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존 레논-마이클 잭슨 등은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예술인이자 어느날 갑작스럽게 요절하며 우리 곁을 떠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마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대중들에게는 사후에도 무수한 소문을 낳기도 했다. 1980~1990년대 '홍콩영화의 전설' 장국영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그가 생전에 겪었던 아픔이 뒤늦게 밝혀지며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0월 29일 방송된 음모론-괴담 분석 프로그램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4>에서는 '칠곡 PC방 살인사건'과 '장국영 사망사건'을 재조명했다. 
 
2014년 벌어진 칠곡 PC방 살인사건은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애매한 청부살인'이라는 독특한 수식어로 불린다. 피해자는 자신이 운영하던 PC방에서 흉기에 찔려 사망했고 놀랍게도 그는 몇 해 전까지 전직 경찰이었고. 또한 가해자는 현직 경찰로 한때 동료였던 피해자를 청부살해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현직 경찰이던 장씨는 지인이던 배씨를 시켜 전직 경찰인 선배를 청부 살해한 혐의가 인정되어 30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8년째 복역중이다. 하지만 장씨 측은 실행범인 배씨의 모함으로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장씨는 살해 당일 살인사건 현장에 없었고 배씨와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과 법원이 사건을 정리한 결론에 따르면, 배씨는 처음에 피해자에게 수면제가 든 음료를 먹이고 미리 준비해간 산소통으로 기절한 피해자에게 산소를 주입하려고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피해자가 저항하자 다급해진 배씨는 흉기로 피해자를 수 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후 검거된 배씨는 범행이 장씨가 시킨 것이라고 진술했다.
 
피해자는 장씨에게 2억 원을 빌린 상태였다. 돈을 갚지 못한 피해자는 생명보험에 가입하여 그 수익자를 장씨로 지정했다. 배씨 역시 장씨에게 채무가 있는 상태였다. 배씨는 장씨가 피해자를 죽이면 빚을 탕감하고 수고비도 얹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장씨는 피해자를 죽여달라고 했던 것은 인정했지만 홧김에 한 말이었고 이후 철회했음에도 배씨가 '자발적이고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해명했다.
 
경찰은 배씨가 숨겨둔 산소통과 PET병을 잘라 급조한 산소마스크를 찾아냈다. 배 씨는 이 산소통과 산소마스크를 제공한게 모두 장씨이며 '수면제로 피해자를 재운뒤 산소를 20분 정도 코에 주입하면 자연사로 꾸밀수 있다'고 범행방법까지 알려줬다고 진술했다. 법원과 검찰은 '살해의 목적으로 범행도구를 전달한 의도가 분명하며, 이는 범행도구나 방식의 허술함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판단을 내렸다.
 
반면 장씨의 변호인 측은 계획을 철회하고 산소통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배씨가 이를 무시했다고 밝혔다. 장씨의 지인은 자신으로부터 산소통을 구입했던 장씨가 이틀 만에 다시 연락이 와서 산소통을 되팔 수 없느냐는 문의를 해왔다고 진술했다. 장씨가 피해자를 살해할 마음을 접은 증거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문성준 교수는 "살해할 의지를 접은 것인지, 단지 살해할 방법을 바꾼 것인지는 이 증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행범인 배씨는 징역 20년으로 장씨보다는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법원과 검찰이 배씨의 우발적 범행보다 장씨의 청부살해 쪽에 더 무게를 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씨의 가족들은 장씨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나쁜 마음을 먹었던 것은 잘못이지만, 살인범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산소통이라는 청부살해의 용도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범행도구가 모든 논란의 시작이었다. 과연 산소통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전문가들은 조악한 범행도구나 짧은 시간으로 한 사람을 사망까지 이르게 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형사 사건에서 미수에 그쳤더라도 범죄가 성립될 위험성이 있었다면 '불능미수', 위험성이 없다면 '불능범'에 해당한다. 예로 들어 누군가를 살해할 의도로 독극물을 먹였는데 치사량 이하였다면 불능미수, 설탕물을 독극물로 착각하고 먹었다면 불능범이 되는 것이다. 전자는 죄가 경감되고 후자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장씨측은 이 사건이 불능범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장씨는 배씨가 체포되기전 범행 사실을 듣고 그를 만나 차에 묻은 혈흔 등 증거리를 인멸하려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장씨의 변호인 측은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쓸 수 있다는 불안감에 우발적으로 벌인 행동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장씨의 가족들은 배씨 측이 부인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 '거짓으로 진술한 부분이 있다'고 고백했다고 폭로했다. 배씨 측은 2심 이후 검찰의 형량거래 제안을 듣고 '흉기를 장씨가 제공했다'는 등의 허위 증언을 했다는 진술서를 법원에도 제출했다. 장씨 가족은 산소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검찰이 어떻게든 장씨를 엮기 위해서 배씨를 회유하여 칼의 출처를 장씨 쪽으로 몰아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사건을 분석하며 "장씨가 진심으로 살인을 사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피해자 사망후 보험금 배분과 투자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구체적으로 계획한 정황이 드러난다. 진심이 아니었다는 장씨의 말과 모순된다"고 꼬집었다.
 
또한 배씨가 형량거래를 위하여 검찰에 거짓 진술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말이 맞지 않는다. 검찰에서 진술이 바뀐 게 아니라 이미 경찰 조사 때부터 장씨의 사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지적하며 "계획(산소통)과 실제 살인의 방식(흉기)가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발은 아니다"라고 정의했다. 문 교수는 "범행도구나 살해 방법의 차이가 살해라는 범죄에서 면책을 허용할 정도의 차이는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장씨가 배씨에게 살인을 교사했다는 혐의가 아닌, 살인의 행위를 분담한 '공동정범'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장씨가 범행의사를 철회했음을 증명할 만한 강력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은 재심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었다. 변영주는 "불능범이라고 해도, 나쁜 마음에서 시작된 최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법원의 판결을 분석했다. 어쩌면 '악마는 디테일에서 나온다'라는 오랜 격언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시대의 연인' 장국영은 1980년대 <영웅본색> 시리즈를 비롯하여 <천녀유혼> <패왕별희>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등 수많은 작품에서 연기력과 흥행성을 모두 입증하며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이다. 지난 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옥상에서 추락하여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경찰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을 비롯하여 장국영을 사랑했던 세계의 수많은 팬들이 큰 충격에 빠지며 전설의 죽음을 애도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날은 만우절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슈퍼스타의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허망한 최후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수많은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다.

장국영은 사망 당일날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인들과 연락하고 스케쥴을 소화하며 평범한 일상생활을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날 오후 6시 43분, 쿵 소리와 함께 호텔 정문앞 택시 승강장에서 발견된 장국영은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7시 6분 사망판정을 받았다.
 
당시 경찰 조사결과 장국영은 사망 당시 뒤통수가 파열되고 하반신 골절이 심각했지만, 상반신과 얼굴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무려 80m 높이인 24층에서 추락사한 것을 감안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다. 장국영의 유족들은 시신 보존을 이유로 법원에 부검을 하지않을 것을 요구했다.

당시 언론보도에서는 장국영은 사망 10분여 전까지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지인과 통화중이었고, 호텔 엘리베이터 CCTV에는 장국영이 탑승한 모습이 촬영되지 않았다. 이 내용대로라면 장국영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위하여 계단을 전력질주하여 24층까지 올라가서 도착하자마자 바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장국영과 마지막 통화를 했던 매니저 진숙분은 장국영과 나눈 이야기가 "5분 뒤에 보자"는 것이었고, "현재 위치가 지하주차장"이라는 이야기는 없었다고 진술하며 가짜뉴스임이 드러났다.
 
장국영은 생전에 '탕탕'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당학덕이라는 동성 연인이 있었다. 장국영은 콘서트에서 당학덕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중요한 사람'이라고 공공연하게 부를 만큼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장국영의 유서에도 당학덕의 이름이 올라있었고, 그는 장국영 사후 약 400억에 이르는 유산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장국영 생전부터 파파라치에 시달려왔던 당학덕은 장국영의 죽음에도 개입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에 휩쓸렸다. 당학덕이 재산을 노리고 장국영을 청부살인했다는 설에서, 당학덕이 새로운 연인이 생긴 데 장국영이 낙담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문 등이다.
 
계속된 루머에 시달리던 당학덕은 "장국영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 사이의 문제 때문에 사망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당학덕은 현재도 장국영의 기일과 생일날마다 그와 함께했던 미공개 사진을 SNS에 올리며 팬들과 더불어 장국영을 추모하고 있다.
 
한편으로 장국영의 죽음에 중국의 폭력조직인 삼합회에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홍콩의 유명배우들은 대부분 자의반 타의반으로 삼합회와 유착해있거나 혹은 협박을 받고 억지로 작품에 출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당학덕 역시 삼합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고 2009년 홍콩민주화 시위 당시 시민들을 폭행한 배후에 있다는 소문도 나돈 바 있다. 높은 인기를 끌며 많은 자본이 개입된 홍콩 연예계는 일찍부터 범죄조직의 표적이 되어왔고, 이는 홍콩영화산업을 둘러싼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양조위의 아내로 유명한 유가령은 삼합회 조직원들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나체사진을 찍히는 유린을 당했고, 액션스타 이연걸의 매니저는 삼합회에게 총격을 당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두 배우들이 삼합회가 출연을 요구하는 작품을 거절하면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2002년 10월에는 홍콩의 타블로이드 매체인 <동주간>이 유가령의 납치사건과 나체 사진을 허가없이 유출한 것을 계기로, 분노한 홍콩 유명 배우들이 단체로 거리에 나서서 삼합회와 황색 언론의 만행을 폭로하고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장국영 역시 생전에 삼합회와의 유착과 협박설 등에 시달려왔다. 영화 <가유희사> 촬영 당시 흉기를 든 괴한들이 영화사에 난입하여 편집본을 강탈하고 장국영에게 삼합회 소유의 회사에 들어올 것을 요구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홍콩영화계에 삼합회의 영향력이 극심했던 1990년대 초반에 장국영은 일시적으로 연예계 은퇴를 선언하고 송별콘서트까지 마친 뒤 홍콩을 떠나 캐나다 밴쿠버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민절차가 유독 엄격하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는 것은, 장국영이 삼합회와의 유착에서 자유롭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장국영이 사망한 2003년은 홍콩이 중국 정부에 반환하며 삼합회의 연예계 영향력도 약화된 시기였기에 삼합회 살해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또한 전문가들은 장국영의 사망 당시 수상한 외상에 대해서도 타살 가능성을 거론할 만한 별다른 의혹이 보이지 않다는다고 분석했다. 시신의 손상부위나 혈흔의 방향성 등을 고려할 때 추락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장국영은 생전 사망 직전까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온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는 장국영에 가장 가까웠던 지인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국영의 조카는 장례식 추도사에서 "삼촌을 자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울증이 얼마나 그를 괴롭혔는지 직접 봤다"고 고백했으며, 매니저 진숙분은 "장국영은 우울증을 오랜 시간 버텨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피할 수 없었던 결과였다"고 씁쓸하게 회상했다.
 
톱스타였던 장국영은 홍콩영화계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직접 겪었던 인물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대중의 관심이나 홍콩영화의 위상, 중국 반환 이후 자유롭던 홍콩 사회의 분위기가 변해가는 모습들은 장국영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장국영은 생전에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홍콩 파파라치들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려왔으며, 세간의 구설수가 두려워 우울증 치료를 제대로 받지도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인들은 장국영이 생전에 "슬픔을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장국영과 진숙분이 마지막으로 나눈 통화의 내용이 훗날 공개됐다. 원래 진숙분과 식사를 하기로 했던 장국영은 "이번 기회에 홍콩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진숙분은 곧장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장국영은 다시 전화를 걸어 5분 뒤에 정문에서 보자는 약속을 했다. 그녀는 5분 뒤 호텔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고 장국영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고.
 
어쩌면 장국영은 자신의 최후마저도 파파라치의 표적이 될 것을 직감하고, 자신의 마지막 명예를 지켜줄 사람으로 가장 가까웠던 진숙분을 부른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진숙분을 현장을 수습하여 장국영의 참혹한 시신 모습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장국영을 사랑했던 지인들은 그가 생전에 언론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잘 알았기에 무성한 소문과 악의적인 루머에도 피해를 가무하며 묵묵히 선의의 침묵을 지켰다. 장국영을 죽음으로 몰고간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그 대상은 바로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유린하며 사회적 타살을 유도한 황색언론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수로도 유명했던 장국영이 2000년에 발매했던 앨범의 1번트랙 제목은 '나(我)'였다. 수많은 소문과 의혹에 시달려왔던 장국영은 노래 가사속에서 '나는 나다. 또다른 색을 가진 불꽃'이라고 표현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켜보고 인정해달라는 호소를 담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국영의 모습도 그가 살아온 인생과 노력 그 자체를 오로지 정직하게 바라봐주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장국영 당혹사 음모론 삼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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