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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 오며는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석송 김형원의 시에 안기영이 곡을 붙인 '그리운 강남' 1절이다. 1929년 <안기영작곡집> 제1집에 수록된 이 노래는 1934년 5월 음반으로 처음 발표됐다. 당시 인기가수였던 김용환, 왕수복과 윤건영이 참여한 음반이 발매되면서 이 노래는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세마치장단의 신민요 '그리운 강남'은 봄을 맞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정이월이 지나 삼월이 왔으니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것이고,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는 노랫말은 약동하는 봄의 싱그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일제 치하에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는 노랫말은 왠지 불온하다. 누가 보더라도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일제는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 노래에 얽힌 기구한 사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리운 강남'은 <임시 중등음악교본>에 수록됐으나 얼마 못가 다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에 작곡자 안기영이 월북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리운 강남'은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울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이 노래가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건 여자아이들의 고무줄놀이 덕분이다. 고무줄놀이의 단골 레퍼토리에 오르면서 이 노래는 금지의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다.

강남초등학교가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이유

'그리운 강남'에 등장하는 강남은 중국 양쯔강 이남지방을 가리킨다. 이 노래가 만들어졌던 1929년 서울(당시 경성)에는 강남이 없었다. 한강의 남쪽이 서울에 처음 편입된 것은 1936년이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일본, 조선, 만주를 잇는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가 1934년 6월 제정한 조선시가지계획령은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1936년 2월 14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시가지계획령에 기초하여 경성에 인접한 1개읍과 8개면에 속한 71개리와 5개리의 일부를 경성부로 편입하기로 결정(총독부령 제8호)했다. 당시 경성부에 편입된 지역은 동쪽으로는 청량리와 왕십리일대(고양군 숭인면), 서쪽으로는 신촌과 마포일대(고양군 연희면), 남쪽으로는 한강 이남의 영등포일대(시흥군 영등포읍, 북면, 동면, 김포군 양동면), 북쪽으로는 창의문 밖 부암동일대(고양군 은평면)였다.

이때의 확장으로 경성부의 면적은 134㎢가 되었고, 인구는 40만4천명(1935년)에서 72만7천명(1936년)으로 증가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부에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동부출장소, 서부출장소, 용산출장소, 영등포출장소를 설치했다.

영등포가 편입되면서 경성에 처음으로 한강 이남지역인 강남이 생겨났다. 당시 강남지역은 영등포일대로 지금의 서울 영등포구와 동작구이다.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점이었던 영등포역 주변은 1920년대 초부터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영등포일대를 영등포역 주변과 노량진 지역으로 구분하여 영등포역 주변은 공업지대로, 노량진 주변(흑석동, 노량진동, 상도동)은 주거지역으로 개발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입각하여 영등포역 주변에는 면방직공장, 맥주공장, 화약공장, 벽돌공장 등이 들어섰다.

1940년대에 접어들자 경성의 인구는 90만명을 넘어섰다.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화가 진행되자 조선총독부는 1943년 6월 경성부령 제163호(경성부 구의 명칭, 위치 및 관할 구역)를 제정하고, 출장소를 폐지했다. 대신 구(區)제를 도입하여 경성부에 7개구(종로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를 신설했다.

한강 이남을 뜻하는 ‘강남’이라는 지명은 영등포 일대를 지칭하는 의미로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강남초등학교는 ‘강남’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첫 사례이다.
▲ 강남초등학교 한강 이남을 뜻하는 ‘강남’이라는 지명은 영등포 일대를 지칭하는 의미로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강남초등학교는 ‘강남’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첫 사례이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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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한강 이남을 뜻하는 '강남'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영등포 일대를 지칭하는 '강남'이라는 지명은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강남초등학교는 '강남'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첫 사례이다. 강남초등학교는 1941년 4월 강남심상소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여 현재에 이른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자리잡은 강남교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4월 18일 월남한 젊은 의사 김재술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강남중학교는 1959년 4월 서울공업고등학교 병설로 개교하였고, 동작구 상도3동 소재의 강현중학교는 1969년 3월 개교할 당시의 이름은 강남여자중학교였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숭실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가까운 강남시장은 1층에 16개 점포가 입주한 5층 높이의 건물형 재래시장으로 1972년 5월 문을 열었다.

영등포구의 동쪽, 영동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은 해방 1주년을 맞아 ‘서울시 헌장’을 발표하고 ‘경성’을 ‘서울’로 바꾼다. 그런 다음 그해 9월 28일 ‘서울특별시 설치에 관한 군정법령 제106호를 제정한다. 법령의 주된 내용은 서울시를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제1조)하여, 조선의 수도로 승격하는 동시에 특별시가 된다(제2조)는 것이었다. 서울도서관 3층 전시실 '서울시헌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 서울시헌장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은 해방 1주년을 맞아 ‘서울시 헌장’을 발표하고 ‘경성’을 ‘서울’로 바꾼다. 그런 다음 그해 9월 28일 ‘서울특별시 설치에 관한 군정법령 제106호를 제정한다. 법령의 주된 내용은 서울시를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제1조)하여, 조선의 수도로 승격하는 동시에 특별시가 된다(제2조)는 것이었다. 서울도서관 3층 전시실 '서울시헌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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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1945년 해방 후에도 한동안 경성으로 불렸다.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은 해방 1주년을 맞아 '서울시 헌장'을 발표하고 '경성'을 '서울'로 바꾼다. 그런 다음 그해 9월 28일 '서울특별시 설치에 관한 군정법령 제106호를 제정한다. 법령의 주된 내용은 서울시를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제1조)하여, 조선의 수도로 승격하는 동시에 특별시가 된다(제2조)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년이 지난 1949년 8월 13일 서울시의 면적은 다시 확대된다.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거하여 이때 편입된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뚝도면, 은평면 전역과 시흥군 동면 도림리, 구로리, 번대방리였다. 이들 지역의 편입으로 서울시의 면적은 134㎢에서 268.35㎢로 늘어났다. 면적의 확대와 함께 서울시의 행정구역 개편도 이루어졌다. 성북구가 동대문구에서 분구됐다. 참고로 이보다 앞선 1944년 10월 마포구가 서대문구에서 분구하여 해방 당시 서울시에는 8개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후 서울시의 영역 확장은 1963년 진행된다. 5.16쿠데타 직후 수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1월 21일 제1172호 법률(서울특별시·도·군·구의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에 의거하여 해가 바뀐 1963년 1월 1일 경기도 광주군 등 5개 군에 속한 7개 면 24개 리가 서울시에 편입됐다.

이때 서울시에 편입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서울 동북쪽에 위치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5개리는 동대문구(현재 중랑구)로, 양주군 노해면은 성북구(현재 노원구)로 편입되었다. 서울 서남쪽에 위치한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과 양서면(현재 양천구와 강서구), 시흥군 신동면(현재 서초구), 시흥군 동면과 오정면, 소사읍 일부지역(현재 관악구, 구로구, 금천구)은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서울 남동쪽에 위치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과 중대면 10개리(현재 강동구와 송파구)와 광주군 언주면과 대왕면 5개리(현재 강남구와 서초구)는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서울시의 면적은 268.35㎢에서 613.04㎢로 확대되었다.

1963년 1월 1일 경기도 광주군 등 5개 군에 속한 7개 면 24개 리가 서울시에 편입됐다. 면적이 두 배 이상 커지자 서울시는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천호출장소를 비롯한 10개의 출장소를 설치했다. 사진은 서울도서관 3층에 전시된 천호출장소 이미지를 촬영한 것이다.
▲ 천호출장소 1963년 1월 1일 경기도 광주군 등 5개 군에 속한 7개 면 24개 리가 서울시에 편입됐다. 면적이 두 배 이상 커지자 서울시는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천호출장소를 비롯한 10개의 출장소를 설치했다. 사진은 서울도서관 3층에 전시된 천호출장소 이미지를 촬영한 것이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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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이 두 배 이상 커지자 서울시는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10개의 출장소를 설치했다. 신도시 건설의 현장사무소로 기능한 출장소는 영등포구에 5개소(신동, 관악, 양동, 양서, 오류출장소), 성동구에 3개소(천호, 언주, 송파출장소), 성북구(노해출장소)와 동대문구(망우출장소)에 각 1개소가 설치되었다.

출장소명
출장소 소재지
관할 구역
관악출장소
영등포구 시흥동
시흥동 독산동, 가리봉동, 신림동, 봉천동
양동출장소
영등포구 등촌동
가양동, 마곡동, 염촌동, 등촌동, 목동, 신당리, 신정동, 화곡동, 신월동
양서출장소
영등포구 송정동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 과해동, 방화리, 개화동, 오곡동, 오쇠동
오류출장소
영등포구 오류동
오류동, 고척동, 개봉동, 궁동, 천왕동, 항동, 온수동
신동출장소
영등포구 양재동
양재동, 원지동, 우면동, 사당동, 방배동, 서초동, 반포동, 잠원동
언주출장소
성동구
역삼동, 도곡동, 포이동, 개포동, 논현동, 신사동, 학동, 압구정동, 청담동, 삼성동, 대현동, 염곡동, 내곡동, 신원동
송파출장소
성동구
송파동, 석촌동, 삼전동, 가락동, 문정동, 장지동, 거여동, 마천동, 이동, 방이동, 오금동,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율현동, 세곡동
천호출장소
성동구 천호동
명일동, 하일동, 고덕동, 상일동, 길동, 둔촌동, 성내동, 풍납동, 곡교동, 암사동
노해출장소
성북구
창동, 월계동, 하계동, 중계동, 상계동, 도봉동, 방학동, 쌍문동
망우출장소
동대문구 망우동
상봉동, 중화동, 묵동, 망우동, 신내동

<1963년 설치된 10개 출장소 현황>

흥미로운 점은 지금의 서초구 반포동, 서초동, 양재동 일대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영등포구였다는 사실이다. 영등포구의 동쪽을 뜻하는 '영동'이라는 지명은 신동출장소가 관할하던 반포동, 서초동, 방배동, 양재동 등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동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1967년 무렵이다. 그해 11월 정부 여당 연석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공식 결정된 다음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수립되면서 '영동'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강남 개발을 촉발시켰다. 서울시는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이듬해인 1971년 영등포구 신동출장소 관할지역인 반포동과 잠원동 일대의 부지 3천3백만㎡(1백만평)를 개발하기 위한 영동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다. 1971년 4월 24일 개발 자금이 부족했던 서울시는 거점개발 방식으로 논현동 22번지 소재 7,194평의 부지에 12개동의 공무원아파트 공사를 시작했다. 12평형과 15평형으로 지어진 360세대의 공무원아파트는 착공 8개월만인 1971년 12월 28일 완공되었다.

강남은 어떻게 의미 변화 했나

1970년이 되자 서울시의 인구는 500만명을 돌파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성북구와 영등포구의 인구가 100만명에 육박했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를 발표, 성북구에서 도봉구를,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분구하였다. 서울시의 마지막 영역 확장은 이때 이루어진다.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와 진관내·외리가 지금의 은평구로 편입되어 서울시의 면적은 627.06㎢로 늘어났다(현재 서울시의 면적은 이때에 비해 약간 줄어든 605.25㎢이다).

성동구 언주출장소와 영등포구 신동출장소가 통합된 것도 이때였다. 서울시는 조례 제780호를 제정하여 1973년 7월 1일을 기해 언주출장소와 신동출장소를 통합한 영동출장소를 신설했다. 영동출장소가 신설되면서 그동안 영등포구에 속했던 반포동, 잠원동, 서초동, 양재동, 우면동, 원지동 등의 지역이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이런 가운데 1975년 성동구의 한강 이남지역이 강남구로 분구된다. 강남구의 신설로 서울의 한강 이남을 가리키던 '강남'은 행정구역 명칭이 되었다. 이로써 서울의 남쪽(남서울), 영등포의 동쪽(영동)이라 불리며 특정지역과 지리적 관계 속에서 지역명이 결정되었던 강남이 서울의 부도심으로서 위상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흐른 1979년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분구되었고, 1988년 1월 1일에는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독립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1백여년이 흐르는 동안 서울시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면적의 확장을 거듭해 왔다.
▲ 서울시 행정구역 변천 일제강점기부터 1백여년이 흐르는 동안 서울시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면적의 확장을 거듭해 왔다.
ⓒ 서울역사편찬원 <시민을 위한 서울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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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영등포일대가 경성부로 편입된 이래 강남은 몇 차례의 의미 변화를 해 왔다. 강남의 첫 번째 의미는 서울의 한강 이남지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강남은 지금의 영등포구와 동작구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1960년대 후반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남서울, 또는 영동이라 불리던 강남의 의미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경부고속도로 주변의 반포동, 잠원동, 양재동일대가 개발되면서 강남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 일번지로 달아올랐다. 이즈음 사람들은 강남이라는 말보다는 남서울, 또는 영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1970년대가 되자 강남은 더 이상 영등포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는 1975년 강남구를 신설하고, '부동산투기 억제세 면제' 조처를 단행하는 한편, 사대문 안의 명문 고등학교와 국가기관의 강남 이전을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나 사용되던 강남이라는 지명이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서울올림픽 개최와 3저 호황은 강남 개발과 투기를 부채질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전두환 정부는 서울 도심 정비와 함께 잠실올림픽 경기장을 비롯한 강남 일대의 개발을 일단락 지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국제적으로 형성된 3저(저달러, 저금리, 저유가) 효과를 등에 업고 고도성장을 구가하였다. 호황에 따른 여유자금은 강남발 부동산 불패 신화의 불쏘시개였다. 이 시기 강남은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증폭시키는 진원지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투기와 탐욕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강남은 부와 특권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굳건한 성채를 쌓았다. 이 시기 강남은 좁게는 강남구를, 넓게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지칭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대한민국은 강남에 뿌리를 둔 소수 특권층이 지배하는 강남공화국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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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봉 시민기자는 <오마이뉴스>에 매달 1만원 이상씩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10만인클럽 회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 주십시오. 휴대폰 010-3270-3828로 전화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끝까지 취재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강남, #조선총독부, #경성, #서울시 헌장, #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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