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4년 전, 다섯 살이던 큰 아이가 어느날 아침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일까. 수차례 이유를 물었지만 아이는 "그냥, 가기 싫어요"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가지 않겠다고 하자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사흘이 지나고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엄마, 000이 약 올리고 괴롭혀요."

당황스러웠다.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감했다. 해결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일단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이의 문제를 부모가 대신 해결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흘을 기다리니 아이가 다시 유치원에 가겠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격앙됐던 감정도 누그러졌고 무엇보다 다른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있다보니 심심하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피하지만 말고 그 친구에게 싫으면 싫다고, 하지 말라고 솔직하게 너의 마음을 이야기하라'고 타일렀다. 아이는 괴롭혔던 아이에게 말하는 연습까지 하고 나서 다시 유치원에 나갔다.

지금은 그때 갈등이 있었던 그 아이와 친구로 잘 지낸다. 기질과 성향이 너무 달라 가끔은 부딪칠 때도 있지만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때 '욱' 하지 않고 참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상대 아이의 부모나 유치원 교사에게 따지고 재발방지를 요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캐 물으며 억지로 상처를 헤집어 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의 아이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
▲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 표지 .
ⓒ 양철북

관련사진보기


어느덧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아이는 엄마 '껌딱지' 생활을 졸업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더 열중한다. 부모와 보내는 시간보다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친구 때문에 재미있고 기쁠 때도 있지만 친구 때문에 괴롭고 화가 나고 슬플 때도 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아이를 보면서 엄마인 나도 함께 롤러코스터를 탄다. 아이가 친구와의 관계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낄 때는 안심하다가도, 괴롭거나 힘들어하면 나 또한 속이 상한다.

아동심리학자 마이클 톰슨은 책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사회적 삶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신 아이를 움직이는 또래집단의 힘'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아이들의 사회생활의 중요성과 친구들을 괴롭히고 밀어내려는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성향, 그리고 이를 보상해주는 우정의 힘'(9쪽, 서문)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이의 삶에 스민 고통과 집단의 힘을 인식할 수 있을 때 당신은 과민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안정된 균형 감각으로 그 힘든 상황을 견뎌낼 수 있고, 그러한 태도는 아이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 어떤 무리의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통찰력을 가지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안정된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다. 아이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이해가 어른들을 긍정적인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 설사 그것이 중재를 위한 효과적인 전략을 마련해주지 못할지라도 통찰력은 당신의 당혹감과 분노를 진정시킨다." (38쪽)

아이들은 학교 생활을 통해 또래 집단과 관계를 맺는다. 학교는 아이들의 사회다. 아이들은 관계맺음에 서투르거나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좌절을 극복할 힘도 관계속에서 나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맺는 관계의 다른 이름은 '우정'이다. 우정은 아이들에게 정서적 지지와 안정을 제공하는 바탕이며 영혼을 풍요롭게 해 준다.

저자는 "모든 아이들은 누군가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다. 이는 처음에는 부모와의 애착으로, 나중에는 다른 어른들이나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로 나타난다"며 "한 아이가 교실이라는 환경에 던져지는 순간부터 그 아이는 아마도 친구들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똑같은 순간에 원하고 필요로 할 것"(259쪽)이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아이들을 정서적 안정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헬멧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정과 인기라는 울퉁불퉁한 언덕과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가는 법을 배울 때 아이들은 넘어지고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누구든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비열함과 배신과 놀림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는 없다. 시기만 다를 뿐이지 아이들은 짓궂은 일면을 드러내고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힐 때가 있다. 헬멧은 없고 충돌은 불가피한 환경에서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418쪽)

부모가 아이들의 친구 관계와 또래집단 안에서의 생활에 일일이 간섭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부모가 '균형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서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을 헤쳐나갈 능력을 스스로 터득할 기회를 박탈하게 될 것이다. 아이의 사회생활은 절대 부모가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사회적 잔인성'에 대한 탐구

아이들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놀려대고 배신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이들이 보이는 '사회적 잔인성'에 연구의 포커스를 맞춘다. 아이들은 또래집단에 속하는 순간부터 이른바 '집단의 법칙'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한 교실에서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폭력에 관계된 이들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두 분류로만 나뉘지 않는다. 소수의 피해자와 소수의 가해자 사이에는 늘 다수의 방관자들이 존재한다. 이 다수의 방관자들은 섣불리 나섰다가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피해자를 도우려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폭력을 방조한다.

아이들은 혼자 있을 때보다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있을 때 도덕적 책임감이 분산되기 때문에 남의 감정을 이해하고 헤아리는데 더 둔감해진다. 방관한 그룹 중 일부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하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일부는 집단의 권위에 순응하며 도덕적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한다.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모든 인간은 보이지 않는 중립적인 힘, 즉 집단생활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왜 서로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구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집단의 법칙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회적인 강제력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단순히 '불량배'나 '폭력배'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는 '선량한 아이들'도 때때로 '불량한 아이들'과 완전히 똑같은 기본 원칙을 따른다는 사실이나, 혹은 우리 학교에는 '불량한 패거리' 뿐만 아니라 '선량한 패거리'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153쪽)

저자는 약자에 대한 괴롭힘을 방지하고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방관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폭력적인 상황에 내던져진 친구를 바라보지만 말고 도와주는 것이 시민의식의 핵심이다. 아이들이 섣불리 공격과 배제에 가담하지 않도록, 약자를 배려하고 협동하도록 가르쳐야 할 몫은 어른들에게 있다.

많은 부모들이 공감하겠지만 내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의 모습과 학교에서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집에서는 마냥 착하고 이쁜 아이인 것처럼 보여도 실상 학교에는 약한 친구를 왕따시키거나 괴롭히는 것을 방조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이들의 또래집단 안에서의 정서와 행동, 즉 사회 생활의 이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앞으로도 나는 아이가 겪는 관계맺음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며 불안해하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 내 아이의 성장의 과정이라는 점, 그리고 그 성장의 바탕에는 우정의 힘이 있을 거라는 점을 믿어야겠다. 간섭보다는 믿음이 아이에게는 더 큰 힘이 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마이클 톰슨 외 지음 / 양철북 펴냄 / 2012.1 / 15,000원)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 - 당신 아이를 움직이는 또래 집단의 힘

마이클 톰슨 & 캐서린 오닐 그레이스 & 로렌스 J. 코헨 지음, 김경숙 옮김, 양철북(2012)


태그:#또래집단, #학교폭력, #왕따, #친구관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