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누구에게나 살면서 꼭 만나야만 할, 혹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은 휴전 이후로도 한반도에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라는 상흔을 남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이후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하여 벌였던 치열하고 안타까운 여정은 지금 우리에게도 평화와 공존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운다.
 
6월 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우리는 만나야 한다'라는 편을 통하여, 전 세계가 주목했던 한 역사적 만남과 한반도의 비극인 이산가족 이야기를 조명했다.
 
1971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동계 프레올림픽. 국내외 언론에서는 당시 14세로 대회 최연소 출전선수였던 대한민국 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영희와, 27세로 대회 최고령 선수였던 북한 한필화의 만남이 큰 이슈가 됐다.
 
한필화는 8년 전인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며 '아시아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된 북한의 전설이었다. 북한은 동계올림픽에서 역대 단 2개의 메달만을 수상했고 이 중 최고성적이자 유일한 은메달의 주인공이 바로 한필화였다. 그녀의 북한에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영희의 어머니는 한계화씨로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오늘날의 스케이팅에 해당하는 '빙활' 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었다. 한계화는 18세였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2월에 흥남철수작전을 통하여 가족들과 생이별하여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딸인 김영희를 스케이팅 선수로 키운 것도 어머니 한계화의 영향이었다.
 
그런데 계화씨는 1964년 우연히 신문에서 한필화의 올림픽 메달 획득 소식을 접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한계화의 친동생 이름이 바로 한필화였고 동생에게 스케이팅을 가르친 스승이 바로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계화씨는 한필화의 이름과 스케이팅 선수라는 것을 보고 그녀가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동생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렇다면 김영희에게는 한필화가 바로 이모가 되는 것.
 
계화씨는 1972년 프레올림픽에 김영희가 출전하게 되면서 동생과 딸의 만남을 간절히 고대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김영희-한필화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만남 여부가 엄청난 관심을 불러모았다. 하지만 당시 북한 관계자들의 삼엄한 감시로 인하여 김영희는 먼 발치에서 한계화를 보고도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돌연 "본인이 한필화의 진짜 오빠"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것. 그는 '한필성'이라는 남자로 서울에서 TV 판매상을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북한 진남포 출신의 한필성씨는 1.4 후퇴 때 어머니가 쥐어준 미숫가루 한 포대만 들고 피란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다.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을 그리워했던 필성씨에게도 공교롭게 한필화라는 이름의 막내동생이 있었다. 심지어 고향에서 스케이팅 선수 경력이 있다는 것도 한필성과 한계화의 공통점이었다. 당시는 한계화가 한필화의 자매라는 언론보도가 먼저 나온 뒤라 본인이 잠시 착각했다고 생각했던 필성씨는, 이어진 고향친구들의 제보와 한필화의 최근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고나서는 결국 "그녀가 자신의 친동생이 맞다"고 확신하게 됐다.
 
한계화와 한필성, 두 사람이 모두 한필화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희대의 '동생 쟁탈전'에 세계의 시선이 몰렸다. 심지어 국내에서는 '과연 누가 진짜 한필화의 혈육인지' 거액을 걸고 내기를 거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필화의 공식 프로필을 통하여 드러난 나이, 고향, 가족관계 등에서는 한계화-한필성씨가 주장한 내용들과 각각 맞는 부분과 어긋난 부분이 혼재되어 있어서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했다.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필화 본인이 직접 확인해주는 것 뿐이었다.
 
결국 한필화 선수가 드디어 기자회견을 자처하며 입을 열었다. 한필화는 "아무래도 한필성이 자신이 오빠 같다"면서 "본인과 오빠가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한계화는 잠시 크게 실망했지만, 가족을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내 두 사람의 만남을 진심으로 응원해줬다.
 
일본 신문사의 주선으로 한필화와 한필성은 21년 만의 전화 통화를 하게됐다. 수화기를 통한 35분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목소리만 듣고도 '진짜 남매'임을 직감했다. 필화씨는 그동안 전쟁통에 죽은줄로만 알았던 오빠가 살아있다는데 감격했고, 남매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고 재회를 기약했다.
 
당시는 1970년대로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으로 남북한의 대립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남북측은 이례적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이 몰린 한씨 남매의 상봉을 '제 3국에서의 만남'을 조건으로 일단 허락했다. 필성씨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1971년 3월 21일 오전 9시, 필성씨는 약속시간보다 10분 먼저 약속 장소인 호텔에서 도착했다. 동생 한필화씨가 머물던 호텔과는 불과 5분 거리였다. 현장에는 많은 취재진들도 대기하며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고대했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되어도 한필화를 비롯하여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북한 선수단이 공항으로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원인은 남북 양측의 신경전이었다. 북한은 체육영웅인 한필화의 강제 망명을, 한국은 한필성의 납북을 우려하여 각자 장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상대가 먼저 찾아와야한다는 조건을 요구했다. 양측 모두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기싸움을 벌였다. 한필성-한필화 남매가 각기 머물던 숙소는 바로 인근이었지만 남매는 코앞에서도 끝내 서로를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했다. 21년의 긴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5분의 거리를 끝내 좁히지 못한 분단의 현실이었다.
 
필성씨는 슬픔과 실망감에 오열을 참지 못했다. 필화씨 역시 비행기에 오르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당황한 북한 수행원들이 재빨리 그녀를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었다고 한다. 필성씨는 이후 1999년 인터뷰에서 "서둘러서 갔는데 북한이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정말로 분했다. 돌아올 때 눈물이 흘렀다"며 안타까웠던 순간을 회상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이후로 다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7.4 남북 공동 성명과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 등 남과 북 사이에는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한필성씨도 어느덧 50대가 되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1990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반가운 소식이 필성씨에게 전해진다. 동생 한필화가 북한 측 임원 신분으로 아시안게임을 위하여 방일할 것이라는 뉴스였다. 19년 만에 다시 찾아온 재회의 기회였다. 필성씨는 이번에는 동생을 꼭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필화씨 역시 오빠와의 재회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자 "혈육의 정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야말로 꼭 오빠를 만날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국내외 언론도 남매의 사연을 다시 주목했다. 한 방송사의 주선으로 19년 만에 다시 남매의 두 번째 전화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필화씨는 어머니의 안부를 전하며 "어머니께 선물을 하고 싶으면 어머니가 입으실 수의를 준비해 달라. 어머니가 오빠의 수의를 입고 관에라도 들어가게끔"이라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에 당황한 필성씨는 "그런 말 하지 마. 보고 싶어 죽겠는데 왜 그런 말을 하냐"라며 울컥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필화씨는 "이번에는 누구의 간섭없이 우리끼리 만나자"고 재차 다짐했다.
 
사실 1990년 당시에도 남북한의 긴장된 관계는 여전했다. 필성씨는 또다시 상봉이 무산될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얼마 후 남북측은 "이번에는 절대 남매의 만남에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필성은 3월 8일 동생을 만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일본 삿포로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의 돌발 소식이 전해졌다. 필화씨가 오빠를 만나기 위하여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왔다는 것. 현장에서는 이미 수많은 취재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공항에서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에 둘러싸여 당황하고 있던 필성씨의 귓가에 아련히 "오빠, 오빠"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바로 필화씨였다.
 
한걸음에 필성씨에게 달려온 필화씨는 오빠를 껴안으며 "왜 이제야 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빠를 보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했어요"라고 울부짖었다. 두 남매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각각 16살과 8살 때 헤어졌던 남매가, 무려 40년의 시간을 넘어 이루어진 극적인 상봉이었다.
 
두 남매는 아시안게임 기간동안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필성씨는 낮에는 경기장을 찾아 동생을 응원하며 손을 흔들었고, 밤에는 숙소에서 만나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필성씨는 어머니를 위하여 특별히 준비한 수의를 선물했다. 필화씨로부터 수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오해하여 화를 냈던 필성씨지만, 나중에 지인들로부터 '수의를 준비하면 장수한다'는 속설을 뒤늦게 전해듣고 나서는, 어머니가 오래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상스럽게 수의를 준비했던 것.
 
동생 필화씨는 오빠에게 그 어떤 것보다 감동적인 선물을 선사했다. 이는 바로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필성씨는 연신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감격했다. 필성씨는 "평양에 갈테니 몸 건강히 계시라"고 당부했고, 어머니는 "난 여기서 걱정없다. 내 걱정은 하나도 하지마라. 그저 너 하나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통일이 되면 꼭 돌아와야 한다"고 오직 자식만을 걱정하는 애틋한 모정을 드러냈다.
 
시간은 흐르고, 두 남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다시 다가왔다. 남매는 헤어지기 전날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며 눈물을 흘렸다. 남매는 공항에서 마지막 사진촬영을 한 뒤 이별하면서 애써 눈물을 감추고 덤덤하게 손을 흔들어야 했다. 필성 씨는 한국에서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가슴 속에 더 큰 구멍이 뜷린 것 같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고 캄캄하다"며 한동안 후유증을 호소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그 순간 또 하나의 선물같은 기적이 찾아왔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를 취재하기 위하여 방북한 대한민국 취재진이 한필화씨의 집을 방문하여 모친 최원화씨를 함께 인터뷰한 것. 필성씨는 꿈에 그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화면을 통해서나마 만날 수 있었다. 최원화씨는 취재진에게 "아들을 좀 데려올 수는 없나? 내가 가지는 못하니까"라고 미소를 지으며 아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그날 이후 필성씨는 "돌아가기 전에 어머니를 꼭 만나야겠다"는 꿈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다. 필성씨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분단의 현실이 만든 벽은 너무나 높고 견고했다.

모자의 만남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고 몇 년 뒤 최원화씨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필성씨는 "어머니가 사망하고 다음날에 꿈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필성씨는 평생 괴로워했다.
 
그리고 2013년, 고향을 그리워하던 필성씨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뒤늦게야 비로소 그리운 어머니 곁으로 갈 수 있게 됐다. 동생 필화씨는 아직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5년 일본 방송사와의 영상 인터뷰에 출연했던 필화씨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 혈육은 혈육이다. 오빠와 다시 만났을 때의 인상을 잊을 수가 없다"고 회상하며 "통일이 되어 오빠와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는데 이제 오빠는 없고 조카들밖에 없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어느덧 7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남북은 여전히 분단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며 이산가족 상봉도 멈췄다. 국내에 생존한 이산가족 1세대는 이제 3만 명도 남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관계는 때로는 냉랭했고 때로는 잠시 훈풍이 불기도 했지만, 그 비극의 줄다리기 속에서 가장 고통받아야 했던 것은 죄없이 혈육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산가족들이었다. 정치와 이념은 달라도 사람과 가족의 정을 갈라놓을 수는 없다. 우리가 결코 잊지말아야 할 한반도의 비극이 남긴 역사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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