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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25일은 72주년 '6.25전쟁일'이다. 6.25전쟁은 '재앙'이었다. 모든 국민이 그 엄청난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통에 대부분 소중한 가족을 잃었으며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다. 문제는 실향 이산가족들이 재회의 기약 없이 70여년을 보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6.25전쟁이 낳은 실향민의 정체성은 그만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이북최남단 개풍군이 고향인 개풍인들은 실향 이산가족 중 가장 슬픈 배경을 가지고 있다. 개풍군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이 직접 볼 수 있는 대북접경지역에 산재한 미수복지역이다. 그러나 한때 고려인삼이 많이 난 곳으로 유명한 개풍이 남한인지 북한인지 어느 곳에 속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개풍인들은 본래 이남(以南) 사람이다
 
개풍군 실향민들이 경기도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아 망원경으로 강건너 고향을 살펴보고 있다.
 개풍군 실향민들이 경기도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아 망원경으로 강건너 고향을 살펴보고 있다.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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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풍군은 일제 해방 당시만해도 엄연한 대한민국 영토였다. 이남 우리땅이었다. 그러다 6.25전쟁과 정전협정으로 개풍군은 졸지에 이북땅이 되고 말았다. 이에 개풍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장래 수복할 지역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공식 행정명칭도 '미수복경기도 개풍군'이다.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개풍인들의 삶은 이남과 이북으로 갈라졌다. 이남으로 피난해 삶을 이어온 개풍인 다수는 6.25전쟁일을 고향에 남겨 둔 가족들에게 '속죄'하는 날로 여기고 있다.

개풍군민들은 6.25전쟁 때 이북5도민(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황해도 출신)과 달리 비교적 늦게 피난을 떠났다. 6.25전쟁 당일 새벽 개성과 개풍을 지나는 북한군 동태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6.25전쟁 직전에도 북한의 도발 징후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개풍군을 포함한 인근 개성이 평온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은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잘 묘사돼 있다.

반면 이북5도민들은 북의 남침과 중공군 개입에 따른 1.4후퇴 당시 이남 도처에 새로 정착할 곳을 찾아 조직적으로 피난했다. 이때 북한을 탈출한 주민은 대략 100만 명을 헤아린다.

흥남철수작전에 따른 부산과 거제도 피난처와 함경도민들이 강원도 속초에 조성한 '아바이마을', 황해도 출신들이 김제애 만든 용지농원마을 등은 대표적인 실향민 집단거류지이다.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개풍군민 다수가 가까운 김포, 강화, 인천 등으로 급히 피난했다. 이곳에 일가나 친척들이 거주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뒤따랐다. 대부분 그곳에 2~3일 잠시 머무를 요량이었다. 그런데 강화에 가려면 북한의 감시와 추격을 피해 밤에 쪽배를 이용해야 한다. 이때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렵게 피신했지만 더 이상 고향에 갈 수 없고 세월은 무심하게 70여 년이 흐르고 말았다.

6.25전쟁으로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 죄책감으로 평생 살아
 
개풍군 임한면 출신 실향민들이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망향제단에서 고향 선부조를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전망대에서 고향 개풍군 임한면을 직접 볼 수 있다.
 개풍군 임한면 출신 실향민들이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망향제단에서 고향 선부조를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전망대에서 고향 개풍군 임한면을 직접 볼 수 있다.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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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맑은 날 강화와 김포 등지에서 한강을 사이에 둔 미수복 개풍군의 광덕면, 흥교면, 대성면의 부락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서둘러 오라 손짓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고향에 남은 사람은 대부분 고령자와 아녀자들이었다. 이들이 고향을 지키고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징집을 앞둔 20세 전후 남자이거나 집안 가장들이다. 혈혈단신도 많았다.

그러나 개풍군민 상당수는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 생각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평생 겪고 있다. 해마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에 강화평화전망대, 파주오두산통일전망대를 찾는 것도 그곳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속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척의 고향과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에 복받쳐 눈물이 흐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저 멀리 고향을 가진 사람들이 차라리 부럽다고 푸념하는 이도 있다.

김문수(86) 전 개풍군민회장은 "고향을 직접 목도하면서도 고향땅을 밟을 수 없는 개풍군 실향민들이야말로 이북실향민 중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며 슬퍼했다.

윤일현(81) 개풍군민회장은 "가족을 따라 강화로 피난한 어린 시절이 생생하다"면서 "생전에 부친은 개풍실향민들을 한데 모아 이산가족명부를 작성하는 등 행정과 민원을 도왔다"며 전쟁 시절 과거를 회상했다.

1955년부터 개풍군민회 조직해 실향의 슬픔 나누고 귀향 꿈 키워
 
올해 속초에 건립된 이산가족통일기원비, 속초시는 매년 6월 이북 실향이산가족을 위한 실향민 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 속초에 건립된 이산가족통일기원비, 속초시는 매년 6월 이북 실향이산가족을 위한 실향민 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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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풍군민들은 전쟁 후 1955년 '개풍군민회'를 조직해 실향과 이산의 애환을 보듬고 귀향과 통일에 대비해 전국적인 애향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군민회를 구성하는 14개 면민회도 각기 60여년 이상 친목활동을 이어가며 향수를 달래고 있다.

10만 명 정도 추산되는 개풍군 실향민 90%는 모진 풍상에 귀향의 꿈을 접은 채 이승을 떴다. 경기도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잠든 개풍인들은 '장차 통일이 되면 고향을 찾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조상에게 감사하고 제사를 드리라'는 유언을 대부분 남긴다. 이때 후손들은 부친 등 조상들의 효와 애향정신을 자연히 인지하게 된다.

한편, 개풍인들은 생전에 자식들에게 자신이 실향민이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들려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들이 겪은 타향의 설움과 차별을 대물림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대간 소통과 대화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그 정체성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뿌리를 찾아 알게 모르게 부모의 고향을 기억하고 대를 이어 애향활동하는 후계세대들이 있다. 이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통일과 귀향은 인류의 기본가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들이 있기에 남북통일의 기대감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풍군 실향민 2세의 맏형 격인 장기천 회장(78, 대한노인회 강화지회장)은 "부모님의 애향정신과 귀향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2세와 3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애환을 나누고 친목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태그:#6.25전쟁일, #미수복개풍군, #개풍군민회 , #박완서 , #아바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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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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