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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6일,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 중 63명이 성인지 감수성 향상 교육 등 각종 교육과 직무훈련을 받고 목포교도소와 대전교도소에서 36개월 동안 대체복무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동안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 활동해온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제의 시작에 맞춰 병역거부 문제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는 것들과 대체복무제의 문제점과 개선점, 대체복무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기자말]
2006년 어느 날 입영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입영 일에 맞춰 병역거부 사유서 혹은 진술서를 제출한 저를 병무청은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당시 거주지 기준으로 서대문 경찰서와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서 각각 조사를 받았고 법원으로 넘겨졌습니다. 다른 비종교적 '거부자'들처럼 재판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가석방으로 1년 2개월 만에 출소했습니다.

병무청엔 사유서 제출 때, 한 번 방문했습니다. 학교 교장실 같은 분위기에서 실무자와 마주 앉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나질 않습니다. 시간도 짧았고, 너무 형식적이어서 뭔가 제대로 하는 건가 의심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경찰조사와 검찰조사도 신속했지만 느낌은 달랐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보던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색했습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수사관들의 표정이나 행동보다는 환경이 주는 압박감이 더 컸습니다.

지하철역에서 목적지까지 걸었던 길이나, 건물 로비의 적막한 풍경들, 엘리베이터에서 들려오던 기계음과 사무실까지 이어졌던 무거운 공기가 더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각각 한 번씩 방문했고, 추가조사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보다는, 현재 어디서 누구랑 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됐을 때도, 신분과 소재지를 확인한 판사는 특별히 병역거부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때 판사가 '왜'라는 질문을 했다면 답변을 제대로 못 했을 겁니다. 마지막 발언에서는 화장실에서 달달 외웠던 내용도 인공지능이 대신 말하듯 부자연스럽게 내뱉었습니다. 단순히 긴장한 탓만은 아닐 겁니다. 신념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건 그 존재를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2020년 10월 6일 대체역 심사위원회를 방문했습니다. 방문 목적은 병역거부 과정에서 겪었던 반 인권적이고 불합리한 상황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원장을 비롯한 실무자들은 이미 '우리'(이날 대체역 심사위원회를 방문한 출소한 병역거부자들)가 왜 왔는지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신청자가 양심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위원회가 비양심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취지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공간도 신청자들이 최대한 부담을 덜 느끼도록 구성한 흔적들이 보였습니다. 이런 곳이라면 긴장을 조금은 덜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문득 면담 중에 한마디도 안 했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대전에 있는 대체역 심사위원회를 방문해서 진석용 위원장, 유균혜 사무국장을 면담했다.
 대전에 있는 대체역 심사위원회를 방문해서 진석용 위원장, 유균혜 사무국장을 면담했다.
ⓒ 전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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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병역거부를 해서 심사를 받는다면

지금 다시 병역거부를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병무청이 아닌 대체역심사위원회에 연락해서 입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힙니다. 그러자 편입 신청서와 함께 본인 진술서를 비롯한 필요 서류들을 준비해 오라고 합니다. 필요한 서류가 꽤 많습니다. 부모와 주변인 진술서 그리고 종교인이라면 신도 증명서도 제출해야합니다.

가뜩이나 서먹한 부자관계가 병역거부로 더 냉랭해졌는데, 진술서라니요. 어머님께는 차마 말도 못 꺼낼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신청을 위해선 꼭 제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 부담 없이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여론과 반대파가 가만있지 않을 거란 심사관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을 갖습니다. 

어렵게 심사대상에 선정되어 심사위원회를 직접 방문했습니다. 대전까지 가야 했지만, 경찰서나 검사실 혹은 법원에 비하면 낫다고 위안을 삼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무개 아니냐며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미리 시간 약속을 하고 오긴 했지만,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딱딱한 분위기의 공적인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한참 빗나갔습니다. 음료수를 한 잔씩 마시며 시작된 대화가 어색하고도 신선했습니다.

보강조사를 위해 입실했던 '상담조사실' 역시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창문으로 밖이 훤히 보이고 그만큼 밝았으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이야기에 집중도를 높였습니다.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조사관이 양해를 구합니다. 본인은 신청자의 양심을 검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그 내용과 불일치하는 활동이나 진술을 확인하려는 것뿐이라고요. 

심사관이 조심스럽게 제 진술서가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말합니다. 하고 싶은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다시 써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습니다. 편입을 위해 도움을 주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처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 아니라 병역을 거부하기로 마음먹고부터 고민했던 경험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전 병역거부운동을 하기 전까지 신체검사 1급 판정을 받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때가 되면 가는 곳이 군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놀란 심사관이 다시 묻습니다. 그럼 신념을 증명할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화장실에서 소변기 대신 좌변기를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 만한 활동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상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통의 화장실을 사용해왔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회 의결자리에 참석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심사위원들 앞에서 발언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대회의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긴장이 심해집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화장실 가는 것도 잊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얗고 아는 사람 얼굴이 보이면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이상한 고민만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정작 발언하는 자리에서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납니다. 횡설수설하는 제가 심사위원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상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자꾸 질문만 하는 제 모습이 그려집니다.

'대체역' 자체를 심사할 수 있길 바라며
 
대체복무를 신청한 사람들이 면담을 위해 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편안한 분위기의 북카페로 만들어 놓은 것이 인상 깊었다.
 대체복무를 신청한 사람들이 면담을 위해 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편안한 분위기의 북카페로 만들어 놓은 것이 인상 깊었다.
ⓒ 전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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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처음으로 대체복무자들이 소집됐습니다. 대전교도소와 목포교도소에서 각각 근무한다고 하는데, 교정 시설에서 근무하고 숙식을 해결한다는 점에선 제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재소자들과 공동생활을 하지 않고 전과가 안 생긴다는 차이가 있지만, 기간은 훨씬 길어졌습니다.

위원장님 말씀처럼 앞으로의 3년이 제도 안착을 위해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선례를 만들고 데이터가 쌓이면 변화를 위한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이 편입되지 못했을 때의 문제도 중요하며,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병역거부자의 경우 진행 중인 재판을 위원회 조사과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도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습니다.

대체역위원회는 대체복무 내용 자체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하셨는데요. 언젠가는 위원회가 신청자뿐 아니라 '대체역' 자체를 심사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기획-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① 총과 게임에 집착한 검사님, 그런 병역거부자는 없습니다 http://omn.kr/1q1cf
② 2배의 복무기간, 이건 형평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http://omn.kr/1q31d
③ 독일의 대체복무, 예상치 못한 효과를 만들었다 http://omn.kr/1q51r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출소한 병역거부자입니다.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withoutwar.org/?p=16802


태그:#병역거부, #대체복무, #대체역 심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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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라는 신념에 기초해 전쟁과 전쟁을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활동하는 평화주의자?반군사주의자들의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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