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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봐도 안됐다. 하긴 아는 게 없으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였다. 코끼리는 촉감이라도 있지. 휴대폰은 오감을 동원해도 고칠 수 없었다. 뭐 때문인지 모르지만 며칠 전부터 좀 이상했다. 속도가 느려지고 배터리가 급격히 소모되더니 이제는 뭐가 문제인지 모든 애플리케이션이 굼벵이처럼 작동했다. 아... 속이 터진다.

귀가하는 남편을 잡고 좀 만져보라고 했다. 나보다는 조끔 나으리라 믿으며. 별 소득이 없었다. 또 속이 터진다. 딸과 통화를 하려면 '스카이프'라는 앱을 써야 하는데, 앱이 열리지 않는다. 삭제하고 다시 깔라는 딸의 말에 다시 깔려고 했더니, 이번엔 '구글 플레이 스토어'가 아예 사라졌다. 아무 짓도 안했는데, 대체 왜 없어진 걸까. 며칠 전 휴대폰 업그레이드를 하라고 재촉하는 창이 하도 뜨길래, 그저 업그레이드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왜 스토어가 사라진단 말인가. 대체 왜.

두 해 전인가, <디지털 이민자 (Digital Immigrants)>라는 다큐멘타리를 본 적이 있다. 20여 분 정도의 짧은 다큐였다. 컴퓨터 앞에 골똘히 턱을 괴고 있는 노인 분들이 대거 등장한다. 나는 그 표정을 안다. 나도 지어 본 표정일 터. 표정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 어쩌라는 거지?"

노인들은 서로의 컴퓨터를 들여다보지만 막막하다. 권위 있어 보이는 한 노인이 여기저기 다니며 한마디씩 훈수를 두고 있었는데, 컴퓨터를 잘 아는 게 분명하다. 어디서건 독보적 지식은 권력이 아니던가. 젊은이들이 들으면 "헐" 하겠지만, 이메일을 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 집단에선 짱이 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일 것이다. 노인들의 표정은 패잔병처럼 낙담가득하다. 시무룩한 노인들이 고개를 저으며 토해내는 말은 하나같다. "왜 안 되지?", "안 돼."

1984년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지식이 위계를 만드는 방식이 그렇듯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한 사람에게만 신세계가 열렸다. 인터넷이 등장할 당시, '누구나 정보에 평등하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과연 그럴까? 슬로건과 달리, 세상은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민자'로 나누어졌다. 노인들도 신세계에 진입하고자 디지털 교육을 받아보지만, 약자에게 평등한 세계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아침부터 AS센터에 갔다. 증상을 듣더니 진단이 내려졌다. "휴대폰 운영체계가 엉켰어요." 난 그 운영에 관여해본 적도 없는데, 대체 누가 운영하면서 고장을 냈단 말인가? 초기화를 시켜야 한다는데 그러면 휴대폰 모든 것이 지워진단다. 한숨이 나온다.

다 없어지면 안 된다니까, 그럼 '백업'을 하란다. 백업을?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손바닥 만한 지침서를 주며 자기들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집에 가서 컴퓨터에 백업하고 다시 오란다. 또 한숨이 나온다. '백업'은 뭐고 '복원'은 뭐고...

맥 빠져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약은 이미 오를 대로 올랐다. 지침서에 나온 대로 S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더듬대며 백업하라는 버튼을 찾아 눌렀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연결하란다. 뭘로 연결하지? 아, 아까 그 직원이 충전기 선으로 하면 된다고 했다.

빼보니 빠졌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연결하고 하라는 대로 해본다. 백업을 시작한단다. 아이고 머리야. 스트레스로 머리가 부글부글댔다. 지친 몸을 잠깐 누이고 일어나 커피 한잔을 마시고 보니 백업완료란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AS센터로 갔다.

다시 그 직원에게 가서 백업했다고 하니, 초기화를 시킨단다. 십 여분 기다리란다. 겨우 한 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상담 받는 대부분이 중장년층이었다. 내 속이 까매져서 그렇게 보였겠지만, 그분들도 다큐 <디지털 이민자>의 노인들처럼 상심한 듯 보였다. 한 분은 SNS에 뭘 쓸려고 하면 글자가 없어진다고 하소연하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전화만 받으면 끊어진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다들 속 터지는 사연들인 게다.

디지털 난민의 설움
 
어딜 가도 '디지털 이민자'는 서럽다. 병원 예약을 할라 쳐도 회원가입부터 해야 해서 도움받을 곳이 마땅히 없는 노인들한테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어딜 가도 "디지털 이민자"는 서럽다. 병원 예약을 할라 쳐도 회원가입부터 해야 해서 도움받을 곳이 마땅히 없는 노인들한테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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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된 휴대폰을 들고 다시 컴퓨터를 켠다. '복원'이 안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선다. 아까 분명히 백업하고 컴퓨터를 그대로 켜둔 채 나갔는데 백업창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뚜껑이 열리고 김이 나기 시작한다. 아, 찾았다. 어떤 경로로 찾았는지 절대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백업창이 나타났다. 다시 휴대폰과 컴퓨터를 연결하고 복원 버튼을 누른다. 휴...

다시 지친 몸을 잠시 누이고 와보니 복원이 다 되었다. 휴대폰을 킨다. 오... 내 앱들이 예전처럼 다시 살아나 있었다. 어이구, 반가워라. 다시 스토어에 들어가 '스카이프'를 깔아야한다. 그래야 딸과 통화를 할 수 있다. 아, 뭐라고. 로그인을 하라고? 비밀번호? 당연히 기억 안 난다. 새로 만들어 본다. 겨우 스카이프가 깔렸다. 어서 딸애에게 메시지를 넣어야지, 했는데 자판이 영문이다. 이상하다, 전에는 한영 혼영이었는데. 아, 이게 끝이 아니었구나. 또 김이 마구 나오기 시작한다.

설정에 들어가 키보드 부분에 뭘 눌렀더니 한글판이 나왔다. 딸과 겨우 급한 메시지만 짧게주고 받았다. 자주 들락거리는 홈페이지에 들어가려니 로그인을 해야 하는데 영문으로만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키보드가 영문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또...

아무리 해도 전처럼 영문혼용이 되지 않는다. 한글만 버티고 있고 영문이 안 나타난다. AS기사가 뭘 잘못했을 리는 없을 테고 마침내 약이 바짝 올라 눈물이 나려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이 왜 '디지털 이민자'로서 괴로워 했는지 너무나 깊이 절절하게 이해되었다. 컴맹인 그가 어떻게든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하는데, 그 모든 과정을 전부 컴퓨터로만 신청하란다. 디지털 이민자에게 이런 일방적 시스템은 폭력에 다름 아니다.

이 정도의 폭력적 상황에 맞닥뜨리면 '이민자'란 용어도 매우 우아한 표현이 된다. 심정 상으로 다니엘은 '디지털 난민' 신세였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런 경우 '난민'처럼 느낀다. 깊은 소외감으로 상심한다.

어딜 가도 '디지털 이민자'는 서럽다. 병원 예약을 할라 쳐도 회원가입부터 해야 해서 도움받을 곳이 마땅히 없는 노인들한테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진료 받고 진료비를 계산할 때에도, 기계로 처리하는 일은 디지털 이민자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공항에서 체크인 수속을 기계로 해야 할 때도 디지털 이민자들은 작아진다. 공공기관에서 발급하는 각종 서류를 발급받을 때도 공인인증서 때문에 인터넷으로 발급받기가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회 운영 시스템이 디지털 이민자를 '이등 국민' 취급한다. 열불이 나지만 소수자의 운명은 포기와 낙담이다. 이미 디지털 이민자는 소수자의 한 정체성이 되어 있다. 컴맹, 디지털맹. 이것이 디지털 세계에 낙오한 사람들을 일컫는 멸칭이다.

디지털기계에 너무 착취당하며 영혼까지 털리는 기분이 들어, '휴대폰을 버릴까' 생각해 본다. 디지털 세계가 나를 버리기 전에, 이미 버림받은 느낌이지만, 아날로그 원주민으로 우아하게 후퇴하는 것이 그나마 품의를 지키는 게 아닐까? 그런데 바다건너에 있는 딸애랑은 어떻게 소통하지? 아... 디지털 난민의 비애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디지털 이민자 , #디지털맹 , #컴맹, #나,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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