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영화 강국 미국은 사실상 제작비의 상한선이 없다. 흥행에만 성공하면 엄청난 시장 규모를 자랑하는 북미, 그리고 그보다 더 넓은 세계 시장에서 얼마든지 제작비의 몇 배가 넘는 수익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아이언맨과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지구 평화를 지키는 영웅들이 활약하는 히어로물에서 절대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관객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은 홍콩 영화의 전성기 시절부터 무협 영화에 특히 강세를 보였다. '수호전'과 '서유기'를 중심으로 많은 무협소설이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발전을 거듭했고 그 중 <녹정기>,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절대쌍교> 등은 영화로 제작돼 아시아 전역에서 사랑 받았다. '드림웍스'의 유명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시리즈도 넓은 의미에서는 무협물로 분류할 수 있다(물론 세계적인 히트작이 된 지금 <쿵푸팬더>의 무협논란은 큰 의미가 없다).

한국에서는 주로 만화를 중심으로 무협물이 번창해 왔다. 500만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열혈강호>를 비롯해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PC게임으로도 제작됐던 <협객 붉은 매>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2001년 한국에서도 현대를 배경으로 한 무협 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고 직감한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는 60억 원이 넘는 거액을 투자해 한국형 학원 무협 액션 영화 <화산고>를 제작하는 모험을 단행했다.
 
 <화산고>는 서울에서만 6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한국형 무협영화의 가능성을 보였다.

<화산고>는 서울에서만 6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한국형 무협영화의 가능성을 보였다. ⓒ 시네마 서비스

 
무림의 은둔강자로 변신한 '리틀 정우성'

데뷔 당시 정우성과 닮은 외모로 주목 받았던 장혁은 1999년 드라마 <학교1>에서 반항적인 아웃사이더 강우혁 역으로 시선을 끌었다. 같은 해 연말 차태현, 김현주, 김하늘과 함께 드라마 <햇빛 속으로>에 출연한 장혁은 2001년 소속사 싸이더스에서 제작한 영화 <화산고>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아무리 장혁이 방송가와 영화계가 주목하는 유망주였다고는 하지만 한 영화를 이끌어가는 단독주연을 연기하기엔 이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싸이더스에서는 장혁이 <화산고>를 통해 <비트> 시절의 정우성처럼 '대세 스타'로 성장해주길 기대했다. <화산고>는 다소 유치하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서울에서만 58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물론 60억 원이 넘는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영화로는 다소 아쉬운 스코어였지만 장혁과 신민아, 김수로, 공효진 등 신예들을 주연으로 내세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선전한 결과였다.

장혁은 <화산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장혁은 2002년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장나라의 상대역으로 시청자들에게 확실히 이름을 알렸고 같은 해 김종학-송지나 콤비의 대작 <대망>에도 출연했다. 2003년에는 이나영과 함께 <영어완전정복>에서 코믹 연기로 새로운 매력을 뽐냈고 2004년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는 전지현의 남자친구로 출연했다. 

하지만 장혁은 2004년 연예계를 강타한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됐고 재검을 받은 후 같은 해 11월 현역으로 군에 입대했다. 전역한 후 출연한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다시 출중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0년 드라마 <추노>에서 이대길 역을 통해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2011년 <뿌리깊은 나무>에 출연해 한석규, 신세경 등과 연기호흡을 맞춘 장혁은 <감기>, <가시>, <순수의 시대> 같은 영화뿐 아니라 <운명처럼 널 사랑해>, <장사의 신-객주> 같은 드라마에서도 안정된 연기력을 과시했다. 2013년에는 예능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예능감을 뽐내기도 했다. 2019년 드라마 <나의 나라>에서 이방원을 재해석한 장혁은 올해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죽어도 되는 아이>에서 은퇴한 킬러를 연기한다.

무협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찾을 필요는 없다
 
 장혁은 <화산고>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고 2010년 <추노>로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장혁은 <화산고>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고 2010년 <추노>로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 시네마 서비스

 
<화산고>는 유치하고 비현실적이다. '때는 화산108년'이라고 정해 버렸기 때문에 배경도 모호하다. 등장인물들이 한국어를 쓰지만 공간적 배경을 한국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객이라면 <화산고>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애초에 <화산고>는 관객들에게 리얼리티를 강조할 마음이 없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어항에 빠졌다가 번개에 맞아 힘이 세진 경수(장혁 분)는 본의 아니게 다니는 학교에서마다 물의를 일으켜 퇴학을 당했고 무림학교인 화산고로 전학을 왔다. 화산고는 '사비망록'이라는 무림비서가 보관된 학교로 화산의 일인자만이 사비망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화산의 일인자 송학림(권상우 분)이 사비망록을 전수 받았지만 괴력을 자랑하는 역도부 주장 장량(김수로 분)이 호시탐탐 사비망록을 노린다.

하지만 학교를 손에 넣으려는 교감(변희봉 분)은 술수를 부려 교장(윤문식 분)을 '주화입마(체내의 기운이 엉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하고 학교에 '학원 5인방'을 새 선생님으로 데려 온다. 이에 학교는 공포 분위기에 빠지고 장량과 검도부 주장 유채이(신민아 분), 그리고 송학림에게 조언을 듣고 무공을 수련한 경수는 교장 선생님을 구하고 위기에 빠진 학교를 지키기 위해 학원 5인방과의 전면전을 선언한다.

<화산고>의 주인공은 번개 두 번 맞고 각성한 경수지만 영화 내에서 가장 큰 활약을 선보이는 인물은 단연 장량이다. 본명(장달춘)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를 가진 장량은 사비망록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며 교감과 결탁해 학교를 장악한다. 하지만 뒤늦게 등장한 학원 5인방에 의해 토사구팽을 당하는데 조금 늦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경수를 도와 학교를 지키는데 힘을 보탠다(마치 <드래곤볼>의 사이어인처럼 죽었다 살아나니까 갑자기 강해진다).

<화산고>는 제작자인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가 특별히 아끼던 아이템이다. 화산의 세계관이 정착되고 그것이 관객들의 동의(흥행)를 얻는다면 충분히 시리즈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 년전까지 모 감독이 <화산고2>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실제 제작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뛰어난 무공으로 화산을 장악한 학원 5인방
 
 허준호를 중심으로 한 <화산고>의 '학원 5인방'은 학생들을 향한 구타와 폭력을 일삼으며 학교를 장악했다.

허준호를 중심으로 한 <화산고>의 '학원 5인방'은 학생들을 향한 구타와 폭력을 일삼으며 학교를 장악했다. ⓒ 시네마 서비스

 
영화 <화산고>는 사비망록을 얻기 위한 '화산의 1인자 배틀'이 핵심 스토리다. 사비망록에 가장 큰 집착을 보이는 장량은 송학림에게 누명을 씌운 후 유도부, 태권도부, 하키부, 럭비부 등을 차례로 제압한다(그리고 검도부에서는 유채이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교감 선생이 스카우트한 학원 5인방이 등장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장량의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학생들로서는 늑대의 횡포도 괴로운데 호랑이 5마리가 등장한 셈이다.

엄청난 무공을 가진 수학 선생 마방진은 힘, 기술, 스피드, 심지어 주량까지도 장량을 압도한다. 경수와는 다른 학교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사이로 나온다. 마방진 선생 역은 드라마 <엄마의 바다>, <마지막 승부>, <왕초>, <올인>, <주몽>, 영화 <해적>, <실미도>, <신기전>, <이끼> 등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던 허준호가 열연했다. <이끼> 이후 한 동안 활동이 뜸했던 허준호는 최근 다시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학원 5인방 중 음악담당은 수업 시간에 기침하는 학생에게 '연초단폐장(기도를 막아 호흡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파무공)'을 써 피를 토하게 만든다. 그밖에 국어선생 역은 현재 <홍천기>에 출연하고 있는 조성하가 맡았고 영어선생은 장량 역을 맡은 김수로의 친동생 김상미가 연기했다.

학생 역할의 배우 중에는 골뱅이를 연기한 배우가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했다. 비록 무공은 거의 없지만 장량의 참모 역할로 초반 많은 웃음 포인트를 책임졌고 기지를 발휘해 경수와 유채이를 밀폐된 공간에 넣어 주기도 했다. 골뱅이는 14년 후 SNL 코리아의 양코치앤 칭따오로 유명해지는 배우 정상훈이 연기했다. 30대 후반의 다소 늦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은 정상훈은 현재 <SNL코리아 리부트>에 출연하고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화산고 장혁 신민아 김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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