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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에서 일본전관거류지(초량왜관)까지의 지도 부분 - 출처 : 부산항 시가 및 부근지도(1903)>
▲ 부산항 시가 및 부근지도 설문에서 일본전관거류지(초량왜관)까지의 지도 부분 - 출처 : 부산항 시가 및 부근지도(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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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을 넘어가다

1906년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초대 통감으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사이 하세가와 요시미치 주차군 사령관이 임시직무대리를 했다. 이토는 3월 9일 황제를 알현하고 본격적으로 통감으로 활동하였다.

통감부 설치로 열강들의 한국문제에 대한 외교적 개입은 차단되었다. 일제는 지방행정 장악과 지방 일본인 이익을 보장하고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 주요 지역에 이사청을 설치하였다. 부산이사청은 종래의 부산영사관 사무를 그대로 인수하고 동래감리서를 흡수하여 부산지역 일대를 관장했다. 이사청은 한국 지방 관헌을 지휘, 감독하며 한국 지방을 장악, 지배하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었다.

개항 후 82명이었던 부산의 일본인은 1904년 한국 거주 일본인의 40%인 1만2천여 명이 거주하였다. 대일무역은 부산항을 통해 이루어졌다. 1905년 부산항 무역에서 수출의 97.7%, 수입의 87.8%을 차지하였다. 부산항의 무역은 일본이 독점적 지배하였다. 부산항과 경부철도는 물류의 중심이었다. 부산은 한국 속의 일본이었다. 1907년 부산 총인구의 약 35%인 2만4604명이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5명에 일본인 2명으로 부산에는 이제 일본인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초량왜관 지역은 개항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됨으로 일제의 대륙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을사늑약의 충격을 겪은 정공 단의 아이들은 일본이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초량왜관 구경을 가기로 하고 나섰다. 조선인 마을과 일본인 거류지역인 초량왜관은 담장을 쌓아 출입을 제한했었다. 6칸(間) 규모의 출입문이 바로 설문(設門)이다. 왜관 바깥에 설치한 설문은 조선 여인과 일본 남자의 매매춘과 사랑 문제, 밀무역 등을 해결하기 위해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에 의해 설치되었다. 설문은 강화도 조약을 한 1876년 무너졌다. 이제 일본인 거류민의 처자(妻子)동행 거주도 가능해졌다.

설문을 넘어서면 일본인 사신 차왜(差倭)가 머물렀던 초량객사가 있었다. 차왜가 조선 국왕에 대해 예의를 표하고, 인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초량 객사 인근 산은 민둥산이었다. 그 아래 조선인 마을에는 초가집들이 돌담 따라 줄지어 있었다. 초량 객사터에는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동래(부산)감리서와 항내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서가 1896년부터 1906년 10월까지 10년 동안 있었다. 1906년(광무10) 10월에 동래감리서가 폐지되자 동래부 청사가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부산구재판소(釜山區裁判所)가 부청(府廳) 이웃 공간에 들어섰다.

"야, 저기에 학교가 있다."

아이들이 바라본 곳에는 학교가 있었고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체조를 하고 있었다. 정공단 아이들은 육영재 서당을 막 다니기 시작하였던지라 운동장에서 철봉에 매달리는 등 체조를 하는 것이 신기했다. 감리서에서 남쪽 180m 거리의 언덕에 1062평에 목조 단층 교실 4실, 직원실 1실 등 건평 약 72평의 개성학교(추정 위치: 부산시 중구 영주동 640번지)가 있었다.

'한국 국민의 지능을 계발하고 도덕을 진전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1896년 개교하였다. 경무관 박기종 등 한국인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일본인 교장과 교사 중심으로 일본인의 자금을 지원받아 운영되었다.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일본어로 수업을 하였다. 입학자는 100여 명이었지만 중퇴자가 많았다. 이유는 졸업보다 중도에 관청 취직자와 유학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초등과 졸업생은 한자리 인원이었다.

1909년 2월 1일 사립개성학교는 한국 정부에 헌납(6회 졸업생 누계 85명)을 했다. 1909년 4월 9일 공립부산보통학교와 공립부산실업학교로 분리 개교하였다. 부산보통학교는 감리소 자리로 옮겨 1922년까지 학교로 사용했다. 부산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는 한국인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으로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이다. 개성학교 자리에는 공립부산실업학교가 자리했다. 한국 최초의 공립실업학교로 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로 개명했다. 정공단 아이들은 이 학교가 몇 년 뒤 그들이 다닐 학교일 줄은 몰랐다.
 
1905년경 부산 중구 영선고개-출처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초량동과 영선고개 1905년경 부산 중구 영선고개-출처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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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학교를 지나자 고갯길이 나왔다. 영선고개는 영선산 사이의 고개이다. 지금의 영선고개는 복병산 사이의 고개로 중구청 앞 길이다. 아이들은 바닷가 영선산 고개를 넘어갔다. 바닷가 쪽에는 봉우리가 두 개인 40여 미터의 쌍봉을 가진 영선산이 있었다. 봉우리 사이에 논이 있어 논치라고 했고 산아래 좌우에는 논치어장이 있었다. 해안에는 왜관에 공급할 땔감늘 저장하던 시탄고가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들은 걸었다. 고개 북쪽은 가난한 한국인 초가들이 길가에 어깨를 겨루고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1892년 부산에 왔던 일본인 스에히로 시게야스(末廣重恭)은 "조선으로부터 돌아온 자의 말을 듣건대 그 가옥이 더러운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었는데, 지금 실지로 보니 참으로 협소하고 또한 더러운 것에는 틀림없으나 상상하던 것과 같이 심한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이나 높이가 5~6척으로 흙과 돌로써 벽을 쌓고 모고(茅藁, 이엉)로 지붕을 덥고 방 한칸의 넓이는 대개 2첩(疊, 다다미) 정도의 넓이다. 좀 큰 집은 3~4실이 있고, 적은 집은 방 한 칸에 불과하여 식기, 가구류까지 그 안에 쌓여있다. 이것을 사람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축사로 볼 것이다. 공평하게 이것을 평하면 그 촌락은 우리나라[일본]의 변두리에 있는 예다촌(穢多村, 더러운 동네, 백정촌)과 비슷하다"라고 했다. 일본인의 눈에 한국인의 집은 협소하고 더러워 사람이 사는 집으로 여기기 어려웠다. 근대인의 눈에 한국은 미개와 야만의 상황이었다.

영선고개는 초량왜관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이 고개는 동래와 초량왜관의 물자가 오가며 대마도에서 일본사신인 차왜(差倭)가 오면 접위관(接慰官)들이 동래부사와 함께 사신을 접대하러 간 길이다. 길은 우마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구한말까지 영선고갯길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있었다. 설문 월담자와 밀무역자, 매매춘(교간)을 한 자를 사형시킨 사형집행터가 있어 무서움이 많은 사람은 대낮에도 혼자 다니지 못했다. 영선고개를 넘기위해서는 대낮에도 무리를 지어 다녔다.

영선산은 부산항과 초량을 잇는 길의 장애물이 되어 착평공사가 1909년 5월 1일 시작되었다. 1912년 영선산이 깡그리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작로가 닦인 뒤부터 사람들은 영선고개 오솔길을 마음 놓고 넘나들 수 있었다.

이국인과 사랑의 공간이었던 부산 해관장 관사

영선산 자락은 개항하면서 외국인들의 치외법권지역인 지계(地界)를 설정했다. 일본은 일치감치 용두산 중심으로 초량왜관 지역을 전관거류지로 했다. 11만 평에 년 50엔을 지불했다. 영선산 자락은 부산 바다를 바라보기에 전망이 좋은 지역이라 간해루(看海樓)라는 중층누각이 있어서 북항과 남항의 아름다움을 조명하기에 좋았다. 산자락에 영국 영사관이있었다.

이에 뒤질세라 러시아를 비롯한 각국들이 그들의 지계로 만들었다. 영선산 일대는 청관마을부터 영선산까지는 한국의 땅이이었지만 반식민지 지역이었다. 영선산에는 개항 관세를 징수했던 해관장의 관사가 있었다.

근대 문물에 눈이 어두웠던 조선은 부산항 개항과 더불어 1882년 중국인 이홍장의 알선으로 독일인 뭴렌도르프(목인덕, 穆麟德)의 자문으로 해관을 만들었다. 1883년 11월 부산해관이 설치되었고 3대 세관장으로 1885년 인천 부세관장으로 있었던 영국인 조나단 헌트(Jonathan H. Hunt, 재임기간 1888~1898)가 부임했다. 당시 해관은 수출입 관리, 관세 징수의 주 업무 외에 선박 입출항, 보세창고, 개항장 관리, 어장 인허가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해관장은 관세, 재정수입, 회계, 직원실태, 관내 동향, 밀무역, 외국 선박, 재산 등 상황을 총 세무사에 보고하였다.

영국인 헌트의 조선 이름은 하문덕(何文德)이다. 하문덕은 약 10년에 걸쳐 근무하였는데 부산항 개항 처음으로 물양장을 만들기 위해 부산해관 북안 일대의 매축 허가를 신청하면서 정부에 매축 공사비 1000량을 요구한 결과 공사비 전액을 받아 용미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하였다.
 
용미산 자락에 해관(세관)이 있었다.
▲ 용미산과 부산항 용미산 자락에 해관(세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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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정에서는 외국인이 남의 나라 땅을 형질을 변경하는 데 매우 부정적이었다. 헌트 해관장은 청나라 이홍장과 함께 고종을 설득하여 매립허가와 함께 공사비를 받아 해관부지를 조성하였다. 이 당시 산을 깎아서 바다를 매립한 해관공사(海關工事)가 오늘 날 부산항매립공사의 효시가 되었다. 헌트 해관장은 부산항 매립의 선구자였다.

아이들이 땀을 식히며 간해루에서 부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산항에서는 큰 배들이 정박하고 인부들이 화물을 싣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몇몇 어른들도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아이들은 들었다. 조선 남자와 서양 여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세관장 딸과 조선 사람이 사랑한 이야기 들어봤는가?"
"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는가?"
"허참! 부산 인근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네는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함 들어보세."


이야기는 이러했다. 부산 세관장 헌트는 부인과 외동딸을 데리고 부산에 왔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해관 관사에는 정원사 겸 서생(書生)이 필요했다. 때마침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이 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대석마을에 사는 권순도(1870~1934)였다.

그는 영어를 배워 보다 서구문물을 배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마 선교사로부터 배운 짧은 영어 실력을 앞세워 해관 관사에 취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권순도는 23세요, 리즈 헌터는 19세였다고 한다. 성실한 권순도는 신발을 몸에 품고 세관장에게 내놓기도 하였고 리즈 헌터에게는 말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등 가깝게 지냈다. 시간은 흘러 영어도 익숙해지면서 잘생기고 활달하고 지성적인 권순도는 리즈 헌터와 국경을 넘는 사랑을 하였다.
 
영선고개 자락에 있었던 해관 관사는 조선인과 이방인의 사랑공간이었다.
▲ 부산 해관 관사 영선고개 자락에 있었던 해관 관사는 조선인과 이방인의 사랑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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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내로부터 딸이 정원사에 의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화가 잔뜩 난 세관장은 권순도에게 권총을 겨누며 쏘아 죽이려고까지 했다. 위기를 느낀 권순도는 어둠을 틈타 이방인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리즈 헌터에게 남장을 한 다음 방갓을 쓰게 하고 양산 대석마을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했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서양여자를 권순도가 데려오니 대석 마을 사람들도 신기했었다. 하지만 해관장은 외교관의 특권을 내세워 동래감리서에 수색원을 내고 이들의 행방을 쫒아 권순도의 집까지 찾아왔다.

권순도의 집은 대석마을 아랫각단에 있는 '홍룡로 117(대석리 288)'이다. 권순도의 옛집은 310평이 넘으며 하천 가까이 있으며 맞은편 산을 소유하였다고 한다. 권순도는 동래감리서에서 잡으러 오니 툇마루로 도망을 갔다.

하지만 권순도는 동래감리서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세관장의 딸이 식음을 전폐하는 등 권순도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막지 못하였다. 해관장 헌트는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다 실패하자 1898년 2월에 임신한 딸을 데리고 부산항을 떠나 홍콩으로 가버렸다. 홍콩으로 간 딸 리즈 헌트는 결국 아들을 낳았으며, 권순도에 매번 아들의 소식과 생활비를 보내왔다. 권순도는 그 돈으로 중구 동광동 3가에 포목점인 권순도상회를 차려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그는 고향 대석마을 입구에 '세계인 환영' 비석을 세워 국제인의 면모를 과세했다.

권손도의 이야기는 사랑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세관장 관사는 사랑의 공간이었던지 1911년 또 다른 사랑을 잉태했다. 훗날 부산시장을 한 양성봉의 누이 양유식과 미국 의료선교사 어을빈(魚乙彬)이 그 주인공이었다. 양성봉은 부산진공립학교 2회 졸업생으로 김영주의 동기였으며 좌천동 아이였다.

권순도는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부(順富), 호는 죽우(竹友). 별좌(別坐)의 관직을 역임하였던 권경의(權敬義)의 후손이다. 음직(蔭職)으로 주사(主事) 승승훈랑(陞承訓郞)에 올라 문묘(文廟)의 직원(直員)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상적 스승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4~1907)이었다.

최익현은 나라가 망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유학의 의리론에 따라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입장에서 불의한 세력에 대한 무장투쟁 노선을 선택한 유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서구문물에 반대한 최익현의 입장보다 서구 열강 세력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도끼를 들고 상소(지부상소 持斧上疏)하며 개항을 반대하던 최익현과 달리 그는 스스로 서양 세력의 소굴에 들어가 그들을 알고자 했다. 그 결과 사랑을 얻기도 했다.

최익현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의 파기를 상소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䟽)' 즉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처단할 것을 주창하였다. 74세의 고령에도 최익현은 1906년 4월 전라북도 태안에서 '창의토적소(倡義討賊訴)'를 통해 백성들에게 궐기를 호소하고 직접 의병을 조직하였다.

전라북도에서 9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태인·정유·순창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패하여 체포되었다. 1906년 6월 26일에 일본의 군사령부 육군 이사(陸軍理事)가 최익현에게 3년 형(刑)을 선고하였다. 1906년 7월 8일 초량에 도착하니 경성초동(京城 草洞)의 홍범표(洪範杓)와 송경(松京)의 조치방(趙致邦)이 술과 실과를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었다.

그때 양산(梁山)의 권순도(權順度)는 선생님께 명함을 드려 작별을 하였다. 이때가 유배가는 최익현을 처음 권순도는 만났을 것이다. 그는 최익현의 문인이라기보다 그의 의리론적 사상을 흠모하는 측면이 강했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나중에 최익현 장례에 나서고 죽을 때까지 그를 숭모한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태그:#의열단원 박재혁, #초량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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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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