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6 16:34최종 업데이트 23.02.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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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다 진지충을 미워하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우린 진지함을 재미없음으로 여기게 됐고, 재미없는 순간을 '불필요한 순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정말 재미있고 필요한 순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고백하건대 난 '진지충'이다. 긴 글을 쓰는 설명충이자 장문충이고 (이 지면에 쓰는 글에서도 언제나 '길고 지루하다'는 댓글을 받고 있다) 웃자고 던진 농담에 '그건 그렇게 웃으며 넘길 주제는 아니'라고 대꾸해 '갑분싸'를 만드는 이른바 '불편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마 이 글도 매우 길고 지루하고 진지할 예정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이 글의 댓글에도 '이렇게 길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는 네 일기장에나 쓰라'는 댓글이 달릴 것이고, 스크롤의 압박에 못 이겨 글의 중간쯤에서 읽기를 포기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부탁건대 한번쯤은 부디 길고 긴 글을, 진지하고 지루한 글을, 그다지 동의하기 어렵고 한 번에 읽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생각하는 사람 ⓒ pixabay

 
재미밖엔 없는

'재미'라는 것이 무엇일까. '재미'의 사전적 의미는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이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재미있는 농담을 곁들인 여상스러운 대화, 빠르고 통쾌하고 즉자적인 이야기의 영화와 소설 같은 것.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을 누리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 재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재미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역전시키면 "거창하고 심각하여 고통스러운 기분이나 느낌"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이런 기분과 느낌을 '진지함'으로 부르고 있는 것 같다.

농담기 하나 없이 문어체로 나누는 진지한 토론, 느리고 불편한 데다 각자의 입장과 욕망이 교차하여 대자적인 영화와 소설들.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해답을 구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답답하기까지 한 상황의 기분을 진지함이라고 한다면 누가 진지함을 바라고 기꺼워할까. 어쩌면 인간의 본성은 재미를 추구하고 진지함에서 멀어지려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진지하고 긴 글을 써놓고 '소소한 재미'를 주어서 '짤림을 방지'하던 짤방은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다 '밈'으로 불리는 일종의 문화로 상승했다. 이미지의 즉각적인 소비를 통해 재미를 유발하고 이내 휘발하는 '밈'은 대부분의 경우 그 자체로서 함의를 갖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를 통한 맥락을 구축하고 사유를 끌어내지 않는다.

'밈'으로 대표할 수 있는 최근의 즉자적인 소통 방식의 일반화는 결국 컨텍스트의 실종을 야기한다. '컨텍스트가 없는 언어와 행태'를 '문화'(여기에서의 문화는 매체에서 소비되는 문화상품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사유와 맥락이 거세된 채 순간의 '재미'만을 좇는 사회적 태도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재미마저 없는

재미의 의미가 아기자기한 즐거움이라면 우리 사회는 재미라도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놀리거나 괴롭히면서 낄낄대는 태도 혹은 휘발되어 버리는 감각을 위해 매 순간 계속해서 새로운 쾌감만을 만들어내기 위해 개인적·사회적 자본을 소비하여 '쾌감의 상품'만을 만들어내는 일은 즐거움일까. 사유와 맥락을 거세한 채 순간의 감각적 쾌감을 지향하는 것, 순간의 쾌감을 정말 즐거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흔히 '쾌락주의'로 해석되는 에피쿠로스는 즐거움의 의미를 몸에 괴로움이 없고 영혼의 동요가 없는 상태라고 규정했다. 과도한 감각적 쾌감이란 오히려 즐거움과 쾌락을 저해하는 일이라고 했다.

1시간 30분이 지나면 잊히는 영화, 아무런 함의도 목적도 사유도 없는 소설, 일상 잡담을 벗어나지 않는 대화, 모든 불편함을 외면하는 삶의 태도를 우리는 즐거움이라고, 재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단지 재미만을 좇는 사회적 태도에서 우리는 하다못해 '재미'라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낄낄거림이 휘발된 이후엔 무엇이 남을까

감각적 쾌감과 재미를 혼동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문화적 태도가 빚어진 이후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남을 괴롭히고 놀리는' 일이다.

몇 년 전 개그콘서트가 종영한 이후 몇몇 개그맨들은 '개그를 개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편한 사람들이 개콘을 종영시킨 셈'이라고 말했다. 못생긴 여성을 놀리고, 뚱뚱한 사람을 괴롭히고, 장애인과 유색인종을 비하하는 일을 불편해하지 않고 순간의 쾌감만을 즐기지 못하는 일을 '쓸데없는 불편함'으로 여기는 말이다. 골치아프고 심각한 주제를 뒤틀고 비꼬아 웃음을 주는 위트나 해학 같은 말은 마치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최근엔 SNL에서 MZ세대를 놀리는 놀이가 유행이다. 에어팟을 끼고 일하는 아이들, 문해력이 부족한 어린것들, 사회 생활도 할 줄 모르는 부적응자들로 묘사하며 그저 그들을 놀리는 데 집중하며 그것을 '재미'라고 말한다. 그 어디에도 어느 세대의 태도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고민한 흔적도, 그들을 놀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여 갈등의 골을 좁혀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미 '그들'이라고 대상화해놓은 '타깃'을 실컷 놀리다 나 같은 불편러들의 목소리가 조금 커지면 '불편러들 때문에 농담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또 새로운 놀림거리를 찾아 떠나면 그뿐이다.
 

쿠팡플레이의 코너 'MZ 오피스'의 한 장면. 에어팟을 착용하고 일하는 MZ 신입사원 ⓒ 쿠팡플레이 유튜브

 
이런 태도는 실은 개그 프로그램에서뿐 아니라 일상에도, 나아가서는 (이미 상당히 엔터테인먼트가 된) 정치의 영역에서도 드러난다. 이른바 '밈'으로 하는 정치랄까. 정치적 사안들의 맥락과 각 정치 주체들의 교차하는 욕망이나 지향, 또 나의 다양하고 복잡한 정체성과 계급성 같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며 진지해지기보다는 단순하고 편안하게 적과 아를 나누고 적을 놀리고 조롱하며 순간의 쾌감을 좇는 태도. 마치 FPS 게임(1인칭 슈팅 게임)에서 적을 사냥하듯, 스릴러 영화의 범인을 색출하듯, 판타지 웹소설에서 대마왕을 잡아내듯.

그래서 재미를 좇는다고 표현하지만 실체는 사유를 거세한 세계에서 정치의 첫 번째는 '우리 편'을 정하는 일이다. 우리 편에 대한 맹목적인 추앙과 의리를 지켜가는 일, 적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자비한 증오와 혐오를 퍼붓는 일을 '재미를 좇는다고 표현하지만 실체는 사유를 거세한 세계'에선 '정치'라고 부른다.

윤석열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신체적 특징이나 습관을 조롱하고 그의 배우자의 과거 직업을 꾸며내 공격하고(심지어 이건 대단히 본질적으로 여성혐오이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공공의 적인 '여성'을 공격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임 용어로 하면 일종의 스플래시 데미지 - 무기를 맞힌 지점을 비롯해 그 주변의 일정한 범위 내에 입히는 피해 -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일 수도) 갖은 음모론과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확대 재생산을 하는 사이비종교 교주 같은 이를 언론인이라 추켜세우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어느 쪽에선 윤석열을 지키기 위해, 때론 박근혜를 지키기 위해, 어느 때는 자유대한을 지키겠다며 마찬가지의 일을 한다. 육백 톤의 금괴를 운운하거나 논두렁 시계를 운운하기도 하고. 때아닌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거기에 부화뇌동하여 광화문 거리에서 가스통에 불을 붙이기도 한다.

두 집단의 '광기'는 사유도 맥락도 합리와 이성도 거세됐기 때문에 순간의 즉자적인 쾌감을 보장한다. 유튜브에 수없이 퍼져있는 윤석열 대통령을 놀리는 영상들을 보고 낄낄거리거나 카카오톡 단톡방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간첩 이야기에 혀를 차며 비분강개하는 이들에겐.

그러나 그 비분강개와 낄낄거림이 휘발된 이후엔 무엇이 남을까. 그것을 재미 혹은 즐거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휘발된 쾌감이 사라진 자리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더 크고 자극적이고 생각은 더 안 해도 되는 쾌감이 아니고서야.

그 쾌감의 재료들을 만드는 이들은 서로 서로 재료가 되어주고 있다. 그 비합리와 무지성의 카르텔이 구축해온 이 세계에서 그 순간에 휘발될 쾌감을 좇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윤석열이 뒤뚱뒤뚱 걷는다고 낄낄거리는 일과 조민이 성형수술을 한 것 같다고 수군거리는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큰 문제는 어느새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사유하지도 맥락을 파악하지도 합리와 이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건 너무 진지한 고민인데다 재미도 없고 이해하려면 너무 긴 글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지한 것은 재미없으며, 재미없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여겨 온 우린 어느 순간부터 분명 400자 이상의 글을 읽을 때마다 괴롭다.

당신의 재미

재미의 사전적 의미엔 다른 의미가 또 있다. "좋은 성과나 보람". 또 다른 의미에서 재미있는 삶이란 성과와 보람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당신의 재미를 찾는 일이란 누굴 놀리는 순간의 쾌감을 좇느라 당신의 삶과 정치, 일상에서의 진지함을 간과하는 것보다는 당신의 삶과 정치와 일상을 더욱 보람되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찾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주장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기서 삶의 보람과 성과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3분 순삭을 위해 편집하고 잘라내는 자투리들에 실은 진실이 담길 수 있고, 400자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더 진지하고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삶의 비밀 같은 게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뎌야 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그 연결을 직시하고 그 연결과 교차가 가져오는 사연 한올 한올을 목격하는 것으로 성과와 보람이 만들어지고 세계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통스러운 일이겠다. 그렇다고 고통스러운 일이 왜 꼭 재미가 없는 일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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