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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에도 수줍은 어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별로 말도 없었다. 술이 들어가면 어쩌다 간신히 고향 얘기를 조금씩 할 뿐, 그것도 어떻게 살았고 고향은 어떻고 그런 흔한 얘기가 아니라 반딧불이 쫓던 얘기다. 옆에서 물어보면 별이 쏟아지는 밤에 대한 이야기 정도 나온다. 누군가 밤에만 살았냐고 핀잔을 주면 그제서야 익숙한 지명들이 나온다. 내장산과 선운산 사이에서 뛰어 놀았노라고. 그러고는 다시 수줍다.

그런 그를 산행 모임의 회장으로 앉혔다. '당신의 변신은 무죄'인가? 늘 조용하던 그가 '돌격, 앞으로!' 자세로 가파른 산을 평지 걷듯, 믿음직한 리더십과, 회원 한 명 한 명을 다 배려하는 파트너십, 프렌드십까지 보여준다. 그는, 내장산과 선운산 사이에서 뛰어 놀았음이 분명했다. 그런 그의 고향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생애 처음. 지난 10월 23일 토요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고인돌 유적지에서 시작하여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창 고인돌 유적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창 고인돌 유적지
ⓒ 장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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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유적, 고창 고인돌 유적지

고창은 햇빛이 강렬하여 나무 그늘을 찾게 만들었고 펼쳐진 고인돌 기슭에서 부는 바람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마디로 여행하기에는 참 좋은 쾌청한 날씨. 전 세계 고인돌의 70%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유네스코까지 나서서 그 가치를 인정한 드넓은 청동기 무덤가를 돌아보았다. 마침 수확을 기다리는 대량의 붉은 수수가, 높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인상적인 배경을 만들어 준다.

산기슭 고인돌들을 바라보며 21세기 문명인으로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 좋은 곳을 어찌 알고 무덤을 만들었을까? 소위 이런 명당에 묻힌 저 큰 무덤, 작은 무덤들의 후손은 대대손손 영광을 누렸을까? 문득 눈앞에서 사진 찍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광객들이 잠시 원시인들과 오버랩되는 착각을 한다.

원시와 문명, 그사이 수많은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이는 세상을 바꾼 과학을 대단하다 인정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은 과연 얼마나 발전한 걸까. 이런저런 사념을 안고 도솔산(선운산) 선운사를 찾는다.
 
천연기념물 367호, 선운사 송악
 천연기념물 367호, 선운사 송악
ⓒ 장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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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내금강, 선운산

처음 찾는 유명한 장소.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일주문을 들어서는데 천연기념물 367호라는 '선운사 송악'을 만난다. 신기할 따름이다. 담쟁이처럼 넝쿨식물이라는데 담쟁이의 가냘픈(?) 자태와는 비교가 안 되는 굵은 나무 줄기 넝쿨이 가파른 바위에 뒤엉켜 덤불을 이루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새의 부리를 닮은 잎들이 참 예쁘다. 여기서 정확히 알 수 없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하니 고인돌의 주인공들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선운사 문 앞에서 짧은 가을 하루가 걸음을 재촉한다. 시간이 없으니 도솔암까지 갔다가 선운사는 나중에 내려오면서 들르자 생각한다. 우리 인생의 많은 일들처럼 그 '나중에'는 결코 오지 않았지만. 아무튼, 늦가을에 접어 드는데도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여전히 짙푸른 도솔천을 지나, 불교에 심취한 아사달 진흥왕이 수도 정진하였다는 진흥굴(좌변굴),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인 600년 묵은 소나무, '장사송'을 만난다. 수명이 길수록 묘하게 비틀어져 대자연의 걸작 같은 여타의 노송과는 달리 이 소나무는 반송을 위로 쑥 들어 올린 모습이라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도솔암까지 약 3.2km 평탄한 숲 길은 그 울창함으로 늦은 오후, 보고 싶은 것이 많아 마음이 급한 여행객을 잠시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도솔암에 이르니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한참을 올라 내원궁으로 간다. 이곳에 보물 제280호인 금동지장보살좌상이 있다는데 높은 곳에 위치한 내원궁에 오르니, 유물보다 눈앞에 펼쳐진 선운산의 멋진 자태를 보기 바쁘다.

신자들의 염원을 받아 빌고 있는 스님의 기도 소리를 뒤로 한 채 그곳에서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절벽, 천마봉과 낙조대로 가기 위해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도솔암의 거대한 바위 절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을 경건하게 지나 천마봉에 오른다.
 
보물 제1200호,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1200호,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 장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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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풍경. 방금 지나온 도솔암을 아득히 아래에 두고 굽어보노라니 거대한 마애불이 조그맣게 보인다. 그러나 왜 도솔암 절벽에 마애불을 조각했는지 의문이 풀린다. 위에서 보니 훌륭한 건축물만 가진다는 시퀀스(서로 연관된 것들이 연쇄되어 마침내 이루어지는 큰 그림)가 있다. 투구바위를 시작으로 저 멀리 작은 섬을 안은 바다 풍경까지 멋진 배경을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언제나 감탄하기 마련이지만 선운산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명불허전, 명산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짧은 여행 일정에 서해의 노을까지 욕심내어 급히 하산해야 하는 상황, 아쉬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일몰까지 불과 몇십 분, 가을의 전형적인 풍요로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는 선운사 마당의 감나무에게 꼭 다시 오겠노라고 지키기 어려운 약속만 하고 선운산을 떠난다.
 
서해안 바람공원의 일몰
 서해안 바람공원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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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바람공원의 일몰

일몰까지 시간이 촉박하여 끝없이 펼쳐진 갯벌과 노을이 아름답다는 만돌 해변, 닭 울음이 중국까지 닿은 산이란 뜻의 계명산 구경은 포기하고, 대신 근처의 서해안 바람공원에서 오직 바다 하늘과 일몰의 태양만 있는 광활한 자연의 그림에 넋을 놓았다.

대우주의 작은 일부,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서도 티끌 같은 존재지만, 어느 과학자의 표현처럼 '무한소에 무한대를 구현한 생명체'로서 끝없는 감동, 여기까지 찾아온 열정, 날마다 깊어지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그 '무한대'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으며 일몰의 여운이 깔린 시골 길을 달려 고창의 밤으로 향한다.
 
고창읍성 야경
 고창읍성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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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읍성 안팎의 밤과 아침

혼자 하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도 크지만 일행이 있다면 여행지에서의 하룻밤은 또 다른 기쁨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고 그 속에는 더 아름다운 정(情)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저녁 밥상 앞의 시간이 그렇다. 여행지에 남긴 이야기와 웃음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이후 일상으로 돌아와 무뎌진 어느날, 잠시나마 풍요로운 마음의 휴식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달이 밝아 별이 더 멀리 있어 보여도, 계절이 지나가 반딧불이를 볼 수 없어도, 합방(?)한 목성과 토성, 견우별, 직녀성을 정답게 불러주며 고창 읍성으로 향한다.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반증하는 밤의 고요 속, 인공 조명일지언정 긴 세월의 운치로 포용하는 읍성길 소요를 끝으로 첫날의 여행 페이지를 덮는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46호, 전봉준 생가터의 비석
 전라북도 기념물 제146호, 전봉준 생가터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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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엔 머물만한 숙소가 적다. 어렵게 찾은 숙소는 들판 한가운데 있어, 고맙게 공기도 하늘도 좋다. 둘째 날 첫걸음은 농민 운동가 '전봉준 생가'. 막상 가보니 생가가 아니고 '생가터'다. 신분으로 보아 생가가 여태껏 보존됐을 리 없는 것을, 녹두장군이 왜소한 몸이라 '녹두'라고 불렸던 것을 나중에 알았다.

탐욕스러운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저항하다 곤장을 맞아 사망한 의로운 당대 지성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세상을 바꿔보고자 하는 큰 뜻을 품게 된 녹두장군. 이곳에 남아있는 저 많은 고인돌로 보아(큰 고인돌 하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었음이 확실한데 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산하(山河)에서 농민들을 굶주리게 만들고 농기구 대신 무기를 들게 만든 존재들은 언제까지 세상을 어지럽힐지 마냥 회의가 든다. 그래도 역사는 진보하는가 묻고 싶다.
 
고창 학원농장 전경, 황화코스모스
 고창 학원농장 전경, 황화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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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발걸음을 단숨에 가볍게 해 준 다음 공간은 드넓은 학원농장. 예전에는 보리와 콩 농사를 짓던 평범한 농장이었다는데 4월 청보리 밭의 푸른 아름다움이 알려지면서 관광 명소가 되었다. 마침 무수한 황화 코스모스와 흰 메밀꽃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어서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 맑은 가을 하늘과 희고 노란 꽃바람 사이에 서 있노라니 내가 꽃이고 꽃이 나인 듯, 이 잠깐의 영원을 가슴에 담는다.
 
전남 영광군 법성포,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의 마라난타존자상
 전남 영광군 법성포,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의 마라난타존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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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법성포

여행 마지막 날의 조바심이 등을 떠밀어 닿은 곳은 영광 법성포. 국민 생선 영광굴비의 고장이다. 녹차물에 밥을 말아 함께 먹는 보리굴비의 감칠맛, 기름이 차르르 도는 갓 구운 굴비구이의 고소한 맛, 굴비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러나 법성포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옛날 파키스탄 간다라에서 마라난타 승려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쿠처, 돈황, 장안, 남경, 절강성을 거쳐 당시 백제 지역인 지금의 법성포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한다. 법성포(法聖浦)는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뜻이다. 굴비 법성포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넓고 넓은 바닷가에 간다라 양식 건축물과 불교 유물, 그 앞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그 이국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수줍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방문객을 감탄하게 하는 화려한 이야기를 하나, 둘 펼쳐 보이는 이곳 고창 일대, 여행을 끝낼 때면 언제나 그렇듯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한 경이로움과 즐거움을 가득 안고 조용히 돌아서는데 전화가 온다. 예의 내장산과 선운산 사이에서 나고 자란 '그'의 전화다. 다음 달,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승인된 한탄강 일대를 트레킹하자 한다. 참 축복받은 땅, 아름다운 우리나라다. 당연히 콜!

덧붙이는 글 | 우리나라 전통주에 관심이 많다면 고창의 유명한 복분자로 만든 복분자주를 소개한다. 대통령 정상회담에서 종종 만찬주로 복분자주가 선정되곤 하는데 선운사 복분자주는 특히 그 향기가 좋다.


태그:#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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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식물, 광물 등 좋아하는 것이 많아 지금까지 분주하게 세상을 살았습니다. 덕택에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임을 구석구석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서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도 매일 변화를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선택과 집중을 할 나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듣고 이야기 들려주기'를 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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