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조 밴드 국카스텐의 리더이자 보컬 하현우는 엄청난 발성과 폭넓은 음역대를 자랑하는 국내 최정상급 보컬리스트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유명한 보컬이었던 하현우가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단연 '우리동네 음악대장'이라는 이름으로 일요일 저녁마다 시청자들을 전율시켰던 <복면가왕>이었다. <복면가왕>이 아니었다면 하현우는 지금도 '아는 사람만 아는 보컬'로 남았을지 모른다.

현재 유튜브 120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임영웅은 전 세대에 걸쳐 사랑 받고 있는 최고의 '트로트 아이돌'이다. 임영웅은 아이돌 그룹이 판을 치는 현재 가요계에서 음원차트와 음악방송 1위를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남성 솔로가수이기도 하다. 임영웅 역시 작년 <내일은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진으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지역행사를 전전하는 무명가수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하현우라는 보컬리스트를 세상에 알린 <복면가왕>과 임영웅이라는 대형신인을 배출한 <내일은 미스터 트롯>은 대한민국 방송가에 일약 파란을 일으켰던 프로그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미 14년 전 대한민국 방송가의 복면가수와 트로트 열풍을 정확히 예측했던 인물이 있었다. 2007년 차태현 주연의 복면 트로트 영화 <복면달호>를 제작하며 엄청난 선견지명을 과시한 '예능 대부' 이경규가 그 주인공이다.
 
 <복면달호>는 개그맨 이경규가 설립한 영화사 인앤인 픽처스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다.

<복면달호>는 개그맨 이경규가 설립한 영화사 인앤인 픽처스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다. ⓒ 스튜디오2.0

 
15년 와신상담 끝에 <복수혈전> 수모 씻었다

학창 시절부터 이소룡을 동경하며 액션스타의 꿈을 꾸던 이경규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며 꿈에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액션배우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판단한 이경규는 1981년 MBC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80년대 활동 내용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이경규의 무명 시절이 대단히 길었던 것처럼 알려졌지만 사실 이경규는 80년대부터 다양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착실히 얼굴을 알렸다.

그렇게 10년 동안 꾸준히 활동하던 이경규는 1991년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몰래카메라'를 진행하면서 일약 '대세 개그맨'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몰래카메라'를 통해 부와 명예를 얻은 이경규는 1992년 전재산을 털어 영화 <복수혈전>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스타 이경규가 직접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맡은 액션영화 <복수혈전>은 서울관객 2만에 그치며 대중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복수혈전>의 아픔 후 다시 예능에 전념한 이경규는 <이경규가 간다- 양심냉장고>, <전파견문록>,<대단한 도전>,<느낌표> 등을 히트시키며 건재를 과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는 영화에 대한 꿈이 살아 숨쉬고 있었고 이경규는 2007년 무명 로커가 복면을 쓰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하는 이야기를 그린 <복면달호>를 선보였다(연출과 연기에 한계를 느낀 이경규는 <복면달호>에서 제작에만 참여했다).

신선한 이야기와 함께 주인공 차태현의 능청스런 연기가 돋보였던 <복면달호>는 전국 160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는 작은 이변을 일으켰다. <복면달호> 덕분에 이경규는 15년 만에 <복수혈전>의 아픔을 씻을 수 있었다. 이경규는 2013년 김인권, 류현경, 유연석(<슬의생>의 안정원 선생) 등이 출연한 <전국노래자랑>을 제작했지만 마블의 <아이언맨3>와 맞붙는 바람에 전국 98만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을 넘는데 실패했다.

이경규는 지난 2016년 <마이리틀텔레비전>에 출연해 동물이 주인공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며 그 중 <개는 훌륭하다>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소개한 바 있다. 당시엔 모두가 웃으며 넘겼지만 <개는 훌륭하다>는 작년 7월부터 KBS의 예능프로그램으로 탄생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면 새 영화를 선보이고 싶다던 이경규는 "코미디는 내 직업이고 영화는 내 꿈"이라고 말하는 영원한 '시네마 키드'다.

복면가수와 트로트 열풍, 그는 알고 있었을까
 
 이경규는 <복수혈전>의 리스크를 끌어 안고 <복면달호> 출연을 결정한 배우 차태현을 '영화적 은인'으로 여긴다.

이경규는 <복수혈전>의 리스크를 끌어 안고 <복면달호> 출연을 결정한 배우 차태현을 '영화적 은인'으로 여긴다. ⓒ 스튜디오2.0

 
<복면달호>는 최근 '시대를 앞서간 영화'로 재평가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장년층이나 듣는 한 물 간 장르로 평가 받던 트로트의 시대가 다시 오고 복면을 쓴 가수가 무대에서 오직 노래만으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은 누구도 쉽게 예측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경규는 '예능계의 대부'로 불리며 유재석,강호동 같은 최고의 예능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답게 대한민국 방송가의 복면가수 및 트로트 열풍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복면달호>는 무명 록밴드 보컬 봉달호(차태현 분)가 트로트를 사랑하는 장사장(임채무 분)을 만나 트로트 가수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시나리오를 읽고 <복면달호> 출연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던 차태현은 제작자가 이경규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뇌에 빠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복수혈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경규는 자신은 제작만 한다며 차태현을 설득했고 결국 2집 가수 출신의 검증된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성공했다.

봉필이라는 활동명으로 지상파 무대에 데뷔하게 된 달호는 복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 '신비주의'라고 둘러대며 데뷔곡 <이차선 다리>를 불렀다. 장사장은 무대를 망쳤다며 달호를 쫓아내지만 의도치 않았던 신비주의 컨셉은 대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달호는 순식간에 복면 쓴 '트로트 황태자'로 떠올랐다. 트로트가수가 아이돌 같은 인기를 얻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오늘날 임영웅을 떠올리면 사실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갑자기 찾아온 인기에 취해 데뷔 전 함께 고생했던 여자친구 서연(이소연 분)마저 떠나 보낸 봉필은 연말 가요제격인 <가요열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1절을 부른 후 갑자기 복면을 벗어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서연을 향한 달호의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고백은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봉필은 3년 연속 대상을 노리던 관록의 나태송(이병준 분)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하며 인기와 사랑을 동시에 잡는데 성공했다.

8,90년대에는 정수라의 <난 너에게>나 김수철의 <고래사냥>처럼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은 영화의 OST로 직접 활동을 하는 가수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차태현은 <이차선 다리>라는 명곡을 부르고도 차기작 <꽃 찾으러 왔단다>와 <바보> 촬영 때문에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대신 지난 2016년2월 <슈가맨>에 출연하면서 복면을 쓰고 <이차선 다리>를 불러 관객들을 열광시켰다(물론 당시 차태현의 슈가송은 <I Love You>였다).

엔딩 크레딧에서 마지막 웃음 선사한 이경규
 
 <복면달호>는 TV탤런트로만 활동하던 임채무(왼쪽)의 첫 번째 영화였다.

<복면달호>는 TV탤런트로만 활동하던 임채무(왼쪽)의 첫 번째 영화였다. ⓒ 스튜디오2.0

 
이경규는 예능계에선 김용만, 강호동, 정형돈 같은 쟁쟁한 예능인들을 라인으로 두고 있지만 사실 영화계에선 일개 신생 제작사의 대표에 불과했다. 간신히 차태현이라는 검증된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지만 나머지 캐릭터들까지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유명 배우들로 채우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복면달호>는 다소 아쉬운 캐스팅 덕분에 더욱 인간적인(?) 영화로 탄생했다.

온 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과거가 의심스러운 장사장 역은 중견배우 임채무가 연기했다. 80년대 이덕화, 노주현, 이영하 등과 함께 시대를 풍미한 인기배우로 군림한 임채무는 90년대 들어 활동이 뜸해졌다. 이는 1990년 경기도 양주시에 놀이공원 두리랜드를 개장하기 위함이었다. 한 동안 놀이공원 사업과 연기를 병행하던 임채무는 2007년 <복면달호>에서 장사장을 연기했는데 이는 임채무의 스크린 데뷔작이었다(애니메이션 더빙 제외). 

2002년 <하얀 방>을 통해 데뷔한 이소연은 2003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5년 드라마 <신입사원>,<결혼합시다>,2006년 <봄의 왈츠>로 얼굴을 알렸다. <복면달호>에서는 달호가 첫 눈에 반하는 '큰 소리 기획'의 홍일점 연습생 차서연을 연기했다. 야외에서 노래만 부르면 비가 온다는 재미 있는 설정을 가진 서연 역을 잘 소화한 이소연은 <천사의 유혹>,<동이>,<루비반지> 등에서 뛰어난 악역연기를 선보였다.

제작자이자 15년 전 <복수혈전>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경규는 <복면달호>에서 마지막 장면인 봉필의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3년 연속 <가요열전> 대상을 놓친 나태송이 신곡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치며 나태송을 지도하는 작곡가가 바로 이경규였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던 관객들이 마지막으로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복면달호 이경규 차태현 임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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