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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마니, 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겨울 방학 마치고 출근해 보니. 백석 시집. 아, 빌려줬었지.... 깜빡 잊고 있었다. 생경하면서도 정겨운 시어들이 맴돈다. 이미 두어 번 읽은 시집이지만 스르르 손이 뻗어진다. 말 그대로다. 내가 손을 뻗었다기보다는 내 손이 저절로 뻗어진 느낌.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중략)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시 '여우난골족' 일부
 
제목은 '여우가 나오는 골짜기에 사는 족속'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 전문을 얼핏 보면 시라기보다는 산문에 가깝다. 행과 연을 구분하여 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을 뿐이다. 허나, 가만가만 나직이 읽어 보라. 리듬이 살아나고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오!'라는 소리가 절로, 나즈막이 나온다.

졸랑졸랑 뒤따르는 강아지 앞에서 할머니 댁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친척 아이들과 명절 음식도 함께 먹고 재미나는 놀이를 밤늦도록 실컷 한 다음, 콜콜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아주 오래 전 잊어버린 풍경이다.
 
내일 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 시 '고야(古夜)' 일부
 
'고야'의 4연이다. 역시 시보다는 산문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나직나직 읽으면 시의 맛이 오롯이 씹힌다. 따뜻한 풍경에 가슴이 훈훈해진다. 일가집 할머니가 명절 전날 찾아와서 여러 종류의 맛난 송편을 빚는다. 아이 엄마가 아픈가? 아니면 송편 빚는 솜씨가 별로인가? 시 전문을 읽어 보아도 일가집 할머니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상상할 수밖에. 시를 읽는 맛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송편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또 시 속의 아이가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한 걸 읽으며 그렇지, 그렇지 송편에는 뭐니 뭐니해도 콩가루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입맛이 똑같은 인물에 자연스레 감정이입하면서 시가 한층 가깝게 다가온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 시 '모닥불' 일부

'모닥불'의 1연인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에 탈 수 있는 물건들을 주욱 나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산문적이다. 조그맣게 소리 내어 읽어 보자. '도'라는 낱말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시적 운율을 만들어 낸다. 읽는 맛이 생겨난다. 이런 게 백석 아니겠는가. 아무나 흉내 내지는 못한다.

2연에서는 모닥불을 쪼이는 사람들을 1연과 같은 방법으로 늘어놓고는, 3연에서는 갑자기 모닥불에 자기 할아버지의 슬픈 역사가 있다며 시를 마무리한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타고 있는 모닥불을 보며 왜 갑자기 할아버지의 슬픈 역사를 떠올렸을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논리로만 받아들이려 하지 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여러 번 읽어 보자. 운율에 집중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읽다 보면, 문득 모닥불 속에서 자신과 관련 있는 슬픈 이야기가 타박타박 걸어 나올지도 모른다.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 시 '선우사(膳友辭)' 일부
 
시 '선우사'의 1연과 2연이다. 선우사는 반찬 친구 이야기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에 비해서는 시적인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하지만 산문적이다. 백석 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시의 화자는 정말로 너무나 쓸쓸하고 너무도 외로워 보인다. 절대 고독의 경지에 처해 있는 듯하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으면 흰밥과 반찬으로 만든 가재미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오죽 미덥고 정답고 좋은 대상을 찾을 수 없었기에 흰밥과 가재미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쓸쓸하다고, 외롭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보다 이렇게 조용히 읊조리는 것이 훨씬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백석 시집을 다시 읽고 내가 좋아하는 다섯 편의 시에 대한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적어 보았다. 어떤 거창한 문학 이론이나 평론 이론에 바탕한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한 지식이 없다. 시를 읽으며 떠오는 가벼운 생각들을 툭툭 적었다. 이것도 시를 읽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각박하고 복잡한 세상이다. 위에 소개한 다섯 편 시의 전문을 찾아, 가만가만 읽어 보자.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어 볼 수 있다.

정본 백석 시집 - 개정판

백석 (지은이), 고형진 (엮은이), 문학동네(2020)


태그:#백석,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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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교사로 재직 중. 2년을 제외하고 고등학교에서 근무.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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