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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신나물과 여치
ⓒ 김민수
나는 뜨거운 여름 산과 들의 풀밭 여기저기에서 기다란 고개를 내밀고 피어나는 '짚신나물'이라는 노란 꽃이랍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나면 갈고리 같은 털을 숭숭 달아 내 곁을 스치는 모든 것들을 붙잡고 긴 여행을 합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다 그 어딘가에 떨어지게 되면 거기에서 긴 잠을 자다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요.

그래서 내가 주로 피어나는 곳은 그냥 산과 들이 아니라 들짐승들이 다니는 길목이나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길가랍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길가에 피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고, 그러면서 그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사람들이요, 나는 나인 줄만 알았는데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짚신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눈여겨보다가 '짚신'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하필이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걸어다닐 때마다 닳아 없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탐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죠. 비록 내가 그들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짚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이 막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씨앗을 맺고는 누군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내 곁을 스치기만 하면 꽉 붙잡고 그가 걸어가는 대로 함께 걸어가다가 내 마음에 드는 곳에 떨어지면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 그 기다림은 설렘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내 여행길에 대한 꿈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런저런 상상을 했습니다. 그 상상이라는 것, 거기엔 내 삶에 대한 희망사항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 김민수
그러나 삶이란 희망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품는다고 절망 같은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아니, 오히려 진정한 희망의 노래는 절망, 아픔의 정점에서 부르는 것이지 그저 평온하게 지낼 때에는 실감나지 않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나그네가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가 내 곁을 지나가는 순간 바람이 불어와 나를 흔들어 주었고 나는 그 순간 나그네의 옷깃에 달라붙었습니다.

"바람아, 고마워! 그리고 얘들아, 안녕!"
"그래, 좋은 곳에서 피어나길 기도할게."

그렇게 나그네와의 여행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나그네는 때로는 바다를 따라 걷기도 했고, 때로는 깊은 산길을 걸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거의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늘 걸어 다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그네의 봇짐에는 짚신들이 켤레켤레 묶여 있었습니다.

"얘들아, 너는 나그네가 어디로 가는지 아니?"
"아니,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언제부터 저렇게 여행을 시작했니?"
"모르겠어, 하지만 아주 오래 되었다고밖에는 얘기를 못하겠어."
"얼마나 오래?"
"몰라, 아주 오래......"

그렇게 봇짐에 달려 있던 짚신들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기를 계속하던 나그네는 추수를 끝낸 농가에서 탈곡한 볏짚을 얻어 짚신을 삼았습니다. 날씨가 제법 아침저녁으로 싸늘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제 곧 겨울이 오려나 봅니다.

"어허, 이번 겨울을 나려면 짚신이 꽤 필요하겠는걸? 이제 옷도 좀 두꺼운 것으로 갈아 입어야겠어. 밤이면 제법 춥거든."

나그네는 옷을 벗어서는 탈탈 털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만 넋을 놓고 있다가 그곳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은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갯바위, 흙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살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그곳이었습니다.

"안 돼!"

그러나 나는 그 갯바위의 갈라진 틈, 아주 작은 틈 사이로 깊게 박혀 버렸습니다. 그러니 흙에 묻힌 것도 아니고, 바위에 끼어서 빗물에 아주 조금씩 목을 축이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파도가 몰아칠 때면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고, 이른 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통에 물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짜다 못해 쓴 바닷물만 내 몸을 때려서 갈증을 더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싹을 낸다는 것,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힘들 줄 알았다면 나는 긴 여행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피어났던 그곳보다는 좋은 곳일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여행을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바위틈, 그것도 갯바위의 바위틈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김민수
어디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바람이 어느 날 그 좁은 갯바위틈까지 불어왔습니다.

"바람아, 너무 힘들어. 난 이렇게 죽는 거니?"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비가 올 거야. 그러면 네가 할 일이 있어."
"그게 뭔데? 목을 축이는 일 말고 또 있니?"
"빗방울 속에 흙이 아주 조금씩 들어 있을 거야. 그 흙들을 소중하게 쌓아두렴."
"그게 무슨 말이야? 빗속에 흙이 있다구? 그것이 얼마나 되겠어? 난 그냥 타는 목이라도 축일래."
"아니야, 목만 축이면 넌 싹을 틔워도 죽을 수밖에 없다구!"
"그럼, 싹을 틔우면 내가 산다는 보장이 어딨어? 저 밑을 보라구, 저긴 바다야. 내가 뿌리를 내릴 저곳은 바다라구.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야? 바닷물에 뿌리가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아니야, 희망을 가져."
"희망? 그것도 어느 정도 가능할 때 가지는 거야. 배부른 소리하지 말아. 여기가 오죽하면 자살바위겠어?"

다음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알지 못했는데 정말 빗방울 속에는 모래알보다도 더 작은 흙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작아 그것을 어떻게 쌓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알았습니다. 내가 쌓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아주 조금씩 흙이 쌓여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갯바위 어딘가에 있던 흙들도 조금씩 더해지면서 많지는 않지만 싹을 틔워도 좋을 만큼의 흙을 가질 수 있었고 이내 작은 틈들은 흙들로 메워졌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그 갯바위의 틈에서 올라와 고개를 내밀고 뜨거운 햇살 아래 꽃을 피었습니다. 씨앗이 된 후 처음 보는 세상입니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너 그곳에서 피었구나. 저 길가 들판에 피어 있는 것들보다 색도 진하고 향기도 더욱 진하구나! 그로 인해 또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그곳은 나의 삶의 터전이 되었죠.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짚신을 신고 다니는 이들이 없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 김민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갯바위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었습니다. 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한참 바다를 바라보던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쩌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종종 그런 일들이 있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갯바위를 자살바위라고도 불렀답니다.

"안돼요!"

나는 할 수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꽃들의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코로 듣는답니다. 다음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 남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을까, 그는 그가 사는 곳으로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또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여름 날, 중년의 남자가 열 두어 살 된 예쁜 아이를 데리고 이 곳에 왔답니다.

"서희야, 아빠가 정말로 힘들었을 때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단다. 엄마가 사고로 죽고 나서였지. 그런데 그때 바위틈에서 핀 이 꽃을 보았어. 너도 힘들다고 느낄 땐 이 꽃을 생각하며 살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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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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