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영화가 올림픽 종목이었다면 한국을 대표할 영화 종목의 국가대표는 단연 봉준호 감독이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통해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2020년 골든글러브 외국어 영화상, 그리고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휩쓸며 세계적인 명장으로 거듭난 감독이다. 심지어 <기생충>은 흥행에서도 세계적으로 2억 6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하지만 시계를 10년만 되돌려도 한국영화의 대표 선수는 봉준호 감독이 아닌 이 인물이 됐을 확률이 높다. 2004년 <올드보이>를 통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2009년에도 <박쥐>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박찬욱 감독은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를 연출한 흥행 감독은 아니지만 <올드보이> 이후 대부분의 영화가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을 만큼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감독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거장이 된 박찬욱 감독 역시 한때는 관객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첫 흥행작이었던 <공동경비구역JSA>의 성공이 우연이라고 비웃음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복수 3부작'의 시작을 알렸던 <복수는 나의 것>이다. 개봉 당시 지나치게 잔인한 묘사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던 <복수는 나의 것>은 시간이 지나 '박찬욱 복수 3부작의 숨은 명작'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 감독이 유명해진 후 개봉 7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 감독이 유명해진 후 개봉 7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 CJ ENM

 
박찬욱표 '복수3부작'의 시작을 알리다

서강대 철학과 출신으로 대학시절부터 유명한 영화광이었던 박찬욱 감독은 <깜동> <제5의 사나이>에서 연출부로 경험을 쌓다가 1992년 이승철이 주연한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연출하며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 스스로도 발매된 비디오를 모두 모아 소각하고 싶다고 밝힌 것처럼 그의 데뷔작은 '서울관객 99명'이라는 민망한 성적을 남기며 흥행 참패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1996년 이경영과 김민종이 출연한 <3인조>마저 관객들의 외면을 받은 박찬욱 감독은 2000년 처음으로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을 연출했다. 바로 한국영화의 흥행 역사를 새로 썼던 <공동경비구역 JSA>였다(서울관객251만). <공동경비구역JSA>로 청룡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의 감독상을 휩쓴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JSA>의 북한군 콤비였던 송강호와 신하균을 캐스팅해 2002년 신작 <복수는 나의 것>을 선보였다.

전작 <공동경비구역JSA>의 대성공으로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하지만 여과 없는 잔혹함은 관객들에게 거부감으로 다가왔고 서울관객 16만이라는 실망스런 성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실패작으로 남을 뻔했던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국내외 영화마니아들에게 재조명됐고 꾸준한 DVD 판매량을 기록하다가 2009년 개봉 7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박찬욱 감독은 2004년 <올드보이>를 통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세계가 인정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고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영화들을 차례로 연출했다. 그리고 2009년 송강호, 김옥빈, 신하균 등이 출연한 <박쥐>를 통해 생애 두 번째 칸 영화제 트로피(심사위원상)를 차지했다. <박쥐> 역시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가 속에서도 전국 22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칸 영화제 2회 수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박찬욱 감독은 2012년 할리우드로 건너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스토커>를 연출했다. <스토커>는 영국의 영화잡지 엠파이어에서 선정한 2013년 최고의 영화 6위에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2016년 김태리라는 걸출한 배우를 발굴한 <아가씨>로 2018년 영국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은 최근 탕웨이, 박해일, 이정현 등과 함께 신작 <헤어질 결심> 촬영을 마쳤다.

수위를 견뎌내면 걸작을 만날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은 개봉 당시 송강호와 신하균이 혈투를 벌이는 액션영화로 오해한 사람이 많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개봉 당시 송강호와 신하균이 혈투를 벌이는 액션영화로 오해한 사람이 많았다. ⓒ CJ ENM

 
<복수는 나의 것>은 수위가 매우 높다. 호러나 슬래셔 무비가 아님에도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여과 없이 등장한다. 특히 데이트 무비로는 절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영화다. 영화를 보다 뛰쳐 나와서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는 관객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화면을 찢고 나와 관객을 공격하는 일은 절대 없다. 영화의 수위만 견딜 수 있다면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속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을 만날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사건의 발단은 유괴에서 시작된다. 류(신하균 분)와 영미(배두나 분)는 누나(임지은 분)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자로 오해한 동진(송강호 분)의 외동딸 유선(한보배 분)을 유괴한다. 현실에서 유괴는 당연히 용서받기 힘든 중범죄지만 영미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유괴를 정당화한다. 특히 자본의 이동과 화폐 가치의 극대화를 운운하며 '유괴의 순기능'을 설명하는 배두나의 뻔뻔스런 연기가 돋보인다.

하지만 류가 유선이를 유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누나는 자괴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유선이마저 물에 빠져 숨지는 사고를 당한다. 큰 충격을 받은 동진은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폐인처럼 지내는데 어느 날 유선이가 꿈에 나타난다. 그리고 동진의 품에 안겨 "아빠, 나 수영 좀 일찍 배울 걸 그랬나 봐"라며 자책한다. 남을 원망하고 복수심에 불탄 캐릭터들만 잔뜩 나오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정작 피해자인 유선이는 홀로 유일한 '절대선'이었던 것이다.

류의 행방을 쫓던 동진은 류의 애인이자 공범인 영미를 찾아간다. 여기서 동진이 전기를 연결하기 위해 영미의 귀를 핥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잘못 오해하면 다소 보기 불편하지만 사실 전기 기술자 동진은 영미를 고문하기 위한 '작업'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전기고문을 당해 경련이 일어나는 영미의 발이 일정하게 떨리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불 뒤로 안마기를 설치해 촬영했다.

동진은 유괴 후 유선이가 학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것이 딸을 잃은 동진의 분노를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동진은 유선이 빠진 개울에서 류의 아킬레스건을 끊으며 냉정하게 복수를 끝낸다. 하지만 곧 영미가 속했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이 찾아와 동진을 살해한다. 동진은 영문도 모른 채 칼에 찔리며 류와 영미, 그리고 유선이처럼 목숨을 잃는다(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판결문을 읽으려는 송강호의 애처로운 눈빛 연기가 압권이다).

박찬욱 감독이 특별히 아끼던 류씨 형제
 
 영미(배두나 분,오른쪽)의 '착한 유괴 이론'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 분)이 금자씨(이영애 분)를 설득할 때 한 번 더 등장한다.

영미(배두나 분,오른쪽)의 '착한 유괴 이론'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 분)이 금자씨(이영애 분)를 설득할 때 한 번 더 등장한다. ⓒ CJ ENM

 
<복수는 나의 것>에는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로 이어지는 주연 3인방 외에도 박찬욱 감독과 인연이 깊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최반장 역의 이대연은 <올드보이>의 노숙자, <친절한 금자씨>의 교도관(통편집)으로 출연했고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멤버 중엔 <올드보이>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오광록과 <친절한 금자씨>에서 원모아빠로 출연했던 김익태가 있다. 지형사역의 지대한도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의 절친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을 찍을 당시 박찬욱 감독이 특별히 아끼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한국 영화계 최고의 기대주로 꼽히던 류승완-류승범 형제였다. 류승완과 류승범은 각각 중국집 배달원과 뇌성마비 청년역으로 특별 출연해 짧지만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물에 빠진 유선이의 목걸이를 빼앗는 비정한 캐릭터를 연기한 류승범은 류의 차 번호를 기억했다가 동진에게 알려주며 이야기 진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미 자신이 연출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배우로 출연한 바 있는 류승완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다음부터요, 한 그릇 씩은 시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뜬금 없는 명대사(?)를 날린다. 본편에서는 편집됐지만 고문 당하고 있는 영미를 발견했다가 동진에게 살해당한다. 류승완 감독은 촬영장에 놀러 갔다가 즉흥적으로 영미와 류의 액션장면(?)을 연출한 후 박찬욱 감독에게 무술감독으로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류씨 형제 사랑(?)은 인물의 이름에도 숨어있다. 신하균이 연기한 '류'는 영화 내내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다만 퇴사하면서 해고 동의서에 지장을 찍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스치듯 보이는 이름이 바로 '류완범'이다. 류승완의 '완'과 류승범의 '범'을 합쳐 신하균의 캐릭터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2004년 <쓰리, 몬스터>에서도 류승완과 김지운, 봉준호의 이름을 합쳐 천재감독 류지호(이병헌 분)를 만든 바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감독 송강호 신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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