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의 '왓 어 언더풀 월드', 냇 킹콜의 '포 더 센티멘탈 리즌스' 프랭크 시내트라의 '플라잉 투더문', MC 해머의 '유 캔트 터치 디스', 닥터 드레의 '더 넥스트 에피소드' 제이지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 켄드릭 하마의 '험블' 등은 시대와 세대를 넘어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명곡들이자, 그 뿌리가 흑인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힙합과 재즈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대중음악의 장르로 꼽힌다. 그런데 그 시작은, 차별을 당하던 흑인들의 애환에서 비롯됐다. 최악의 빈민가에서 탄생했던 흑인 음악은 어떻게 오늘날 대중음악계의 주류가 되어 세계를 강타할 수 있었을까.

음악의 역사
 
13일 방송된 tvN 역사교양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77회에서는 '최악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재즈와 힙합'편을 통하여 최초로 음악 역사를 주제로 다뤘다. 김영대 대중음악 평론가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로 불리는 뉴올리언스는 루이 암스트롱의 고향이자 미국 재즈의 성지로 불린다. 18세기까지 프랑스의 영토였던 뉴올리언스는 당시 전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여러 나라의 문화가 어우러지며 공존할 수 있었다. 또한 온난다습한 기후 덕분에 목화와 사탕수수 농장이 번성하면서 그 영향으로 일꾼을 공급해 줄 노예무역이 번성하게 됐다.

노예의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었다. 이러한 흑인 노예들의 한과 슬픔이 담긴 '노동요'에서 시작된 음악이 바로 '블루스' 장르였다. 또한 기독교를 종교로 삼은 흑인 노예들은 여기에 아프리카의 리듬을 결합한 흑인 가스펠 장르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스펠과 블루스는 훗날 재즈의 기본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재즈 탄생의 주역으로 꼽히는 것은 '크레올'이었다. 카리브해와 남미 지역에서 미국 남부로 이주 정착한 유럽계 백인과 흑인의 혼혈자손을 의미한다. 당시 노예와 빈민층 취급을 받던 가난한 대부분의 흑인들과 달리, 백인 조상이나 부친을 둔 크레올들은 백인과 거의 유사한 대우를 받았고 유럽의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1865년 미국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크레올과 일반 흑인들의 위치가 동등해지면서 크레올의 사회적 지위는 하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남부의 백인 세력들은 노예제 폐지를 인정하지 않고 '짐 크로우법(1876-1965년)' 같은 악법을 통하여 유색인종 차별을 이어갔다. 크레올 역시 차별의 타깃이 되면서 빈민층으로 전락해갔다.
 
일부 크레올들은 흑인 빈민가로 이주했고, 거리의 흑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크레올들이 전통적인 클래식과 자유분방한 흑인 음악의 결합을 통하여 탄생시킨 새로운 음악적 장르가 바로 '래그타임'이다. 영화 <스팅>의 주제가로 유명한 스콧 조플린의 '디 엔터테이너' 등이 래그타임을 활용한 대표적인 명곡들이다.
 
흑인 노예들의 음악은 가스펠과 블루스, 크레올이 만들어낸 래그 타임까지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탄생한 것이 바로 지금의 재즈(JAZZ)다.
 
20세기 초반 뉴올리언스의 대표 유흥가였던 스토리빌은, 신분과 인종에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며 재즈 음악의 열풍을 이끈 명소로 자리잡았다. 크레올 출신으로 구성된 킹 올리버 크레올 재즈 밴드의 '딥퍼 마우스 블루스(1923)'등은 초기 재즈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노래 제목인 '하마 입'은 바로 전설적인 재즈 가수인 루이 암스트롱의 별명이기도 했다.
 
재즈 음악은 몇차례의 시련을 겪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뉴올리언스가 군항으로 개편되면서 유흥가였던 스토리빌은 하루아침에 폐쇄된다.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재즈 음악가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시카고 등 중부 대도시로 떠났다.
 
미국은 1차대전 종전 이후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했고, 화려하고 퇴폐적인 밤문화가 유행하면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등에 업고 황금기를 맞이한 음악이 바로 재즈였다. 미국 음악계에서는 1920년대는 이른바 재즈 에이지(재즈의 시대)로 불린다.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 시행은 대부분 술집으로 공연을 했던 재즈 연주가들에게 또다시 일자리를 잃을 위기로 이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마피아 범죄조직들이 금주법 시대에 밀주사업으로 더 번성했고, 손님들을 끌기 위한 유흥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재즈의 인기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당시 밀주와 함께 했던 재즈의 열기를 표현한 작품이 영화와 뮤지컬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올댓 재즈' '셀 블록 탱고' 등의 명곡으로 친숙한 <시카고>다.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재즈가 시카고로 그 무대를 옮기며 밀주, 춤, 무대(댄스)를 만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1930년대 미국과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의 여파로 유흥산업이 몰락하면서 재즈의 인기도 한때 주춤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경제 정책과 금주법 해제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겨우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재즈 역시 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재즈는 기존보다 리듬감이 더욱 강조된 '스윙(Swing)'이라는 장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국내 음악팬들에게 친숙한 '싱싱싱'의 작곡가 루이스 프리마, '스윙의 왕'으로 불렸던 베니 굿맨 등 전설적인 백인 재즈 뮤지션들이 이 당시 등장했다. 흑인 중심이었던 재즈가 백인 유명 뮤지션들의 등장으로 더욱 대중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성장과 더불어 뮤지컬 장르의 인기는 재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역대 뮤지컬 영화중 최고라고 평가받는 '싱잉더레인(1952, 국내 개봉명 '사랑은 비를 타고')'는 1929년 발매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재즈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뮤지컬 영화에 재즈곡들이 활용되면서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즐기는 대중음악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재즈는 어느덧 미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음악으로 성장하게 된다. 미국의 국보급 가수인 루이 암스트롱은 1950년대 미 국무부의 후원으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을 순회하며 '재즈의 세계화'에도 기여한 인물로 꼽힌다. 암스트롱은 1963년에는 한국에도 방문하여 재즈 뮤지션 최로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으며, 이 당시 인연을 맺은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가수 윤복희의 미국 진출을 돕기도 했다.
 
암스트롱은 노장이 된 1960년대에도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비틀스를 제치고 1964년 역대 최고령 빌보드 1위 가수(당시 62세) 기록을 수립하며 건재를 입증했다. 1967년에는 그의 대표곡이자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ost로 삽입된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발표하여 베트남 전쟁의 참상의 미국 사회에 고발하는데도 기여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1999년 '미국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보다 앞서 1987년 미국 의회는 재즈를 '미국의 국보'로 선정하며 그 위상과 기여도를 인정했다.
 
1970년대에 이르면, 흑인 음악에서 출발하여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음악 장르가 등장한다. 바로 힙합(Hip Hop)이다.
 
뉴욕 브롱크스는 한때 빈곤과 범죄로 가득한 미국 최악의 우범지역으로 꼽혔다. 가난으로 인하여 별다른 즐길거리가 없었던 청년들은 거리로 나와 집앞 골목이나 공터에서 모여 음악을 틀어놓는 '블록 파티'를 통하여 자신들의 놀이문화를 구축한 것이 오늘날 힙합 문화의 기원이다. 
 
비교적 현대에 탄생한 힙합은 다른 장르에 비하여 그 기원과 역사가 명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메이카 태생의 DJ였던 쿨 허크는 오늘날 미국 힙합의 아버지로 불린다. 
 
오늘날 힙합 문화를 이루는 4가지 요소로 새로운 디제잉 스타일, 비보잉, 엠씨잉, 그라피티 등이 꼽힌다. 쿨 허크는 레코드판 2개로 같은 구간을 동시에 반주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의 흥이 끊기지않는 디제잉 방식을 창안해냈다. 또한 흥겨운 음악에 맞춰 묘기에 가까운 실력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무대를 더 빛내는 춤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을 지칭하던 브레이크 보이(Break boy)가 오늘날 스트릿 댄서를 일컫는 비보이(B-Boy)의 어원이 됐다.
 
엠씨잉은 디제잉이 중심이던 초기 힙합에서 디제이들이 브레이크 구단에서 청중의 흥을 돋기 위하여 각종 추임새를 넣던 것에서 유래했다, 그라피티는 시설물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하여 낙서처럼 그림이나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에서 유래하여, 오늘날에는 하나의 힙합 문화이자 거리 예술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힙합이 단순히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문화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힙합의 어원은 본래 '엉덩이를 흔들다'는 말장난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상의 구속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청년들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상징한다.
 
1979년 최초의 힙합음반으로 불리우는 슈가힐 갱의 '래퍼스 딜라잇'을 통하여 '힙합'이라는 유행어가 처음으로 가사에 차용됐다. 슈가힐 갱은 힙합 음악 최초의 플래티넘 싱글(판매량 100만장 이상)을 달성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래퍼스 딜라잇의 성공은, 그전까지 녹음된 음원없이 거리에서만 즐기던 즉흥 문화였던 힙합이 상업화로 발돋움하는 본격적인 전환점이 됐다.
 
또한 힙합의 특징으로 사회비판과 저항적인 메시지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웅변과 비슷하게, 사회고발적인 내용을 시로 지어서 리듬감있게 읊는 흑인 문화였던 '포에트리 슬램'은 이후 랩과 힙합문화와 결합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초기에 흥겨운 파티음악 정도로 여겨졌던 힙합은, 그랜드마스터 플래쉬-퓨리어스 파이브의 '더 메시지(1982)'를 통하여 전환점을 맞이한다. 노래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 2등 시민으로 차별받으며 살아가야하는 흑인 빈곤층의 현실을 랩에 담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
 
미국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주목받던 힙합은 1981년 'MTV' 채널의 등장과 함께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현재는 미국을 대표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채널로 자리잡은 MTV는 개국 초기, 힙합 뮤직비디오가 전국에 송출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80년대의 힙합아이콘이었던 RUN D.M.C는 MTV 시대가 배출한 힙합 1세대로 꼽히며, 금목걸이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힙합 패션과 트렌드의 원형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흥겹고 대중화된 동부 힙합과 달리, 서부에서는 더 거칠고 반항적인 '갱스터 랩'이라는 새로운 힙합 장르가 등장한다. 갱스터랩은 미국 LA의 악명높은 슬럼가인 컴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서부 갱스터 랩의 선구자로 꼽히는 N.W.A(Niggaz with attiutude, 성깔있는 깜둥이들)은 아이스 큐브, 닥터 드레 등 훗날 미국 힙합의 아이콘이 되는 거물들을 대거 배출했으며, 심상치 않은 팀명에서 보듯이 대부분이 실제 흑인 빈민가 출신이거나 범죄자-갱스터 출신도 있었다. 1990년대 'LA 흑인 폭동 사건' 등에서 N.W.A는 공격적이고 협박성강한 메시지를 통하여 흑인들의 분노를 랩으로 대변하며 서부 힙합만의 사나운 이미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반동적이고 반체제적인 정서를 조장하는 N.W.A와 갱스터 힙합의 열풍은, 자유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에서 미디어 검열에 나서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FBI(미 연방 수사국)은 N.W.A에게 법 집행관에 대한 폭력과 무례를 조장하고 있다는 경고성 공문을 발송했다. 라디오에서는 갱스터 랩에서 등장하는 욕설과 범죄, 여성비하적인 단어 들이 삭제-금지 조치를 받았다. 미국 음악산업협회는 미성년자에게 부적합하다고 판정되는 음악에 주의 표시를 첨부하는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갱스터 힙합의 인기는 미국 전역으로 꾸준히 퍼져나갔고 흑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세대에 걸쳐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한편으로 힙합의 대중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어두운 이면도 드러났다. 미국 힙합은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어 갈등이 빚어졌다. '디스전'으로 불리우는 힙합 특유의 대결 구도와 동서부간의 갈등은, 결국 끔찍한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미국 동서부를 대표하는 라이벌 힙합 뮤지션으로 악감정이 섞인 디스전을 주고바던 투팍과 B.I.G가 1996-97년간 불과 6개월 사이에 잇딜아 의문의 괴한들에게 총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진실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지금도 미국 음악계의 대표적인 비극이자 힙합씬의 흑역사로 꼽힌다.
 
당시 소속사 대표였던 퍼프 대디가 B.I.G를 추모하며 발표한 곡이 빌보드 11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우리에게도 유명한 'I'll be missing you'다. 그런데 이 노래는 힙합음악의 어두운 관행을 고발하는 또다른 파장을 몰고오는데, 바로 무단 샘플링(기존 음악을 차출하여 새롭게 가공하는 방식)이었다.

더 폴리스의 원곡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샘플링했던 퍼프 대디는 결국 저작권을 원곡자인 스팅의 소유로 합의하는 것으로 겨우 앨범을 발매할 수 있었다. 이는 힙합과 대중음악계의 당시만 해도 부족한 저작권 의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흑인 힙합씬의 비극 이후, 미국 힙합은 에미넴이라는 새로운 괴물 래퍼의 등장과 마주한다. 힙합계에서 흔치 않은 백인 래퍼에 디트로이트 빈민가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였던 에미넴은, '루즈 유어 셀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미국 3천 2백만장, 전세계 2억2천만장에 이르는 엄청난 앨범판매고로 세계 힙합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백인임에도 흑인 음악을 한다고 무시받던 에미넴은, 오늘날 힙합의 본질을 이해하는 진정한 아티스트로 흑인들에게도 인정받는 존재로 거듭났다.
 
해마다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NFL 슈퍼볼 하프타임쇼'는 대중음악 뮤지션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꼽힌다. 2022년 하프타임쇼를 장식한 것은 스눕 독, 닥터 드레, 에미넴 등 힙합 레전드들이었다. 그들은 공연을 마치고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무릎꿇기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힙합음악의 높아진 위상과 함께, 한편으로 아직도 존재하는 차별에 저항해야만 하는 그들의 사회적 메시지가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빈민의 음악으로 출발했던 재즈와 힙합은 오늘날 당당히 미국의 주류 음악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 오늘날의 K팝도 힙합 등 이러한 흑인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 나라에도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H.O.T, 젝스키스 등 미국 힙합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이들은 패션은 물론 반항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성향까지 그대로 흡수하며, 오늘날 다시 세계로 뻗어나가는 K팝과 아이돌 열풍의 기원이 됐다. 음악과 문화가 우리의 삶과 정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서로 주거니 받으니 시대를 뛰어넘어 다시 순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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