 영화제를 인식하는 그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 말에 관객의 한사람으로서 또 영화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밀려왔다.

우리의 놀이터인 부산영화제를 정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해치는 환경에 반발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잠시만 안녕!'을 선언하려고 했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의심 받는 영화제를 인정 할 수 없다고 쿨하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친구이자 든든한 버팀목인 영화제가 흔들리는 걸 혼자 놔두면 두고두고 쪽팔릴 것 같아 차마 쿨해질 수가 없다. 비록 지루하고 긴 싸움이 될지라도, 누구나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우리의 놀이터를 유지하기 위해, 머리끈을 질끈 묶는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박배일 감독은 누구?
올해로 서른다섯. 부산에 살고 있는 박배일 감독은 그간 부산 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왔다. 화려한 도시의 모습이 아닌 소외된 우리 이웃에 주목했다. 다큐멘터리 <그들만의 크리스마스>(2007)로 차상위 계층의 삶을, <잔인한 계절>(2010)을 통해 환경미화원의 잊힌 권리를 주장했다.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뇌병변 장애인 남녀의 결혼을 다룬 <나비와 바다>로 초청됐다. 당시 작품은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했다.


[⑪ 김진도] 부산 뒷골목, 노숙자 같은 남자가 세계적 거장이었다
[⑫ 김진황] BIFF에 대한 믿음,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⑬ 서은영] 자부산심 : 우리는 부산을 가졌다는 자부심
[⑭ 김태용] 해외영화인들이 계속 묻는다 "BIFF는 괜찮아요?"
[⑮ 홍석재] 영화제는 꿈! 꿈은 결코 당신 마음대로 꿀 수 없다

[16 정윤석] 서병수 시장님, 성수대교 참사 유가족이 제게 묻더군요
[17 민용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나무를 기어코 베려 한다면
[18 김동명] 거짓말 같은... 결단코, 부산국제영화제
[19 이용승] 정치야, 축제에서 꺼져주면 안될까?
[20 김진열] 평범한 시민들이 BIFF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21 안선경]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이겼습니다
[22 김용조] 서 시장님, 전 자격 없는 영화인인가요
[23 양익준] 씨발 진짜... 욕을 빼고 글을 쓸 수가 없다
[24 김조광수] 20년 개근한 나, 올핸 부산 갈 수 있을까?
[25 이수진] 말한다, 벽이다, 그래도 말한다

[26 김태곤] BIFF 사태를 보며 불타버린 숭례문 생각함
[27 강석필] 베를린영화제도 부산영화제 같을 때가 있었다

*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백만서명운동 사이트' (http://isupportbiff.com)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isupport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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