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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서의 며칠을 지내고, 저는 라오스로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원래는 치앙마이에서 세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북쪽에 있는 '치앙라이'로 향해볼까 했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라오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빨리 새 나라를 만나고 싶은 설렘이 조금 더 컸다고 할까요.

사실 저는 이상하게도 마음에 드는 여행지에서는 굳이 곳곳을 샅샅이 돌아다니지는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히려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여행지에서만 바쁘게 돌아다니곤 하죠. 언젠가 다시 오게 될 것이 분명하니 아쉬움이 없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고, 실은 다시 올 구실을 남겨두고 싶다는 게 속마음입니다.

아무튼 치앙마이게 저에겐 그랬습니다. 언젠가 다시 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여기서 발걸음을 돌려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치앙마이 뿐 아니라 이번 여행이 전반적으로 그랬습니다. 여행을 오기 전에는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는데, 막상 현지에서는 일정을 더하는 경우보다는 빼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러이로 향하는 2층 버스.
 러이로 향하는 2층 버스.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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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치앙마이에서 라오스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려면, 치앙라이를 거쳐 국경 도시인 치앙콩으로 향해야 합니다. 여기서 국경을 넘으면 라오스 후에싸이에 도착하고, 다시 슬리핑 버스를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 루트는 직접 국경을 넘어야 하니 몇 번 버스를 갈아타야 하고 복잡한 길입니다. 특히 후에싸이부터 루앙프라방에 이르는 길은 도로 사정도 버스 사정도 썩 좋지 않기로 유명하지요.

누워서 가는 슬리핑 버스가 운영되고 있는데, 한 침대에 칸막이도 없이 두 사람이 함께 누워 가는 형태입니다. 이렇게 15시간 이상을 가야 하니, 사실 나홀로 여행객인 저로서는 이 부분이 가장 신경쓰이더군요.

결국 저는 치앙마이에서 태국 중부의 러이(Loei)를 경유해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경로를 택했습니다. 거리상으로는 길을 한참 돌아가야 하지만, 그나마 도로 사정이 좋아 걸리는 시간에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계산해보니 비용도 썩 다르지 않겠더군요. 물론 두 경로 모두 대기시간을 포함해 24시간 전후의 아주 긴 여행이 됩니다.
 
한밤중의 러이 터미널
 한밤중의 러이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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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계획한 일정은 이랬습니다. 저녁 7시 30분차를 타고 치앙마이에서 출발합니다. 러이 터미널에 도착하면 새벽 4-5시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서너 시간을 기다려 아침 8시 차를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면, 저녁 7시 정도에 루앙프라방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막상 치앙마이를 떠나는 날, 터미널에 도착하니 막차인 저녁 7시 30분차가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차는 저녁 5시 차만 딱 한 자리 남았다는군요. 미리 예약을 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닌데, 안일하게도 표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치앙마이에 하루 더 있다가 내일 갈까? 아니면 이 참에 그냥 치앙라이에 들어가 볼까? 순간 여러 고민을 했지만 숙소 예약을 바꾸거나 경로를 수정하는 귀찮음이 컸습니다. 딱 한 자리 남았다니 오래 고민할 여지도 없었고, 그 자리에서 남은 자리를 구매했습니다.

다섯 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자니 정말 생각보다는 늦은 시간에 러이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그래봐야 시간은 두 시 반. 버스를 타기 전까지 차라리 러이에 숙소를 잡아 하룻밤 묵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터미널에서 버티기로 한 밤이니, 그냥 버텨 보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도착이 늦어졌으니 숙소를 잡을 필요는 더욱 없었고요.
 
새벽을 지나며 그나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새벽을 지나며 그나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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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의 터미널에는 터미널을 관리하는 직원 한 명과, 저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몇이 밤을 버티고 있습니다. 불을 환하게 밝힌 새벽의 터미널에는 한기가 돕니다. 휴대폰으로 미리 저장해 둔 영화 한 편을 보며 두 시간 정도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다섯 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니, 그래도 사람들이 조금씩 더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 새벽에도 방콕을 비롯한 각지에서 한 시간에 한두 대 정도는 버스가 들어오더군요. 다섯 시를 넘어가도 어둠은 전혀 걷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터미널은 북적이고 있습니다. 이 새벽에 움직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말이죠.

커다란 짐을 몇 개나 안고 있는 아주머니와 오토바이를 타고 온 아저씨, 교복을 입은 학생과 승복을 입은 스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터미널에 서서히 모이는 광경을 구경했습니다. 어느새 여섯 시가 넘었고,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버스표를 파는 창구가 문을 열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다행히 표는 아주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표를 끊고도 두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출발 시간이 됩니다.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터미널에 앉아 있자니 그제야 조금씩 하늘이 밝아옵니다. 서서히 밝아오는 주변은 어느새 환해지고, 눈치채지 못하는 새 아침이 옵니다. 꼭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한숨도 자지 않고 하룻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그렇게 맞는 아침 해란 얼마나 놀라운 감각이던지요.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매표소가 문을 열었다.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매표소가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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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덕분에 태국의 한밤과 새벽을 한 눈에 담은 셈이 되었습니다. 역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가 뜨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국과 잠시 이별하는 날, 이 땅의 새벽을 볼 수 있어 좋았다고요.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요.

하지만 러이에서 루앙프라방까지는 아직 10시간이 넘는 여정이 남았습니다. 원래는 버스로 움직이는 노선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람이 적어서인지 중형 승합차로 이동하더군요. 승무원까지 포함해 열 명 남짓이 탄 버스에 태국인이나 라오스인이 아닌 외국인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매번 서양인만 가득한 버스를 타다가 이런 버스를 타니 생경하더군요.

러이에서 한 시간여를 달려 태국과 라오스의 국경 지대에 도착합니다. 국경에는 사람이 없어, 일행 열 명이 국경을 넘는 데 2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마저도 외국인인 저만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입국심사관이 무비자 일수를 확인하느라 걸린 시간이 5분 정도를 차지했습니다.
 
루앙프라방에 도착해 만난 석양 아래의 야시장.
 루앙프라방에 도착해 만난 석양 아래의 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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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국경을 넘으니 풍경은 분명 달라지더군요. 일단 도로 사정부터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곳곳이 패여 있어 차는 속도를 낼 수 없었고, 동물들이 차도를 막아서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제게 라오스에 왔다는 감각은 덜컹이는 도로였습니다. 루앙프라방에 가까워지니 도로 사정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요.

잠시 휴게소에 들려 식사를 했고, 승합차는 몇 군데나 정류장에 들려 사람을 태우고 내립니다. 밤을 새고 나니 피곤해, 덜컹이는 차에서도 어느새 잠에 들었습니다. 긴 여행을 잠으로 때울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루앙프라방에 도착할 즈음에는 러이에서 처음부터 탑승한 승객은 저를 제외하고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더군요.

루앙프라방에 도착한 시간은 생각보다 일렀습니다. 구불거리는 길을 승합차가 버스보다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걸까요. 구글 지도에서는 이동 시간만 10시간이 걸릴 거라고 나왔는데, 국경을 넘고 정류장에 몇 번이나 정차했지만 도착은 오후 5시 30분. 9시간 30분 동안 버스를 탄 셈입니다. 치앙마이에서 오후 5시 버스를 탔으니, 대기시간을 포함해 24시간 30분이 걸린 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루앙프라방에는 석양이 지고 있었습니다. 새벽으로 태국과 작별했는데, 석양으로 또 새로운 도시와 만났습니다. 정류장 앞에 있던 툭툭 한 대를 타고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치앙마이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도 터미널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니, 약 30시간 만에 자리에 누웠습니다.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새로운 도시에 닿기까지 참 긴 여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어지는 도시와 만나는 도시의 사이에서, 저는 오늘도 언제까지일지 모를 여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러 새벽과, 또 여러 노을을 새로운 도시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태국, #라오스, #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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