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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부터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8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가 됐습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 - 기자말  
 
군산 한길문고를 찾은 송민정씨
 군산 한길문고를 찾은 송민정씨
ⓒ 송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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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분야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식당에 들어가서 혼자 밥을 먹는 게 힘들다.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해도 혼자서는 극장에 가지 못 한다. 상점에 들어가서 혼자 옷을 고르는 걸 주저하고, 여기 아닌 다른 데로 혼자 떠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없다.

전북대학교 사회복지학과 4학년 송민정씨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던 사람. 스무 살 때는 전공 이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스물한 살 때 단숨에 읽은 책은 <채식주의자>.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노는 것에 푹 빠진 청춘을 움직일 만큼 '핫'한 사람이었다. 그 뒤로 민정씨를 사로잡은 책은 딱히 없었다.

대전에서 나고 자라 전주에서 대학을 다닌 민정씨. 놀러가는 곳으로만 알았던 군산에 온 건 지난해 여름이었다. 3학년 때 실습 나온 적도 있는, 그 뒤로 행사 때마다 자원 활동을 다녔던 '청소년자치연구소'에서 일 좀 도와달라고 했다. 민정씨는 경험 삼아 한 달만 해보고 돌아갈 예정이었다.

용기 낸 사람들

군산에 오고 계절은 두 번 바뀌었다. 여전히 같은 일을 하는 민정씨는 시급을 받던 사람에서 정규직이 됐다. 되돌아보면, 5년 전부터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민정씨는 엄청나게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눈여겨봐주는 교사도 없었다. 학교 밖의 YMCA 청소년 간사만이 민정씨를 '알아봐줬다'.

"이걸 민정이가 처음 한 거라고? 정말 잘 했다!"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칭찬받던 고등학생은 자신의 운명인 듯 진로를 정했다. '내가 받은 것처럼,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청소년과 관련된 일이 있는 곳이라면 찾아가서 자원 활동을 했다. 마침내는 "여기다!" 싶은 일터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근데 퇴근하면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못 해요. 방도 안 치우고 전기장판에 누워만 있거든요. 그날(지난해 11월)도 집에 가서 페이스북만 보고 있었어요. 한길문고 상주작가님이 북클럽을 연대요. 책을 다 안 읽어도 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렇게라도 약속을 잡아놓으면 독서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잖아요."
 
군산 한길문고 북클럽
 군산 한길문고 북클럽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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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나는 민정씨 같은 사람을 떠올리며 북클럽을 만들지는 않았다. 맘에 드는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사람, "재미없더라. 왜 그 책을 추천한 거야?"라는 타박을 듣고서도 "이 책은 진짜 다를 거야" 하며 은근슬쩍 들이미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독서인들은 북클럽을 하지 않아도 책을 탑처럼 쌓아놓고 읽는다.

"한길문고 상주작가야, 일해라! 북클럽을 열어라!"라는 주문을 나한테 거는 사람들은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 "안 되더라고요. 이제는 책 좀 읽어야 하는데요... "라고 말끝을 흐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드라마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는 일상을 바꾸기 위해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었다.

"내가 읽은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섬에 있는 서점>의 주인공 에이제이가 어밀리아한테 청혼하면서 한 말이다. 같이 책을 읽고 싶다는 사람들한테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나는 페이스북과 <교차로>에 북클럽을 연다는 방을 붙였다. 신청한 사람은 열일곱 명,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 밤 8시에 만나기로 했다.

결국 채팅방을 만들었다

사람이 많다고 메신저 단체 채팅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오후 7시에 북클럽을 하는 줄 알고, 퇴근하자마자 밥도 안 먹고 부랴부랴 온 젊은 선생님한테는 다정하게 시간을 알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이나 먼저 와서 "오늘, 맞죠?"라고 해맑게 웃는 선생님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눈 내린 토요일 아침입니다. 북클럽 단톡방을 만들었어요. 갑자기 왜냐고요? 어젯밤 8시에 한길문고로 북클럽 회원 한 분이 오셨어요. (소곤소곤) 윤은경 선생님이셨어요.^^ 이 방에서는 북클럽 일정과 책에 대한 얘기만 할게요."
 
군산 한길문고 북클럽 회원들. 매월 둘째 넷째 주 금요일 밤 8시에 만나서 책 읽은 얘기를 한다.
 군산 한길문고 북클럽 회원들. 매월 둘째 넷째 주 금요일 밤 8시에 만나서 책 읽은 얘기를 한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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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독서도 그렇다. 시간을 쪼개서 책을 읽으려고 하면 다른 할 일이 끼어든다.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설거지를 끝낸 부엌에는 또 물 마신 컵이 한가득 쌓여있고, 세탁기는 빨래 다 됐다는 음악을 울리며 재촉한다. 어느 날은 직장 일이 집에까지 따라와서 들러붙어 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펼친 책. "이런 내용이군. 읽을 만 하겠어"라고 몰입 하려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서 텔레비전을 켠다. 저만큼에 놔뒀던 스마트폰을 가져온다. 헐! 한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내일부터 진짜 잘 읽자'는 다짐을 몇 번 했을 뿐인데 어느새 한길문고 북클럽 가는 날!

첫 번째로 읽은 책은 <섬에 있는 서점>. 다 읽지 못 했다고 실토하는 사람들이 절반이나 됐다. 나는 자책했다. '300쪽 넘는 책은 너무 두꺼운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앨리스 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너무 복잡했나?' 북클럽 회원들은 상주작가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명랑하게 다음 모임을 기약했다.

두 번째로 읽은 책은 <소년의 레시피>. 군산 사람들에게는 지리적인 거리감이 없다. 익숙한 동네들과 학교가 나온다. 나오는 인물도 많지 않고, 254쪽밖에 안 된다. 그럴 줄 알았다. 대다수가 완독하고 왔다. 한길문고 문을 닫는 밤 10시까지 화장실도 가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민정씨는 일이 바빠서 나오지 않았다.
 
맛있거나 멋잇는 음료와 음식을 먹으면 그림으로 그려보는 민정씨. 너무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흑돼지 그림을 못 찾아서 아쉽다.
 맛있거나 멋잇는 음료와 음식을 먹으면 그림으로 그려보는 민정씨. 너무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흑돼지 그림을 못 찾아서 아쉽다.
ⓒ 송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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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을 갔는데요. 흑돼지가 너무 맛있는 거예요. 카페 가서 뭐 먹으면 그림을 잘 그리거든요. 흑돼지 그림도 그렸어요. 진짜 맛있었어요."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얘기하던 세 번째 모임에서 민정씨가 한 말이다. 배고플 때, 배 아플 때, '종이 위의 음식'을 읽는 게 고통스러웠다는 회원들 속에서 돋보이는 먹방 설명이었다. 물론, 민정씨는 책을 끝까지 읽지 못 했다는 고백을 했다. 나는 민정씨에게 23년간이나 그림식사일기를 그려온 <시노다 과장의 삼시세끼>를 권했다.

걸으면서 책 읽기

밥을 사먹는 민정씨는 완독을 결심했다. 네 번째 북클럽이 하루 앞으로 닥쳐온 날, 야근하다가 <걷는 사람, 하정우>를 챙겨서 카페로 갔다. 닫혀 있었다. 다른 카페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정씨가 사는 곳은 군산의 구시가. 밤 9시만 돼도 거리는 숨죽여 웅크린다. 민정씨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고민했다.

"집에 가면 퍼질 것 같았어요. 걸어 다니면서 책을 읽었죠. (웃음) 제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감상에 빠져가지고 인증사진도 찍었어요. 77쪽에 한 발자국만 나가보라고, 희망의 순풍이 살짝 분다고 나오거든요. 포기하지 말고 걸어보래요. 그게 되게 좋았어요. 제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낯선 시기거든요. 생각만큼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없고요."
 
가로등 불빛 아래서 책을 읽으면서 걷는 자신에게 반한 민정씨. 인증사진을 찍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책을 읽으면서 걷는 자신에게 반한 민정씨. 인증사진을 찍었다.
ⓒ 송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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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생활도 처음, 사회생활도 처음, 10대들과 만나서 진짜로 일하는 것도 처음인 민정씨는 청소년들과 <일어나기 5분 전>이라는 책을 펴냈다. 아이들은 책 만드는 작업할 때 서로 의견이 달라서 많이 싸웠다. 어른에다가 선생인 민정씨는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 밤마다 전화로 남자친구한테 하소연을 했더랬다.

네 번째에 이른 북클럽. 회원들은 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또랑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들며 말을 했다. 갖가지 이야기는 비 온 후의 시냇물처럼 속도를 내며 흘러갔다. 배우 하정우씨네 북클럽처럼 '서로의 마음을 채굴'하는 밤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책에서 알게 된 '돌려 깎기(지름길을 두고 목적지까지 돌아 걷는 것을 뜻함 -편집자말)'를 박효영 선생님과 1시간 50분 동안이나 했다. 다음 날, 몸이 아파 못 나온 이소윤 선생님은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서 삶의 주도권과 건강에 대해 얘기했다. 이윤주 선생님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4박 6일이 주어진다면 할 일, 오화진 선생님은 매주 통신비 3천 원을 할인받을 수 있는 걷기 어플을 알려주었다.

"이 북클럽이 진짜 좋아요. 제가 청소년자치연구소 바깥의 사람들과 관계를 좀 쌓고 싶었거든요. 연령은 상관없었어요. 저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의 사고도 궁금했고요."

북클럽 회원의 평균연령을 확 낮춰주는 민정씨가 말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날마다 읽는 건 어렵다고도 했다. "하루 날 잡아서 읽어야 해요"라는 그녀가 2주에 한 번씩 걸어 다닐 구시가의 밤 분위기가 그려진다. 어느 밤은 벚꽃 잎이 흩날리고, 어느 밤은 끈적끈적한 바람이 팔에 감기고, 어느 밤은 은행잎이 발밑에 굴러다니고, 어느 밤에는 눈도 오겠지.

민정씨, 한길문고 북클럽의 목표는 완독 아니에요. 무결석입니다. 유난히 근사한 밤에는 남자친구랑 오래오래 통화 하세요.

태그:#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군산 한길문고, #한길문고 북클럽, #달그락 송민정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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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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