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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잦았던 가을비에 조금씩 색이 바래져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어느 해보다 가을앓이 중인 사람들이 많은듯하다. 누구나 한 번쯤 시인이 되어보기도 하는 요즘, 인천시 부평구 백운공원(부평구 십정동 186-419)에는 한센병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 시비가 있다.
 유난히 잦았던 가을비에 조금씩 색이 바래져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어느 해보다 가을앓이 중인 사람들이 많은듯하다. 누구나 한 번쯤 시인이 되어보기도 하는 요즘, 인천시 부평구 백운공원(부평구 십정동 186-419)에는 한센병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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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아트센터 옆에 위치한 백운공원에는 한하운(韓何雲, 본명 한태영 韓泰永, 1919~1975) 시인의 시비가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광복 직후인 1949년 월간 종합잡지 <신천지>를 통해 발표한 '전라도(全羅道) 길' 전문이다. 삼복더위에 전라남도 소록도까지 천 리 길을 가야 하는 그에게는 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차장(車掌)이 그를 발길로 걷어차며 기차에서 내쫓은 것이다. 한때 문둥이로 불리던 나환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발가락이 다 잘려 나가고, 혹독한 더위 속에 쓰러져 죽더라도 천 리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전라도 길'이다. 고은 시인은 한하운의 시를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 고은은 한하운처럼 나환자가 됐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어린 나이에 한센병으로 불운의 삶을 살았던 한하운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집에 돌아와 있어도,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골방과 다락에 숨어 지내는 신세였다. 견디기 힘든 고통과 숨이 막힐 듯한 절망의 시간, 이 시기에 그는 이름을 하운으로 바꾼다. 하운(何雲), 여기엔 '자유롭게 떠다니는 어떤 구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부평 백운공원 한하운 시비에는 그의 작품 '파랑새'를 모티브로 한 작은 새 조형물이 서 있다.
 부평 백운공원 한하운 시비에는 그의 작품 "파랑새"를 모티브로 한 작은 새 조형물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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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하운은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 '파랑새'를 쓴다. 시에서 그는 푸른 하늘과 푸른 들을 훨훨 날아다니며 마음껏 노래하며 우짖고 싶다고 한다. 시를 쓰면서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눈여겨볼 것은 한하운이 <파랑새>를 한글로 썼다는 점이다. 이 시를 쓴 것이 1944년의 일이니, 일제가 우리말 우리글을 극성스럽게 단속하던 시기지만 막막하고 절절한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려면 정갈한 우리글로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가 개인의 푸념이나 탄식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독자의 가슴에 물결이 일게 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다. 시비에 적힌 '보리피리'는 두 번째 시집으로 1955년 <인간사>에서 간행됐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늴니리."
 
'파랑새' '전라도 길'과 함께 교과서에도 실려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 시비의 오른쪽 상단에 살포시 내려앉은 파랑새가 그의 바람을 담아 고향의 푸른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1950년, 한하운은 약 600명의 나환자와 함께 부평공동묘지 인근 골짜기(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만월산)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자치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이곳을 '성계원'(성혜원·成蹊園)이라고 명명한다. 나환자요양소라고 했지만, 강제수용소나 다름없었다.
 
한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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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 시인
 한하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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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40세인 1959년 음성으로 판명돼 성혜원을 떠나 사회에 복귀해 부평구 십정동 자택과 자신이 서울 명동에 설립한 출판사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또한, 한센병 환우들을 잊지 않고 부평에 거주하며 생의 마지막 날까지 나병 퇴치와 한센인의 권익과 복지를 위한 사회활동을 계속했다.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노랫말의 원작자
 
우리 시대의 노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노랫말 원작자인 박영근 시인의 '솔아 푸른 솔아-백제6' 시비는 부평 신트리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시는 노래로 제작돼 1980년대 후반 대학가 집회나 거리시위 등에서 자주 불리면서 확산됐다.
 우리 시대의 노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노랫말 원작자인 박영근 시인의 "솔아 푸른 솔아-백제6" 시비는 부평 신트리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시는 노래로 제작돼 1980년대 후반 대학가 집회나 거리시위 등에서 자주 불리면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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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청 옆 북구도서관 뒤편에 위치한 신트리공원에는 우리나라 첫 노동자 시인 박영근(朴永根, 1958~2006)의 시비가 있다.
"부르네 물억새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맛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 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 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허기 들면 솔잎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우리 시대의 노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노랫말 원작자인 박영근 시인의 '솔아 푸른 솔아-백제6' 전문이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해 대학가 집회나 거리 시위 등에서 주로 불리던 이 노래는 절절한 호소력을 바탕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박영근 시인의 시로 만들어진 노래임에도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밝혀져 오지 않았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솔아 푸른 솔아-백제6'을 근간으로 하여 그의 시 여러 편에서 구절을 취한 것이고, 여기에 덧붙어 있는 구절들 역시 박영근 시의 지향과 정서를 재료로 구성된 것이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절창인 후렴구를 비롯한 핵심 대목을 '솔아 푸른 솔아-백제6'에서 가져왔을 뿐더러, 시퍼렇게 쑥물이 든다는 비유법과 불어오는 바람, 갈라진 세상, 어머니의 눈물과 울음 등의 시상은 '취업 공고판 앞에서' '고향의 말4' '들잠-백제3' '서울 가는 길' 등 그의 작품 곳곳에서 또렷하게 발견된다.

1970년대 말 고교 1년을 중퇴하고 무작정 상경, 서울 양천구 신정동 뚝방촌에 자리 잡은 시인은 당시 현장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던 '동일방직'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처음으로 노동현실과 시에 눈을 떴다. 월간 '대화'에 연재되던 석정남의 일기와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등이 스승이 돼 주었다. 첫 시집에 실린 '새벽길'은 1977년에 씌어졌고, '수유리에서'도 군 입대 전에 쓴 것이다.

박 시인이 부평에 자리 잡은 것은 생계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터'인 공장을 따라 부평공단으로 옮겨온 것이다. 번듯한 책상 하나 갖추지 못한 시인의 방은 각종 문예지와 시집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먹고 살고자 하는 노동이라 고달팠지만 귀중한 체험이었으며 박 시인이 남들보다 오랫동안 노동시를 쓸 수 있는 근원도 현장에 있었다.

2004년 박영근 시인을 심층 인터뷰한 <세계일보> 문화부 조정진 기자(현, 스카이데일리 논설주간)는 이렇게 전한다.

"아마 제가 박영근 시인과 마지막이자 깊이 있게 인터뷰한 유일한 기자일 겁니다. 10시간 이상 대화를 했으니 시인의 속마음을 모조리 우려냈지요. 박 시인은 문학과 예술의 힘을 신뢰한다며 시적 통찰력이 담긴 예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각에서 박 시인을 노동시인으로 규정짓는데, 한정적인 평가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은 박 시인은 '시인은 정신의 힘으로 설득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하며, 어디에 존재하든 진실을 노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외롭다며 기자의 손을 놓지 않으려던 시인의 손바닥 온기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박 시인의 아내였던 성효숙 작가와 시비 앞에서 만났다. 현재 '울산노동미술제' 준비와 환경생태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새만금문화예술제' 준비에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성 작가는 미술치유 수업을 하며,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가다.
 
박영근 시인의 시비는 시민 220명의 후원으로 2012년에 세워졌다. 박 시인의 육필을 집자하는 방식으로 정성을 많이 들인 작품이다. 박 시인의 부인이던 성효숙 작가가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시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영근 시인의 시비는 시민 220명의 후원으로 2012년에 세워졌다. 박 시인의 육필을 집자하는 방식으로 정성을 많이 들인 작품이다. 박 시인의 부인이던 성효숙 작가가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시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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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시인의 시비에는 박영근을 기억하고자 시인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박영근 시인의 시비에는 박영근을 기억하고자 시인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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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건립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시민 220명의 후원으로 2012년에 시비가 세워졌어요.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시비는 박 시인의 육필을 집자하는 방식으로 정성을 많이 들인 작품이에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노래가 안치환 작사 작곡으로 잘못 알려져 있어서 원작자 찾아주기, 바로잡기에도 공을 들였죠."

"박 시인과 함께 자주 산책하던 길이 신트리공원이에요. 부평의 몇몇 장소 중 시인이 좋아해서 자주 걸었던 공원을 시비 건립 장소로 택했죠. 불꽃같이 살다간 사람이죠. 남아 있었으면 더 좋은 시를 많이 썼을 거예요. 많은 분들이 아까워하고 있죠. 부평에서 오래 살아서, 함께했던 곳곳을 지날 때면 박 시인이 많이 생각나요.

15주기가 지났지만 바로 어제일 같아요. 2014년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가 발족돼 여러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몰랐어요. 박 시인의 시에 대한 공감과 울림의 힘으로 이어져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영근 시비 뒷면에는 그를 기리는 문구가 있다. 박일환 시인이 쓴 명문이다. 김이구 초대 박영근기념사업회장에 이어 현재 서홍관 시인이 그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건립위원장을 맡았던 정세훈 시인과 오랫동안 사무국장으로 애써준 박일환 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박 시인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부평솔아솔아음악제'가 2016~2019년까지 성황리에 개최되었으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중단된 점을 아쉬워하며, 신동엽문학상과 백석문학상을 받았으며 노동의 주제뿐 아니라 존재를 노래한 시인의 뜻을 기리는 문학관이 만들어지길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도서관에 전시된 박영근 시인의 출판물들
 도서관에 전시된 박영근 시인의 출판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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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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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학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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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1990년대 노동자이자 시인으로 노동시의 영역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에 의한 물질만능주의와 이에 파생되는 소외현상에 대한 개인의 존재론적인 고민으로 시 세계를 넓혀갔다고 박 시인을 회상하는 박일환 시인은 박 시인에 대한 인연도 각별하다. 박일환 시인이 등단할 때 추천사를 써줬다고 한다. 박 시인은 다른 시인들의 시도 많이 읽고 시 평가도 뛰어났다고 덧붙였다.

*박영근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 역임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부 창립과 인천민예총 창립에 기여하였고 부위원장,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글· 사진 이정미 i-View 객원기자, rjsdnaka10@naver.com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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