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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를 따라 피어난 꽃양귀비가 잘 다녀오라 어서오라 인사한다.
▲ 화순역 선로를 따라 피어난 꽃양귀비가 잘 다녀오라 어서오라 인사한다.
ⓒ 김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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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금요일 밤은 화사하게 지내고 싶다. 하지만 마음뿐, 연식이 더해갈수록 초라해지기만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런 밤은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열정 없는 밤을 보내고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머릿속은 온통 안개다. 창을 열었다. 입하가 지났지만 새벽 공기가 서늘하다. 올려다본 하늘이 시퍼렇다. 너무 맑아 눈이 시리다.

청아한 하늘 아래 맞이하는 주말, 훌쩍 떠나고 싶다. 그렇지 않곤 답답함이 꽤 오래갈 듯싶다. 그때 왜 기차가 떠올랐는지, 아마도 푸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던 게 아닐까. 

5월 13일 오전 11시 5분, 화순역에서 순천 가는 경전선 열차를 탔다. 두 칸 달린 무궁화호다. 손님이 없어 얼마 안 가 없어질 거라고 들었는데, 빈자리가 없다. 역무원에게 물으니 주말과 순천국제정원박람회가 겹쳐서 그렇단다. 어쨌든 왁자지껄함이 좋다. 여행 아닌가.

기차는 느리게 나아갔다. 능주역을 이양역을 명봉역을 지난다. 이제는 간이역이 되어버렸지만 저마다의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데이지가 맑게 손짓하기도, 꽃양귀비가 화려하게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아름다움으로 쓸쓸함으로 때론 아련함으로. 6100원으로 산 10개의 그림이랄까, 선물이랄까.

보성역을 지나니 남녘의 뜰이 넓게 펼쳐진다. 여름 초입 들녘이 노랗다. 보리가 익어가는 들판이 어머니 품속처럼 편안하다. 그곳을 삑삑 기적소리 울리며 덜컹덜컹 흔들리며 지나간다. 옛 시절 보리밥이 꿈결처럼 흘렀다. 득량을 예당을 조성을 벌교를 지난다.

도망치듯 도착한 순천역, 이대로 좋았다
 
순천역 광장, 아담하다. 적당하게 자란 느티나무와 벤치가 발길을 잡는다.
▲ 순천역 순천역 광장, 아담하다. 적당하게 자란 느티나무와 벤치가 발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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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역에 도착했다. 경전선과 전라선과 지나고, 완행열차와 고속열차가 만난다. 제법 크고 복잡하다. 역 광장은 아담했다. 적당하게 자란 느티나무와 벤치가 발길을 잡는다.

아침 하늘에 반해 즉흥적으로 떠나온 여행이다. 딱히 바쁠 일도 꼭 해야 할 일도 없다. 벤치에 앉았다. 공기는 적당하게 부드럽고 포근했다. 이대로 좋았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가 스쳤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라는 소제목이었다.
 
"일상과 가족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피로로부터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도 있다. 살아 가면서 만나는 풀리지 않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오래된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이다.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왔다.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여행이 그에 맞설 힘을 부여해 줄 때가 있다. 집안 벽지의 오래된 얼룩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
 
순천역 광장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아침을 생각했다. 많이 지쳐있었나 보다. 새벽의 푸른 하늘은 나에게 도망치기를 권했었고.

사람 구경 실컷했다. 재잘거리며 지나는 아이들의 상큼한 지저귐에 가슴이 울렁였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던 그 발걸음이 살아난다. 국제정원박람회장가는 버스에 올랐다.
 
뒤쪽 중앙이 찰스쟁스가 디자인했다는 동산이다.
▲ 순천국제정원박람회 뒤쪽 중앙이 찰스쟁스가 디자인했다는 동산이다.
ⓒ 김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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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중앙 언덕을 오른다. 소라껍데기 닮은 길을 걷는 모습이 순례자 같다.
▲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호수 중앙 언덕을 오른다. 소라껍데기 닮은 길을 걷는 모습이 순례자 같다.
ⓒ 김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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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은 전부 이곳에 모였나 보다. 사람, 사람, 사람천지다. 내가 나를 잃어버릴까 싶어 오른손 왼손을 힘껏 잡아도 봤다. 입장료 1만5000원, 조금 사악하다는 기분도 든다. 잠시지만 그냥 돌아갈까, 소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나긴 기다림도 설렘이었다. 경계를 넘는 순간 맞이한 첫 느낌은 이것이었다. 돈값 하네. 그림책을 보며,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으로 그려왔던 풍경이다.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경관 건축가 찰스쟁스가 디자인했다는 호수 중앙의 동산에 오른다. 성서에서 말한 바벨탑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소라 껍데기 닮은 길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길, 기나긴 대열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정상에 서니 가슴이 뻥, 터진다. 물과 잔디와 꽃과 사람이 한없다. 눈부신 5월의 햇살 아래서 반짝인다.
 
데이지 꽃 언덕
▲ 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데이지 꽃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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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그늘 아래 벤치가 열 지어 있다.
▲ 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그늘 아래 벤치가 열 지어 있다.
ⓒ 김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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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은 목련꽃 그늘에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었다는데 나는 메타세쿼이아 그늘에서 마님에게 엽서를 썼다. 장미 향을 동무 삼아 마가렛 꽃 언덕을 거닐어도 보았다. 거리의 공연에서 헤벌쭉 웃다가, 가든 쇼 부스에서 심각해지기도 하고.

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관람차가, 하늘로 난 길을 따라 갈대밭까지 데려다주는 스카이 큐브가, 마음까지 녹여주는 족욕이 주머니를 열라 한다. 순천을 판다는 기념품에서 로컬 푸드까지 유혹은 끈질겼다. 그날 그 자리에서 알뜰하게 주었다. 내가 무슨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러하지 못했는데, 더 주고 싶다는 생각은 왜 드는지.

아쉬움은 남겨 두기로 했다
 
밤 8시 30분 화순역, 광주 가는 경전선 하행선 무궁화호 열차다.
▲ 무궁화호 밤 8시 30분 화순역, 광주 가는 경전선 하행선 무궁화호 열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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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쪽 산에 많이 가까워졌다. 아직 못 가 본 곳이 더 많다. 더 부지런하게 다닐걸.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갈 시간이다. 아쉬움은 남겨 두기로 했다. 시월 말까지 계속된다는데, 가을 햇살이 깊어 질 때 갈대가 더 멋지다는데... 

다시 무궁화호 열차,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빈 자리가 제법 많다. 몇은 졸고 몇은 차창에 눈길을 주고. 조금 남은 해가 들판 너머로 사라졌다. 노란 들녘에 어둠이 내렸다. 벽지 닮은 마음속 오래된 얼룩은 얼마나 지워졌으려나, 내일 아침은 또다시 일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확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 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태그:#화순매일신문, #23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화순역, #순천역,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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