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간 세계인을 축구의 매력 속에 흠뻑 빠뜨렸던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이 프랑스의 우승을 끝으로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1998년 자국에서 열렸던 월드컵에서 첫 우승을 경험했던 프랑스는 20년 만에 월드컵 트로피를 다시 거머쥐면서 '아트사커'의 부활을 알렸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 경기 7월 16일 오전 0시(한국시각) 러시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201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4-2로 이긴 프랑스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 경기 7월 16일 오전 0시(한국시각) 러시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201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4-2로 이긴 프랑스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 PENTA-연합뉴스


준우승국 크로아티아의 도전은 강렬하고 감동적이었다. 인구가 약 400만의 불과한 크로아티아는 불굴의 의지로 16강부터 준결승까지 계속된 연장 혈투를 모두 뚫어내고 결승까지 안착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공격적인 축구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을 발휘한 크로아티아에게 지구촌 각지에서 박수가 쏟아지고 있다.

이번 월드컵은 그 어떤 대회보다 이변이 많이 속출했다. 월드컵 4회 우승의 이탈리아와 남미 챔피언 칠레는 아예 월드컵에 참가하지도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첫 출전의 아이슬란드와 비겼다. 디펜딩 챔피언 독일은 멕시코와 한국에게 연달아 덜미를 잡히며 F조 최하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무수한 기록이 양산됐다. 전통적인 축구 강호들이 몰락하고 벨기에를 비롯한 신흥 세력들이 등장한 영향이 컸다.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숫자'들이 축구 역사책에 깊게 박히게 됐다. 러시아 월드컵을 관통했던 '숫자'들을 통해 이번 대회를 다시 돌아본다.

0 - 아프리카 국가들의 '토너먼트 전멸'

이번 대회는 유럽 국가들이 강력함을 과시했다. 월드컵에 참가한 총 14개국 중 10개국이 16강에 진출했다. 유럽과 세계 축구를 양분하는 남아메리카 세력을 모두 밀어냈다. 4강에 진출한 4개국 전부 유럽 국가였다. 프랑스의 우승으로 유럽은 최근 4개 대회 연속 월드컵 우승을 기록하게 됐다.

화려했던 유럽의 월드컵 정복기와 달리 아프리카의 도전기는 실패로 종료됐다. 이집트, 모로코, 나이지리아. 튀니지, 세네갈 총 5개국은 조별리그에서 함께 탈락하며 대회를 조기에 마감했다.

아프리카 국가가 단 한 팀도 토너먼트 단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전멸한 기억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부터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 꾸준히 16강 진출팀을 배출했던 아프리카는 36년 만에 아픈 역사를 반복하게 됐다. 매 대회마다 돌풍의 팀이 탄생시켰던 아프리카 축구의 몰락이었다.

경험 부족이 아프리카의 발목을 잡았다. 나이지리아를 제외한 국가들은 최소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을 정도로 경험이 미천했다. 아프리카 특유의 폭발적인 속도와 파워는 인상적이었지만 결과를 가져오는 노련함은 부족했다.

'너와 나 한폭의 데칼코마니' 19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A조 러시아와 이집트의 경기. 이집트의 모하메드 살라흐와 러시아의 로만 조브닌이 볼다툼을 하고 있다.

▲ '너와 나 한폭의 데칼코마니' 지난 6월 19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A조 러시아와 이집트의 경기. 이집트의 모하메드 살라흐와 러시아의 로만 조브닌이 볼다툼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심지어 이번 대회에서 아프리카는 아시아에도 밀렸다. 아프리카가 러시아 땅에서 총 3승(세네갈, 나이지리아, 튀니지)을 수확한 사이 아시아 국가들은 합쳐서 4승(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을 챙기면서 우위를 점했다. 월드컵에서 적어도 아시아보다는 뛰어난 성적을 거둔다고 자부하던 아프리카 축구는 러시아에서 침몰했다.

6 - '용두사미' 조별리그 득점왕 케인

28년 만에 준결승에 진출하며 '축구 종가'의 부활을 알린 잉글랜드가 실로 오랜만에 월드컵 득점왕을 배출했다. 주인공은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 해리 케인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6경기에 나선 케인은 6골을 터뜨리며 프랑스의 앙투안 그리즈만을 밀어내고 득점왕에 등극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케인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6골로 득점왕에 오른 게리 리네커 이후 36년 만에 잉글랜드 선수로서 득점왕의 영광을 안았다.

역사책에 케인은 러시아 땅에서 가장 뜨거웠던 공격수로 남게 됐다. 그러나 뒷맛이 씁쓸했던 득점왕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케인의 이번 대회 성적은 '용두사미'였다. 케인은 6골 중 5골을 조별리그 1·2차전에 몰아 넣었다. 상대는 튀니지와 파나마로 잉글랜드에 비하면 현저하게 전력이 떨어지는 팀이었다. 이번 대회 다득점 2위의 기록이 4골인 것을 감안하면 케인을 '조별리그 득점왕'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득점을 터뜨리는 방식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6골 중 절반에 달하는 3골이 페널티킥 골이었다. 물론 페널티킥을 잘차는 것도 능력이긴 하지만 2002년의 호나우두, 2014년의 하메스 로드리게스 등이 보여줬던 화려함과 경이로움은 케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요소였다.

 2018년 6월 18일(현지 시간), 튀니지와 잉글랜드의 러시아 월드컵 G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 모습. 잉글랜드의 해리 케인 선수가 결승골을 터뜨리고 기뻐하고 있다.

2018년 6월 18일(현지 시간), 튀니지와 잉글랜드의 러시아 월드컵 G조 조별리그 1차전 경기 모습. 잉글랜드의 해리 케인 선수가 결승골을 터뜨리고 기뻐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골의 순도도 역대 득점왕 중 최하위권이다.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골은 6골 중 조별리그 1차전 튀니지와 경기에서 터뜨린 '극장골'이 유일하다. 특히 토너먼트 단계에서 부진했다. 16강 콜롬비아전에서 페널티킥 득점을 하나 잡아낸 것을 제외하면 침묵했다는 점이 뼈아프다. 이로써 케인은 1994년 미국 월드컵 공동 득점왕 러시아의 올레크 살렌코 이후 '가장 실속 없는 득점왕'으로 남게 됐다. 참고로 살렌코는 조별리그 스웨덴전 1골, 카메룬전 5골로 진정한 의미의 조별리그 득점왕이었다.

12 - 잊고 싶은 자책골의 기억

월드컵에서 1골은 그 어떤 대회의 1골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월드컵의 권위가 가져다주는 무게감이다. 골의 가치가 높을수록 자신들의 골문에 스스로 골을 넣는 자책골의 아픔은 그만큼 깊다.

이번 대회는 유독 자책골이 쏟아졌다. 무려 12골번의 슬픔이 있었다. 역대 월드컵 최다 자책골 기록을 경신했다. 종전 기록인 6골에 두 배에 달하는 자책골이 이번 월드컵에서 발생했다. 조별리그 B조 1차전 모로코와 이란의 경기에서 나온 아지즈 부아두즈 자책골을 시작으로 결승전 마리오 만주키치의 자책골까지 총 12명의 선수가 굴욕을 경험했다.

'이렇게 극적일수가' 15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B조 예선 모로코 대 이란의 경기. 모로코의 아지즈 부아두즈의 자책골이 터지자, 이란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 '이렇게 극적일수가' 지난 6월 15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B조 예선 모로코 대 이란의 경기. 모로코의 아지즈 부아두즈의 자책골이 터지자, 이란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번 대회에서 특별히 자책골이 많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많은 팀들이 차용한 촘촘한 수비 라인이 문제였다는 의견이 있다. 좁아진 공격 공간에 공격수들이 애를 먹었지만, 패널티 박스 안에 수비수가 많은 탓에 크로스나 슈팅이 골문 앞에 수비수를 맞고 들어가는 경우가 증가했다는 주장이다.  

한편에서는 VAR의 등장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이번 대회에서 본격적으로 실시된 VAR로 인해 수비수들은 도전적인 수비보다는 기다리는 수비에 중점을 뒀다. 공을 직접적으로 빼앗기보다는 상대 공격수의 결정을 기다리다보니 불가항력적 특성을 가진 자책골이 다수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29 - 페널티킥 '풍년'

축구에서 페널티킥은 흔히 '러시안 룰렛'이라 칭해진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선수도 골대 앞 11m 지점에 공을 세워 놓으면 실력 발휘에 종종 실패한다. 실력만큼이나 심리적 안정 혹은 '운'이 페널티킥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러시안 룰렛'의 본고장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어서 그럴까. 이번 대회에서 페널티킥 상황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무려 29번의 패널티킥 판정이 내려졌다. 1990년 이탈리아, 1998년 프랑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나온 18번의 페널티킥 기록을 우습게 넘는 수치다.

VAR이 많은 팀들의 운명과 결과를 바꿨다. 이번 대회에서 페널티킥 판정은 주심이 비디오로 판정을 결정 및 번복할 수 있는 네 가지 항목 중 하나였다. VAR 덕분에 찰나의 순간을 놓쳐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주심은 옳은 판정을 내릴 수 있었다. 스웨덴전 한국 수비수 김민우의 태클과 결승전 크로아티아 이반 페르시치의 핸드볼 파울 등이 VAR 시스템으로 인해 판정이 번복된 대표적인 페널티킥 허용 장면이다.

'지금은 비디오 판독중' 18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경기장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대한민국 대 스웨덴의 경기. 후반 패널티 지역 내 김민우의 태클을 VAR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 '지금은 비디오 판독중' 지난 6월 18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경기장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대한민국 대 스웨덴의 경기. 후반 패널티 지역 내 김민우의 태클을 VAR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29번의 페널티킥 기회에서 22개의 슈팅이 골망을 갈랐다. 득점보다는 오히려 실축이 이슈가 됐다. 가장 팬들의 뇌리에 박힌 실패 장면은 단연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의 실축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메시는 조별리그 D조 1차전 아이슬란드와 경기에서 페널티킥 득점 찬스를 노쳤다. 메시의 발을 떠난 공은 영화감독 출신의 골키퍼 한네스 소르 할도르손의 손에 걸렸다.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던 기회를 날린 메시의 굴욕이었다.

60 - 프랑스의 음바페, '펠레의 후계자'로 낙점

월드컵 역사의 가장 큰 별 '축구 황제' 펠레의 후계자가 드디어 등장했다. 지난 2년 간 UEFA 챔피언스리그를 통해 검증을 받은 소년이 월드컵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러시아 월드컵 챔피언 프랑스의 주전 공격수 킬리안 음바페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월드컵에 데뷔한 음바페는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조별리그 C조 2차전 페루와 경기에서 골을 터뜨리며 '프랑스 선수 최연소 월드컵 득점자'로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16강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멀티골을 몰아치며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의 펠레 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한 경기에서 2골 이상을 넣은 최초의 10대 선수가 됐다.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가 30일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16강전에서 역전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가 지난 6월 30일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16강전에서 역전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펠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음바페의 행보는 결승전에서도 이어졌다. 크로아티아와 경기에서 팀의 마지막 골을 터뜨린 음바페는 펠레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결승에서 득점을 기록한 10대 선수로 등극했다. '티에리 앙리의 재림'을 넘어 펠레의 후계자로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 순간이었다.

이번 대회에서만 4골을 잡아낸 음바페는 가볍게 신인왕에 해당하는 영플레이어 상을 수상했다. 영플레이어상까지 휩쓴 음바페는 펠레가 첫 월드컵에서 이뤄냈던 성과 대부분을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펠레도 이에 화답했다. SNS를 통해 펠레는 놀라운 10대의 등장에 축하와 기쁨의 인사를 전했다. 자신의 기록을 쫓아오는 음바페를 향해 "동지가 생겨 반갑다"는 말을 남겼다. 사실상 60년 간 이어져 왔던 '포스트 펠레'의 시대를 음바페로 종결하는 펠레의 선언에 가깝다.

음바페에게 남은 과제는 지속성이다. 17세의 나이에 세계를 제패한 펠레는 이후 2번의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불멸의 선수가 됐다. 음바페에게는 앞으로 최소 3번 이상의 월드컵 도전기가 예상된다. 펠레를 넘고자 하는 음바페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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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월드컵 페널티킥 음바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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