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거꾸로 가는 남자>

넷플릭스 <거꾸로 가는 남자> ⓒ Netflix


알렉상드라의 세상은 거울 속에 존재한다. 그 세계에서 다미앵은 혼자 '거꾸로' 간다.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벌목녀' 스타일을 자초하는 데다가, 알렉상드라의 여성성에 기대 보호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쉽지 않은 남자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섹시 아이콘이 되거나 혹은 성스러운 뮤즈가 될 뿐이다. 그 세계에는 모성 신화에 기인하는 여성에 대한 억압도, 절대적 타자로서의 여성도 없다. 그 세계에서 여성은 만물 창조의 근원이자 유일한 완전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점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의 생산력을 유지하는 부품에 불과하다. 

알렉상드라 앞에 놓인 거울을 치우면 곧 현실이 보인다. 이 세계는 '똑바로' 가는 여자들로 가득 차 있다. 생경한 곳에 떨어진 알렉상드라는 다미앵이 그랬던 것처럼 거꾸로 가는 길을 택할까, 혹은 이 세계 여자들처럼 바로 가는 길을 택할까.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는 '길을 개척하라'고 말한다. 

영화는 현실 세계를 철저히 미러링한다. 가정, 회사 그리고 일상에서의 남녀 재현 뿐만 아니라 포커 게임의 퀸과 킹에 해당하는 점수까지 전부 바뀌었다. 모든 것이 뒤바뀐 채 잘만 돌아가는 세상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허점을 속속들이 파고든다. 성별 반전이라는 단순한 기법이 누구도 함부로 의심하지 않았던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곧 몰려오는 무력감에 좌절한다. 그리곤 영화 속 알렉상드라처럼 혼란스러워한다. 똑바로 가야 하는가, 거꾸로 가야 하는가? 

알렉상드라는 다미앵과의 몸싸움 도중 머리를 부딪혀 쓰러지면서 남성 우월주의 세계, 즉 현실로 넘어오게 된다. 자신의 세계와 정반대의 모습을 한 다미앵의 세계와 갑작스레 대면한 알렉상드라의 앞으로 가부장제 타도와 성평등을 외치는 시위대가 지나간다. 그 건너편에는 제 세계로 무사히 돌아온 다미앵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서 있고, 카메라는 다시 알렉상드라를 클로즈업한다. 

이 결말은 알렉상드라에게 세상이 뒤집혔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관객을 현실로 복귀시키는 장치이다. 특히 시위대의 행렬을 긴 시간 보여주는 것은 여성이 핍박당하는 사회임을 나타내는 강렬하고 확실한 도구다. 그러나 화면 밖의 혼란스러운 관객, 즉 대중이 극 속 알렉상드라로 대응된다는 것에 주목한다면 결말이 가지는 보다 대안적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영화는 알렉상드라에 시위대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성녀-창녀 이분법을 거부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제시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답습한 성녀로서의 삶과 이를 벗어난 창녀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창녀로서의 삶은 근본적 차원의 저항이라기보다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헤픈 여성, 머리가 짧은 여성, 남성에 순종하지 않는 여성은 이단아로 낙인 찍혀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알렉상드라에게 세 가지 길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라는 다미앵의 세계에서 다미앵을 선택할 수도, 혹은 길거리에 보이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도 또는 그 자체로서 저항을 의미하는 시위행렬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미앵을 선택한다면 성녀가 될 것이고, 보이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면 창녀가 될 것이다. 만약 알렉상드라가 세 번째 길을 택한다면, 헤픈 여자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대신 사회적 연대를 통해 헤픈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의 구분을 해체시킬 수 있다.

영화는 이를 말하기 위해 다미앵으로 하여금 '나는 쉬운 남자가 아니'라고 어필하게 만들었다. 여성 우월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미앵이 알렉상드라에 대한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체제에 순응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헤픈 남자든 그렇지 않은 남자든 부조리 속에서는 알렉상드라라는 강자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시사한 것이다. 영화는 성녀로의 인정이 아닌, 삶에 대한 진정한 통제권 회복의 중요성을 제안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성별 이항대립을 소환, 전복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알렉상드라의 얼굴이 사라진 검은 모니터 화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거꾸로 가는 남자>는 관객에게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똑바로 가는 성녀로 살 것인지, 거꾸로 가는 창녀로 살 것인지 혹은 새로운 길 위의 인간으로 살 것인지를 말이다.
거꾸로 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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