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초반 V리그 여자부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의 돌풍이 뜨겁다. 지난 시즌 6개 구단 체제에서 승점34점으로 최하위에 머물렀던 현대건설은 이번 시즌 개막 후 5경기에서 5승을 따내며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15세트를 따내는 동안 단 3세트만 잃은 현대건설은 5경기 승점 15점으로 2위그룹 GS칼텍스 KIXX, KGC인삼공사(이상 승점 9점)와의 차이를 6점으로 벌리며 일찌감치 독주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현대건설의 초반 상승세를 주도하고 있는 일등공신은 단연 득점2위(122점), 공격성공률 1위(46.67%)를 달리고 있는 외국인 선수 야스민 베다르트(등록명 야스민)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야스민이 허벅지 부상으로 결장했던 지난 10월 31일 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도 국내 선수들 만으로 세트스코어 3-0 승리를 만들었다(반면에 이 경기에서 인삼공사의 외국인 선수 옐레나 므라제노비치는 한 번의 교체 없이 풀타임으로 출전했다).

이처럼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는 현대건설이지만 강성형 감독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다. 강성형 감독을 고민스럽게 하는 인물은 바로 2020도쿄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 '배구여제' 김연경(상하이 브라이트 유베스트)으로부터 한국 여자배구의 '차세대 에이스'로 낙점 받은 정지윤이다. 대표팀의 차세대 에이스로 불리는 특급 유망주가 정작 소속팀에서는 벤치 신세로 전락해 이번 시즌 경기당 평균 6.75득점에 그치고 있다.

'여제'에게 인정 받은 여자배구 차세대 에이스
 
 공격의 힘만 놓고 보면 V리그 여자부에서 정지윤을 앞설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공격의 힘만 놓고 보면 V리그 여자부에서 정지윤을 앞설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 한국배구연맹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항상 오른쪽 공격수 자리가 고민이다. V리그에서는 대부분의 구단들이 오른쪽 공격수 자리를 외국인 선수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지난 수 년 간 소속팀 IBK기업은행 알토스에서 센터로 활약하던 김희진이 오른쪽 공격수로 나서며 김연경의 부담을 덜어줬지만 김희진의 백업 역할을 해줄 공격수가 마땅치 않았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은 고민 끝에 프로에서 세 시즌을 보낸 2001년생 유망주 정지윤을 발탁했다.

2018-2019 시즌 신인왕 출신의 정지윤은 소속팀 현대건설에서는 주로 양효진과 짝을 이뤄 중앙공격수로 활약한 바 있다. 지난 시즌까지 현대건설을 이끌었던 이도희 감독은 팀의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지윤을 윙스파이커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윙스파이커 정지윤은 강력한 공격과 불안한 수비를 동시에 갖춘 '양날의 검'이었다. 결국 정지윤의 윙스파이커 변신은 미완으로 막을 내렸다.

박은진(인삼공사)과 함께 대표팀의 막내였던 정지윤은 사실 도쿄 올림픽에서도 실력을 뽐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왼쪽에는 김연경과 박정아(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오른쪽에는 김희진, 중앙에는 양효진(현대건설)과 김수지(기업은행)로 이어지는 주전 선수들의 활약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정지윤은 간간이 김희진과 박정아의 백업으로 투입돼 코트를 밟으며 생애 첫 올림픽의 분위기를 느꼈다.

그럼에도 정지윤은 올림픽이 끝난 후 김연경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주역으로 지목 받았다. 물론 '맏언니'이자 한국 여자배구의 아이콘이었던 김연경이 대표팀을 떠나면서 팀의 막내를 차세대 에이스로 지목하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연경은 현대건설에 새로 부임한 강성형 감독에게 "여자배구의 미래를 위해 정지윤을 꼭 윙스파이커로 키워달라"고 따로 부탁까지 할 정도로 정지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김연경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한국 여자배구의 미래로 떠오른 정지윤은 올림픽 직후에 열린 컵대회를 통해 곧바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올림픽을 치르고 곧바로 현대건설에 합류한 정지윤은 컵대회에서 주로 교체 멤버로 출전했음에도 결승전 17득점을 포함해 4경기에서 58득점(경기당 평균 14.5득점)을 기록하며 생애 첫 컵대회 MVP에 선정됐다. 바야흐로 V리그에 '정지윤 시대'가 활짝 열리는 듯 했다.

정작 시즌에선 벤치로 밀려난 컵대회 MVP
 
 정지윤이 장차 국가대표 윙스파이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안한 수비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정지윤이 장차 국가대표 윙스파이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안한 수비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 한국배구연맹

 
만20세의 젊은 나이에 언니들을 따라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한 정지윤은 컵대회 MVP까지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한국 여자배구의 차세대 에이스로 떠올랐다. 많은 배구팬들은 컵대회를 통해 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력을 증명한 정지윤이 V리그에서도 이번 시즌 현대건설의 토종 에이스로 활약하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정지윤은 이번 시즌 개막 후 5경기에서 한 번도 주전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10월 17일 기업은행과의 개막전에서 코트를 밟지 못했던 정지윤은 이후 3경기에서 황민경과 고예림의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 27일 GS칼텍스와의 경기에서 1세트 중반부터 고예림 대신 출전해 4세트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며 13득점을 올린 것이 이번 시즌 가장 좋은 활약이었다. 아직 시즌 초반이라곤 하지만 4경기 27득점(경기당 평균 6.75득점)은 컵대회 MVP에게 기대했던 활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정지윤은 40.68%의 뛰어난 공격성공률과 9.38%의 아쉬운 리시브 효율이 말해주듯 공수를 두루 겸비한 만능선수라기 보다는 공격에 특화된 선수다. 하지만 서브리시브를 면제 받는 오른쪽 공격수 자리에는 이번 시즌 4경기에서 평균 30.5득점을 퍼붓고 있는 최고의 외국인 선수 야스민이 있다. 그렇다고 강성형 감독이 공격력 강화를 위해 안정된 수비를 자랑하는 황민경과 고예림 대신 정지윤을 선발로 투입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렇게 백업으로 활약하며 기회를 노리던 정지윤은 지난 10월 31일 인삼공사전에서 야스민이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기회를 얻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강성형 감독의 선택은 정지윤이 아닌 36세의 베테랑 황연주였다. 오랜만에 선발 출전해 코트를 누빈 황연주는 15득점을 기록하며 펄펄 날았고 매 세트 '더블 스위치'(전위에 공격수 3명을 두기 위한 교체)로 코트에 투입된 정지윤은 단 4득점에 그쳤다.

한송이(인삼공사), 박정아 등 국제대회에서 김연경의 파트너로 활약했던 선수들은 상대의 목적타 서브를 집중적으로 받아내는 시련을 견디며 대표팀의 주전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황민경과 고예림이라는 준수한 '살림꾼'이 둘이나 있는 현대건설에서 정지윤은 꾸준히 출전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과연 강성형 감독은 장단점이 뚜렷한 정지윤을 적절히 활용해 유망주의 성장과 팀 우승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함께 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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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도드람 2021-2022 V리그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정지윤 컵대회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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