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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미니어처 초상화가 있는 진열장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18세기 미니어처 초상화가 있는 진열장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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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작은 초상화

르네상스를 거치며 초상화는 더욱 대중화됐다. 왕이나 귀족이 아니어도 부유한 상인들은 초상화를 가질 수 있었다. 부르주아는 귀족을 흉내 내며 지배계급이 되려는 욕망을 키운다. 물질적 부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문화적 계급 상승의 욕구를 채우기에 미술은 적절한 도구다.

초상화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초상화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너도 나도 가지는 초상화와 달리 자신만의 존재를 드러내는 초상화 양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욕구에 맞춰 당시 화가들도 새로운 형식과 양식을 추구했다. 그렇게 미니아튀르(Miniature) 혹은 미니어처 초상화가 탄생한다. 미니아튀르 초상화란 매우 작게 만들어진 작품을 일컫는다.

17세기 이후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늘어나면서 화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다. 작은 상자나 뚜껑이 달린 펜던트 안에 그려진 초상화가 제작됐고, 더 저렴하면서 간편한 미니아튀르 초상화는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로코코(Rococo) 미술의 대표적 화가인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1673~1757도 바로 이 작은 초상화로 명성을 날리던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미니어처 초상화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종이만이 아니라 돌, 구리, 도자기 등 여러 재료 위에 초상화를 그렸다. 1700년대 들어 상아 위에 그려진 미니어처 초상화도 등장했다. 카리에라는 최초로 상아 위에 초상화를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프랑스 화가 잔 스테브가 카리에라에게 상자를 장식하는 상아 위에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카리에라는 미니어처 초상화뿐 아니라 다양한 초상화가로 경력을 쌓아나갔다. 1715년 그는 루이 15세의 초상화를 완성했는데, 당시 초상화가로서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카리에라처럼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고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친 여성 화가는 찾아보기 드물다. 

무엇보다 그는 꾸준히 자화상을 남겼다. 특히 1715년 제작한 자화상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오른손에는 붓이 쥐어져있다.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들고 있는 자화상을 보여줌으로써 인물화가로서 자신의 전문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여성 화가를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로 낮춰 보는 당시의 관념에 조용히 저항할 것이다.
 
여동생의 초상화를 든 로살바 카리에라의 자화상 Self-portrait holding a portrait of her sister
종이에 파스텔, 71x57cm, 1715
 여동생의 초상화를 든 로살바 카리에라의 자화상 Self-portrait holding a portrait of her sister 종이에 파스텔, 71x57cm,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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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의 위상을 높이다

미술사에서 카리에라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바로 파스텔을 훌륭한 재료의 반열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파스텔은 로코코 미술의 장식적이면서 화사하고 다채로운 색을 담아내기에 적합했다. 물론 파스텔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화가들이 사용하던 재료이지만 카리에라는 파스텔을 더욱 다양하게 활용해 유화에 뒤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카리에라는 베네치아에서 레이스 직공의 딸로 태어났다. 카리에라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릴 때부터 레이스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레이스 짜는 기술에 능했던 그의 섬세함은 파스텔을 다루는 데에서도 빛났다.

카리에라는 여성 화가들을 길러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기에 당시 젊은 여성 화가들이 카리에라에게 영향을 받았다. 카리에라의 자매들인 지오반나와 안젤라도 화가였다. 대부분 파스텔을 활용한 인물화에 주력한 화가들로 성장했다.

파리에서 카리에라는 프랑스로 모여드는 유럽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경력을 쌓았다.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로살바 카리에라의 파스텔로 제 얼굴을 남기려 몰려들었다. 상류층의 귀부인들이 아침 6시부터 카리에라의 작업실로 찾아와 초상화를 위해 화가 앞에 앉곤 했다. 

파스텔 초상화는 18세기 초기의 프랑스 미학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의 조지 3세는 카리에라 작품의 주요 수집가였다. 카리에라는 1705년 로마 아카데미의 회원이 됐고, 1720년 볼로냐 아카데미를 거쳐 그해 10월에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회원으로 선출됐다. 여성 화가들 중에 드물게 아카데미 회원으로 자리잡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카리에라는 나이든 얼굴을 붓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여성의 얼굴을 지우려는 사회에서 많은 여성 화가들이 제 얼굴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렸다. 때로는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나 그 한계를 끌어안고서라도 공적인 영역에 나가려 애썼다.

여성의 얼굴 그리기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보인다. 또한 여성들이 어떻게 개인이 되기 위해 분투했는지 알 수 있다. 평가받는 얼굴이 아닌 존중받는 얼굴이 되기 위해 여성 화가들은 초상화를 적극 활용했다.

로코코 양식은 후에 '여성적인 것'으로 조롱받으며 '남성적인' 바로크 미술보다 가볍고 쾌락적인 것을 추구하는 양식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미술이 종교적인 교훈이나 권위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양식으로 발전되는 시기였다. 로살바 카리에라는 로코코가 인기를 얻는 데에 누구보다 큰 족적을 남긴 화가였다.

-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2023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구독문의 02-6712-5243


태그:#페미니즘, #미술관, #여성화가, #카리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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