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지 73년이 됐다. 지난 15일 광복절은, 조국 해방을 향한 선조들의 의지와 한반도에 남긴 일본의 만행을 기억하는 뜻깊은 날이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맞붙는 모든 스포츠 경기는 국민 다수의 주요 관심사다.

대다수 한일전이 그렇지만 특히 축구에서 일본은 '숙명의 라이벌'이다. '가위 바위 보도 지면 안 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한일전의 치열함을 대변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광복절 즈음, 한국 축구가 일본을 멋지게 꺾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통쾌했던 한일전 승리를 기억해본다.

'왜놈'한테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투신하라

1954년 3월 7일에 열린 '1954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 최초의 한일전에 나서는 태극전사들의 각오는 비장했다. 1954년은 해방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한국 축구 팬들에게 일본전은 절대로 지면 안 되는 경기였다.

스위스 월드컵 한국의 수문장 홍덕영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택상은 선수들에게 "왜놈한테 지면 현해탄에 투신하라"라는 말까지 남겼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중압감 속에 경기가 치러졌다. 다행히 선수들은 일본을 대파했다.

일본에게 먼저 실점했지만 정남식(2골), 최정민(2골), 최광석의 골을 엮어 일본을 5-1로 무너뜨렸다. 일본을 상대로 5골을 넣은 최초이자 마지막 승부였다. 1차전에서 일본을 가볍게 이긴 한국은 2차전에는 2-2로 비기며 1승 1무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본래 2차전은 홈&어웨이 방식으로 한국 땅에서 열려야 했지만 2차전도 일본에서 치러졌다. 두 경기 모두 원정경기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 축구의 원로들은 축구 팬들의 염원을 잊지 않았던 것. 최초의 한일전은 한국 축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한국의 전설 '차붐'의 해트트릭

일본이 한국과 대결에서 높은 기량을 보여준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2000년대 전까지 한국 대표팀은 철저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4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에서 한국은 1-4의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당시 최영근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에는 이회택, 김재한, 박이천 등 걸출한 공격수들이 많았지만 후반 20분 김재한이 1골을 넣는 데 그쳤다. 반면 일본은 훗날 일본 대표팀의 최다 득점자로 등극하는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2골을 뽑아내면서 크게 웃었다. 이날의 패배는 한국이 일본에게 3점 차이로 패한 최초의 승부로 남게 됐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은 이듬해 곧바로 통쾌한 승리를 선물했다.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된 메르데카컵에서 일본을 만난 차범근은 무려 3골을 폭발시키며 일본을 홀로 침몰시켰다.

이날의 패배에 일본은 충격을 받았던 탓일까. 1975년의 차범근 해트트릭 경기를 시작으로 한국은 11경기 연속 일본전 무패(8승 3무)를 이어갔다. 반 세기가 넘는 한일전 역사에서 가장 길었던 무패 기간이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의 압도적인 기세의 시작에는 차범근이 있었다.

"후지산이 무너집니다", 1997년의 도쿄대첩

 지난 1997년 월드컵 축구 아시아예선 한국 대 일본의 경기.

지난 1997년 월드컵 축구 아시아예선 한국 대 일본의 경기. ⓒ 연합뉴스


언제나 한국에게 뒤처졌던 일본은 1993년 J리그를 출범하며 아시아 1인자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을 코 앞에서 놓쳤던 일본은 단단한 준비를 통해 4년 뒤를 노렸다. 일본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진행된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한국을 넘고자 했다.

도쿄에서 열린 지역 예선 B조 3차전. 일본의 기세는 대단했다. '울트라 니뽄'으로 가득찬 관중석은 완전한 일본의 분위기였다. 팽팽하던 경기 흐름은 후반 20분 터진 야마구치 모토히로의 득점으로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한국의 중요한 경기에서 일본을 잡아내는 오래된 습관이 발휘됐다. 후반 38분 이기형의 크로스를 최용수가 머리로 떨궈놨고, 그 공을 교체 투입된 서정원이 낚아채며 포효했다. 동점골을 넣은 한국은 급격하게 살아났고 경기 종료 4분 전 최용수의 패스를 받은 이민성의 왼발이 번쩍였다. 골대 먼 거리에서 이민성의 발을 떠난 공은 원 바운드 된 후 시원하게 일본의 골망을 갈랐다.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TV 캐스터의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멘트는 한일전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어록이 됐다. 그만큼 1997년의 도쿄대첩은 한일전 승부에서 손꼽히는 경기로 기억된다.

'캡틴 박'의 여유로운 사이타마 산책

한국 축구의 영웅들은 으레 한일전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주곤 했다. 한국 축구의 불멸의 '캡틴' 박지성도 마찬가지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맹활약하며 이미 일본 축구의 동경과 시샘의 대상이었던 박지성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자신의 능력을 가감없이 보여줬다. 남아공으로 넘어가기 전 양 팀은 일본에서 모여 평가전을 가졌다.

한국을 잡고 화려한 출정식을 원했던 일본의 바람을 박지성이 산산조각냈다. 전반 6분 패널티 박스와는 거리가 있는 지역에서 공을 탈취한 박지성은 일본 미드필더들의 방해를 뚫고 전진했다. 박지성의 갑작스러운 돌파에 일본 선수들은 박지성을 추격하기 바빴다.

혼자서 일본의 중원을 관통한 박지성은 간결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득점 이후 세리머니가 압권이었다. 박지성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 일본 팬들을 유유히 응시했다. 박지성은 동료들과 사이타마 경기장을 여유롭게 산책했다. 박주영의 골까지 더한 한국은 가벼운 마음으로 출국에 나섰고, 일본은 크나큰 비난 속에 월드컵으로 향했다.

박지성의 사이타마 산책은 이후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멋진 득점을 터뜨리면 종종 재현됐다.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한일전에서 4-1 승리의 마지막 골을 넣은 염기훈은 도쿄 아지노모토 경기장을 산책했다. 선배 박지성을 향한 완벽한 오마주(hommage)였다.

광복절을 앞두고 나타난 런던의 '박시탈'

올림픽 첫 골이요 10일 오후(현지시간) 영국 카디프의 밀레니엄스타디움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축구 3,4위전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박주영이 첫 골을 넣고 기뻐하고 있다. 2012.8.11

▲ 올림픽 첫 골이요 10일 오후(현지시간) 영국 카디프의 밀레니엄스타디움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축구 3,4위전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박주영이 첫 골을 넣고 기뻐하고 있다. 2012.8.11 ⓒ 연합뉴스


축구 팬들 사이에선 연령별 대표팀의 한일전 역시 패해서는 안 되는 경기다. 그것도 타이틀이 걸린 경기는 두말하면 입 아프다. 2012년 8월 10일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이 그랬다. 당시 홍명보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 대표팀은 8강전에서 개최국 영국을 꺾으며 한국 축구 최초로 올림픽 메달 획득을 노렸다. 준결승에서 브라질에게 0-3으로 패한 한국의 마지막 상대는 멕시코에게 패배한 일본이었다.

일본도 동메달에 대한 열망은 강했지만, 동메달과 병역 혜택이란 무기까지 장착한 한국 대표팀의 각오는 남달랐다. 특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은 큰 동기부여로 작동했다. 실제로 올림픽 기간 중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며 열의를 불태웠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했다.

경기에 나선 한국 선수 전원은 일본 선수들과 강하게 부딪쳤다. 마치 몸싸움을 위해 경기에 나선 선수들처럼 일본 선수들과 시종일관 힘 겨루기를 했다. 박주영이 방점을 찍었다. 와일드 카드로 대회에 참가한 박주영은 환상적인 드리블로 일본 선수 4명을 제친 후 골을 넣었다. 한일전 역사에 길이 남을 골이었다. 후반 초반 터진 구자철에 득점까지 추가한 한국은 일본을 누르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광복절을 앞두고 승전보를 울린 공신 박주영과 관련된 패러디물이 쏟아졌다. 당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웅물 드라마 <각시탈>의 주인공을 박주영으로 바꾼 '박시탈' 게시물이 인터넷에서 무수히 창작됐다. '박시탈' 박주영은 한일전의 영웅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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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한·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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