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축구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덕분에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다각도의 분석이 가능해져 이전보다 다양한 '숫자'가 팬들에게 데이터로서 제공된다. 데이터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코어, 득점의 수 등 몇몇 숫자만이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보통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플레이에 대한 숫자(득점, 슈팅 수 등)가 의미를 가지는 와중에 유독 플레이와 아무 연관이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숫자가 있다. 바로 선수들 등에 적힌 숫자. 즉 '등번호'다. 등번호는 그 선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단순히 선수 구분의 편의성을 위해 탄생한 등번호는 세월이 흐르자 단순한 번호가 아닌 의미와 가치를 더해진 '특별한 숫자'로 변모했다. 물론 모든 등번호가 가치 있는 '위대한 등번호'가 될 수는 없다. 세계 축구사에서 소수만 인정받은 '위대한 등번호'의 계보를 살펴보자. - 기자 말

등번호 7번은 축구계에서 매우 매력적인 숫자로 통한다. 과거에는 10번만이 진정한 '에이스'의 등번호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등번호 7번이 박힌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중 위대한 선수들이 탄생하면서 7번은 가치있는 번호로 변모했다. 현대 축구에서 등번호 7번은 사실상 10번과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7'이란 숫자는 서양 문화권에서는 'Lucky Seven(럭키세븐)'으로 불리는 행운의 숫자다. 행운의 숫자를 달고 공격 지역을 누비는 선수의 모습은 팬들을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숫자 그 자체로도 매력이 넘치는 등번호 7번의 매력을 배가 시킨 팀이 있다. 바로 리버풀과 축구 종가 영국의 축구 역사를 양분하고 있는 클럽.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거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다. 맨유의 7번 선수들은 영국 축구는 물론이고 세계 축구 역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맨유라는 클럽의 위상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맨유의 7번 계보에 대해 탐구해보자.

BEST is best - 조지 베스트

   축구 황제 펠레는 베스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꼽았다

축구 황제 펠레는 베스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꼽았다 ⓒ 위키미디어


세계 2차대전의 참화가 끝난 이듬해 북아일랜드의 한 마을에서 훗날 영국 축구를 뒤흔든 남자가 태어났다. 이름부터 이미 최고가 될 자질이 보였다. 맨유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서 이름을 깊게 새긴 조지 베스트(Best)가 그 주인공이다.

북아일랜드 태생의 베스트는 만 15세의 나이로 맨유의 부름을 받는다. 당시 북아일랜드로 선수 관찰을 위해 온 맨유의 스카우터 밥 비숍이 베스트를 발견하고 당시 감독이었던 맨유의 전설 매트 버스비에게 연락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맨유의 부름을 받고 타지로 떠난 어린 소년은 초반에는 맨체스터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무단 이탈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베스트의 천재성을 알아본 맨유는 그에게 채찍보다는 당근을 제시했다. 베스트는 매주 경기 후 본래의 집으로의 왕복 비행기 티켓을 구단 측에 요구했고, 구단은 이를 받아들여 베스트를 붙잡아 놓을 수 있게 됐다.

15세의 나이로 맨체스터로 간 베스트는 2년 만에 1군 데뷔전을 가졌다. 무려 만 17세의 나이에 데뷔전을 가진 것이다. 베스트가 얼마나 큰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베스트의 1군 합류 이전의 '에이스' 보비 찰튼이 등번호 7번을 베스트에게 내줬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다. 1군 데뷔와 동시에 베스트는 빠르게 주축 멤버로 자리매김했다.

측면 공격수로서 베스트는 완벽한 드리블러였다. 베스트는 브라질의 작은 새 '가린샤'와 비견될 정도로 세계 축구사에 손 꼽히는 드리블러로 평가 받는다. 득점력도 출중했다. 베스트는 맨유에서의 11시즌동안 데뷔 시즌과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한 8시즌에서 두 자리수 득점에 성공했다. 포지션이 윙어였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맨유 시절동안 베스트는 항상 뜨거웠지만 절정은 역시 1967-1968 시즌이었다. 이 시즌 맨유의 '에이스'는 발롱도르 수상자인 보비 찰튼이 아니라 베스트였다. 베스트는 해당 시즌에만 리그에서 28골을 성공시키며 득점왕에 올랐고 모든 대회를 통틀어 32골을 상대 골망에 집어넣었다. 보비 찰튼-데니스 로-베스트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는 'THE UNITED TRINITY'(맨유의 3인방)이라 불리며 유럽 무대마저 정복했다.

부상으로 주포 데니스 로가 결승전에 나서지 못했음에도 베스트와 찰튼의 활약 덕에 맨유는 에우제비오가 버티는 벤피카를 꺾고 잉글랜드 최초로 유러피언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베스트는 1968년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됐다. 참고로 1964년에는 로가, 1966년에는 찰튼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맨유에서의 선수 생활 이후 베스트는 여러 리그를 전전하며 다소 초라한 선수 생활을 보냈다. 전설적인 축구 선수로서 아쉬운 말년을 보냈지만 영국 팬들은 베스트를 영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베스트의 존재감 덕에 '맨유의 7번'은 맨유 뿐만 아니라 영국 축구 역사의 중요한 등번호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올드트래포드의 왕 - 에릭 칸토나

   칸토나(맨 앞)는 맨유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했다.

칸토나(맨 앞)는 맨유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했다. ⓒ 위키미디어


이 선수는 짧은 기간 맨유에서 활약했음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선수다. '영국인이 사랑한 유일한 프랑스인'이자 '올드 트래포드(맨유 홈구장)의 왕'. 영국에서 뛴 일곱 시즌 동안 총 다섯 번의 리그 우승을 일궈낸 에릭 칸토나가 화려한 수식어의 주인공이다.

프랑스인 칸토나는 프랑스에서 만 17세의 나이로 AJ 오세르에서 데뷔를 했다. 전설들이 으레 그렇듯 칸토나도 어린 시절부터 출중한 재능으로 많은 팀들의 관심을 받았다. 대단했던 축구 실력과 반비례하게 축구장 안팎으로 각종 말썽을 일으켜 팀을 곤란한 것은 문제였다. 오세르와 마르세유를 거치는 동안 상당수의 기행을 선보인 칸토나는 프랑스의 여러 팀은 전전했다. 결국 1991년 님 올랭피크 소속 시절 심판에거 공을 던지는 행위로 징계를 받게 됐다. 이에 격분한 칸토나는 선수 은퇴 선언까지 하게 됐다.

엄청난 비난이 이어졌지만 프랑스 축구의 전설 미셸 플라티니가 칸토나에게 잉글랜드 리그로의 이적을 권유했고 칸토나가 이를 받아들이며 전설이 시작됐다. 칸토나의 첫 잉글랜드 클럽은 맨유가 아닌 리즈 유나이티드였다. 칸토나는 리즈의 1991-1992 시즌 우승을 만들어내며 축구 선수로서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리즈에서도 감독과의 불화는 여전했다. 결국 칸토나는 120만 파운드라는 헐값에 맨유로 향하게 됐다.

맨유에서도 기행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맨유에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있었다. 퍼거슨의 지휘 아래 칸토나는 큰 말썽 없이 경기에 집중했다. 경기에만 전념하는 칸토나는 무시무시했다. 압도적인 피지컬을 갖춘 동시에 정교한 발기술까지 보유한 칸토나의 아름다운 플레이에 상대 수비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칸토나의 가세로 맨유는 1992-1993 시즌 우승을 곧장 차지했다. 1992년에 출범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초대 챔피언으로 등극한 맨유는 이듬해에는 리그와 FA컵을 동시에 석권했다. 기존 맨유의 에이스들처럼 많은 득점을 터뜨린 것은 아니지만 칸토나는 화려한 플레이로 경기 자체를 지배했다.

승승장구하던 칸토나는 1995년 1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크리스탈 팰리스와 경기에서 관중의 조롱을 참지 못한 칸토나는 관중에게 '쿵푸킥'을 날리는 폭행 사건을 저질렀다. 경기장의 선수가 팬을 직접 폭행했다는 것은 프로 스포츠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였기에 칸토나는 영원히 선수 생활을 못할 위기에 놓였다. 허나 퍼거슨 감독은 칸토나를 적극적으로 변호했고, 결과적으로 칸토나는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징계를 받게 됐다. 훗날 스타 선수여도 팀에 해가 되는 선수는 과감히 내치는 퍼거슨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선수 보호였다.

칸토나를 잃은 맨유는 그 시즌에 리그 우승을 놓쳤다. 위기에 놓인 맨유였지만 칸토나의 복귀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 칸토나가 복귀한 1995-1996 시즌 맨유는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동시에 일궈내면 또 한번의 '더블'을 만들어냈다. 칸토나는 다음 시즌에도 맨유의 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맨유에서 뛰는 다섯 시즌 동안 4개의 리그 우승 트로피를 수집하는 전설을 남겼다.

칸토나는 1996-1997 시즌을 마지막으로 만 31세의 나이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칸토나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맨유가 다시 영국 축구의 중심에 위치하게끔 만든 인물로 남게됐다. 가장 임팩트가 컸던 맨유의 7번이라 평가 받을 만하다.

7번의 매력을 극대화 시킨 선수 - 데이비드 베컴

   베컴은 단순히 잘생긴 선수로 기억하는 것은 곤란하다

베컴은 단순히 잘생긴 선수로 기억하는 것은 곤란하다 ⓒ 데이비드 베컴 페이스북


칸토나가 7번 유니폼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했지만 맨유의 7번 계보에는 공백이 없었다. 퍼거슨 감독은 당시 팀의 중심을 잡고 있던 로이 킨에게 칸토나의 주장 완장과 등번호 7번을 동시에 넘길 생각이었지만 킨은 주장 완장만 받기를 원했다. 킨은 당시 맨유의 어린 윙어에게 7번이 잘 어울리다고 퍼거슨에게 추천했고 퍼거슨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칸토나의 7번을 이어받는 어린 윙어는 '퍼거슨의 아이들'의 주축이었던 데이비드 베컴이다.

1975년생의 잉글랜드인 베컴은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맨유의 1군에 합류했다. 2년 전 데뷔전을 치르고 빠르게 주축으로 성장했던 라이언 긱스와 다르게 베컴은 곧장 주전급 선수로 활약하지 못했다. 1994-1995 시즌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임대를 떠났던 베컴은 그 다음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맨유의 주전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베컴은 긱스, 폴 스콜스 등과 함께 칸토나를 잘 보좌하면서 리그 우승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97년 은퇴한 칸토나의 등번호 7번을 물려 받은 베컴은 맨유의 7번다운 활약상으로 클럽의 성공의 중심에 섰다.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로 배치되었던 베컴의 오른발 킥은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선 굵은 잉글랜드 축구판에서 베컴은 킥의 '끝판왕' 같은 인물이었다.

왼쪽 측면에서는 긱스가 날카로운 드리블로 상대를 뚫는 반면 베컴은 정확한 킥으로 단숨에 상대를 궤멸시켰다. 프리킥, 코너킥 등도 당연히 베컴이 전담으로 처리했다. 윙어의 상징과도 같은 폭발적인 스피드는 없었지만 왕성한 활동량으로 약점을 메웠다. 날카롭고 정확한 크로스로 도움을 쉽게 적립했고, 찬스 상황에서의 득점력도 뛰어났다.

베컴의 킥은 구질, 속도, 정확도 등 완벽에 가까웠다. 수많은 도움과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베컴의 킥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단연 1998-1999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었다. 당시 결승전 상대였던 바이에른 뮌헨을 맞아 맨유는 고전했다. 베컴은 측면이 아닌 경고 누적으로 결장한 스콜스와 킨을 대신하여 중앙 미드필더로 출장했다. 잇몸으로 싸우던 맨유는 뮌헨에게 전반 6분만에 실점을 허용하며 끌려갔다. 뮌헨이 골대를 두 번이나 맞추는 행운이 없었다면 진작에 맨유는 침몰했을 것이다.

버티고 버틴 맨유는 결국 0대1의 스코어를 끝까지 유지했고 마지막 추가시간 3분 동안 역사를 바꿨다. 베컴은 '캄프누의 기적'을 만들어 낸 두 번의 코너킥을 모두 처리하며 기적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추가시간 돌입과 동시에 베컴이 처리한 코너킥은 문전 앞 혼전 상황을 거쳐 테디 셰링엄의 극적인 동점골로 완성됐다. 운이 따랐던 첫 번째와 다르게 두 번째 코너킥은 완벽했다. 베컴의 발을 떠난 공은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면 셰링엄의 머리에 배달됐고, 셰링엄의 헤더를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밀어 넣으면서 맨유의 2대1 역전승이 완성됐다.

맨유는 기적적인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트레블(리그-FA컵-챔피언스리그 동시 우승)'이란 업적을 세웠다. 베컴은 1999 UEFA 올해의 클럽 선수상을 수상했고,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에서는 모두 2위를 차지했다. 베컴은 조지 베스트 이후 끊겼던 발롱도르 수상자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게 됐다.

1998-1999 시즌부터 연속 네 시즌 EPL 도움왕에 등극한 베컴은 루이스 피구 등과 함께 세계 최고의 오른쪽 윙어로 자리매김했다. 길게 이어질 것만 같았던 베컴과 맨유와의 인연은 2003년 끝을 맺었다. 당시 FA컵 아스날과 경기에서 패한 것에 대해 퍼거슨 감독과 베컴의 설전이 오갔고 결국 둘의 관계는 크게 틀어졌다. 2003-2004 시즌부터 베컴은 맨유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경기장을 누비게 됐다.

베컴을 맨유의 7번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꼽기는 어렵지만 가장 스타성이 있었던 선수임은 확실하다. 뛰어난 실력이 과소평가 받을 정도로 화려한 외모를 소유한 베컴은 축구 선수의 스타성을 극대화시켰다. 호나우두는 몰라도 베컴은 알 정도로 베컴의 인기와 위상은 대단했다. 실력과 외모를 동시에 겸비한 베컴 덕에 맨유의 7번 유니폼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유니폼이 되었다.

맨유의 7번 계보는 베스트를 시작으로 최근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까지 빈틈이 없었다(호날두는 레알의 7번 계보에서 따로 후술하고자 한다). 강철 체력을 자랑했던 스티븐 코펠과 영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히는 브라이언 롭슨도 맨유의 7번이었다. 다만 호날두 이후 맨유의 7번은 유례없는 침체기를 겪고 있다. 현재는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공석으로 남아있다. 맨유의 7번 계보를 이어갈 선수의 등장을 맨유 팬들은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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