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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은 뭐든지 잘 살펴보는 아이였습니다. 딜런의 엄마는 그 반대였지요. 지하철 역을 향한 엄마의 발걸음은 다급하기만 했습니다. 엄마는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빠른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음악소리가 들려옵니다. 온갖 선율이 지하철 역 안을 휘젓고 돌아다닙니다. 

"엄마, 잠깐만요!"

바이올린을 켜는 남자를 발견한 딜런은 잠깐만 듣고 가자고 합니다. 딱 1분이라도 멈춰서 듣고 싶지만 엄마는 "나중에"라며 계속 앞으로 갑니다. 딜런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바이올린과 멀어지는 가운데도 바이올린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구와왕' 들어오는 열차 소리가 음들을 와락 삼켜 버립니다.

집에 돌아온 딜런은 라디오를 켭니다. 그때 지하철에서 들었던 음악소리가 들려옵니다. 딜런은 엄마를 잡아 당깁니다. 스파게티를 끓이던 엄마가 딜런 손에 이끌려 라디오 앞에 섭니다. 

"딜런, 네 말이 맞구나."

엄마가 라디오 소리를 키웁니다. 음악이 커다랗고 아름답게 집안 구석구석을 채웁니다. 딜런과 엄마는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춥니다.

2007년 1월 12일 조슈아 벨이 워싱턴 D.C 랑팡 플라자 역에서 40억원이 넘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들고 실험에 참가했다. 세계 최정상급 바이올린 연주자가 평범한 거리의 악사로 지하철역에서 연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보는 이 실험에서 그는 43분간 연주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갔지만 일 분 이상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 사람은 일곱 명. 곡이 끝났을 때 박수를 친 사람은 없고, 바이올린 케이스에 담긴 금액은 32,000원 정도였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 음악을 듣는 사람이 적었고 그 가운데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다. 죠수아 벨은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가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귀를 기울여 보려고 고개를 돌리던 아이들 모습을 기억한다"고 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은 실제 진행됐던 실험에 조슈아 벨의 경험이 만나 탄생한 그림책이다. 
 
캐시 스틴슨 (글), 듀산 페트릭 (그림)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
 캐시 스틴슨 (글), 듀산 페트릭 (그림)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
ⓒ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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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들을 수 있지만 어른은 듣지 못하는 것.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을 보면 딜런과 엄마는 손을 잡고 있지만 둘의 시선은 어긋나고 두 세계는 단절돼 있다. 집에 돌아와 딜런이 엄마 손을 이끌고 라디오 앞으로 갈 때, 부엌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같이 음악을 듣는 엄마의 모습은 단절됐던 아이와 어른의 두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는 장면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은 생활에 지쳐 주위를 보지 못하는 어른들이 밝은 귀를 가진 아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한 걸음 내딛고 주저앉아 개미랑 놀고, 또 한 걸음 내딛고 꽃을 보는 느린 속도에 익숙해졌다. 그림책 속 딜런처럼 아이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했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였을 때 엄마에게 보여준 세상은 어땠을까?

우리 엄마는 7남매 둘 째 딸로 남자 형제들만 공부시키는 가풍에 따라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 했다. 학교 대신 친척 집에 아이 보는 식모로 보내졌는데, 엄마는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집안일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정도 자란 뒤에는 서울에 있는 큰오빠 밥해주러 상경해서 미용실에서도 일하고 여러 가지 노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가난과 차별을 겪은 우리 엄마 세대 부모들은 자식에게 '너만은 못 배워서 당하는 설움 겪지 말고, 공부 많이 해서 판사나 의사 되라'고 한다. 우리 엄마만 빼고. 우리 엄마는 자식들이 TV에 나오는 대학생처럼 기타치고 노래하고(당시는 80년대), 결혼해서는 피아노치고 노래하며 살기 바랐다.

엄마의 바람과 달리 우리 동네는 기타와 피아노를 꿈꿀 수 없는 동네였다. 빈부차가 뚜렷했던 동네에 초등학교가 딱 2개 공립 하나, 사립 하나 있었다. 사립은 한 학년에 두 반 밖에 없고, 공립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했다. 예상하는 대로 나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한 가지 운이 좋았던 건 내가 입학 할 때 혁신적인 교장 선생님이 부임해 오늘날 방과후 반과 같은 걸 개설했는데 무려 바이올린 수업이었다는 거다. 

피아노 학원은 35,000원, 학교에서 하는 바이올린은 15,000원. 우리 엄마는 고민없이 바이올린 반에 등록했다. 7살(학교를 일찍 들어감) 꼬꼬마 손에 1/2 바이올린을 쥐어주며 엄마는 기타와 피아노 꿈을 꿨다.

당시 우리 집은 조그만 한옥이었다. 우리 집 뿐 아니라 동네 골목 모든 집이 크기와 규모만 다를 뿐 가옥형식은 모두 한옥이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이 있고 안방 아래 쪽에 부엌이 붙어 있는 ㄱ자형 한옥에서 아랫방은 세를 주고 엄마, 아빠, 나, 남동생으로 이루어진 우리 가족은 안방에 거주했다.

부엌 앞에 수도가 있었고 옆에는 작은 시멘트 건물이 있었는데 한 칸은 화장실, 한 칸은 창고였다. 시멘트 건물 위가 옥상이었다. 옥상이라는 말이 가진 높이감이 없는 낮고 좁은 옥상 앞은 우리 집 기와지붕과 맞닿아 있었고 뒤는 뒷집 기와와 닿아 있었다. 장독대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 그곳에서 이빨을 들고 '까치야 까치야 헌 니 줄게 새 이 다오' 노래 부르고 지붕 위로 이빨을 던졌다. 

눈이 많이 내린 추운 겨울날이었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엄마가 고추장을 뜨러 옥상으로 갔다. 장독을 열어 고추장을 뜨는데 엄마 귀에 한 가닥 선율이 들렸다. 어린 소녀가 작은 손가락으로 바이올린 현을 꼭꼭 눌러서 내는 소리.

엄마는 고개를 들었다. 한옥기와 지붕이 줄지어 있는 동네에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소리에 엄마는 미소 지었다. 까만 기와지붕 위에 쌓인 하얀 눈과 엄마 손에 들린 빨간 고추장 위로 흐르는 바이올린 소리는 엄마의 꿈이었다.

"골목 끝 가장 작은 우리 집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나니까. 우리 집이 제일 부자 같았어."

바흐의 미뉴에트 한 곡으로 세상을 다 가진 엄마는 이후에도 친구들이 주산 학원, 컴퓨터 학원, 영수학원에 다닐 때 나에게 피아노와 기타를 가르쳤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대학에는 기타가 사라졌고, 지금 나는 아이와 피아노 대신 CD를 들으며 노래한다. 엄마가 투자한 사교육비가 방향을 못 잡고 있긴 하지만, 돈 많은 부자 말고 마음이 부자인 삶을 살라는 가르침 덕에 마음만 부자인 채로 살고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에서 아이가 안내한 바이올린 선율의 세계와 어릴 적 내가 켠 바이올린 선율의 세계 모두 엄마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엄마에게 선사한 바이올린 선율은 엄마 덕이다.

공부보다 음악을, 돈보다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엄마는 그림책 속 아이처럼 눈과 귀가 밝은 사람이었다. 엄마 덕에 지하철에서 조슈아 벨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고, 이젠 아이가 조슈아 벨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이번 주말엔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을 들을 수 있도록 안내해 준 엄마와 아이를 앞에 두고 오래전 겨울날 연주했던 미뉴에트를 켜야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

캐시 스틴슨 글, 듀산 페트릭 그림, 천미나 옮김, 책과콩나무(2014)


태그:#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 #조슈아 벨,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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