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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후쿠시마의 아이'였던 한 소녀가 던진 이 질문을 기억합니다. 12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그 소녀는 엄마가 되어 있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사는 ‘그들’은 안녕할까요? ‘그들’의 삶, 일상, 활동과 목소리를 따라 ‘우리’로 얽힌 사람들, 그 인연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연결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원불교환경연대 탈핵기록단이 한 달에 한 번, ‘그들’과 ‘이웃’을 만나러 갑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는 말들을 곱씹다 보면 어느 지역의 문제, 그들만의 문제라고 덮어두지는 못할 겁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잠깐만 내주세요.[기자말]
2편 <깍두기들 쫙 깔린 데서 "이 주민설명회는 무효">(https://omn.kr/24z0y)에서 이어집니다.

84.9%의 승리

두 번의 핵시설을 막아낸 삼척 시민들은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삼척시의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반핵 민주 시민후보'로 출마한 이광우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을 선택했다. 삼척 시민들의 반핵에 대한 민도가 높다는 증거였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지망생들이 핵반투위를 찾아왔어요. 무소속 김양호 시장 후보는 물론이고 시·도 의원 후보들이 노란 조끼를 입고 지지를 호소했어요. 국회의원 선거 때는 당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이철규 국회의원도 반핵을 공약으로 내세울 테니 밀어달라고 했어요. 나는 반대했지만 핵반투위가 선거운동을 도왔고 당선 후 곧바로 새누리당에 복당해서 지금은 석탄발전소를 반대하는 삼척 시민들 반대편에 있어요. 뒤통수 제대로 맞은 거죠."

2014년 지방선거에서 '원전 백지화'를 내세운 김양호 후보가 원전 유치 신청한 전임 시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당선 후 김양호 시장은 중앙정부가 삼척 원전 백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민투표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원전 확대를 추진하던 박근혜 정권은 '주민투표 불가'로 맞섰다.

삼척시는 주민투표법과 무관하게 자체 주민투표를 하기로 하고, '삼척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2014년 10월 9일 실시된 주민투표에서는 67.9%의 투표율에 투표자의 84.9%가 반대표를 던졌다. 주민 투표 성립 요건을 훌쩍 뛰어넘은 시민들이 투표에 참여했고 84.9%가 압도적으로 핵발전소 유치를 반대했다.

삼척시와 시민들은 '핵발전소 유치 백지화'가 삼척 시민들의 의사임을 분명하게 밝혔지만, 박근혜 정권은 2016년 주민투표관리위원회가 주민투표자금 모금한 것을 두고 기부금품모집법 위반으로, 2018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로 김양호 삼척시장을 기소했다. 삼척시장이 직권을 남용해서 공무원과 이장, 통장들에게 지시하여 주민투표 실무를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이 기소의 요지였다.

그러나 1·2심 법원은 삼척시장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확정됐다. 핵발전소 반대 투쟁의 세 번째 승리였다.

반핵 운동이 세 번이나 승리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삼척 핵발전소 반대투쟁을 하면서 절감했어요."
  
2012년 주민 의사에 반해 핵발전소 유치를 신청한 김대수 삼척시장에 대한 고발과 주민 소환 운동을 기반으로 2014년 지방선거에서 탈핵 시장을 선출할 수 있었다. 박홍표 신부와 탈핵변호사모임 해바라기 김영희 변호사가 고발장 접수를 준비하고있다.
 2012년 주민 의사에 반해 핵발전소 유치를 신청한 김대수 삼척시장에 대한 고발과 주민 소환 운동을 기반으로 2014년 지방선거에서 탈핵 시장을 선출할 수 있었다. 박홍표 신부와 탈핵변호사모임 해바라기 김영희 변호사가 고발장 접수를 준비하고있다.
ⓒ 이옥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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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을병 교수 고향은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다. 당시 성균관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던 장을병 교수는 명절에 다니러 왔다가 삼척시 근덕면에 신규 핵발전소 추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울로 올라온 장 교수는 곧바로 환경운동연합을 찾아 삼척 시민들에게 핵발전소 문제를 교육해 줄 것을 제안했고,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근덕면 주민들에게 한 달여 동안 핵발전소 교육을 했다. 장 교수 덕에 '근덕면 원전 백지화투쟁위원회'가 비교적 빨리 구성되었고 폭발력 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장을병 교수는 1980년 계엄령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해직됐다가 1984년 복직한 뒤 성균관대 총장까지 지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해 1996년 15대 삼척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를 은퇴하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와 지식인 운동 등에 몸담았고 지난 2009년 숙환으로 작고했다.

투쟁 과정에서 몇 차례 이야기를 들었지만 옥분씨는 몇 해 전 호산리에 사는 장 교수의 제수씨를 만나 사실을 직접 확인했단다.

"장 교수 고향인 호산리 바로 옆이 울진 핵발전소예요. 이미 핵발전소 문제를 잘 알고 있었던 분이죠. 그러니 고향 땅에 핵발전소가 들어서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거예요. 저는 장을병 교수 흉상이라도 세워주고 싶어요."

세 번의 투쟁을 승리로 이끈 삼척 시민 모두의 흉상이 이미 근덕면 '8.29공원'에 있지 않은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원전 백지화 기념비' 말이다.

탈핵 할매, 미토 엄마

"미토 엄마와는 연락 자주해요?"

옥분씨는 일본의 탈핵 운동가 미토 기요코(88)씨를 일본 엄마라고 부른다. 미토씨는 미토 이와오 교수의 부인이다. 이와오 교수는 1970년 도쿄대 교수 시절부터 반핵 운동을 하다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남편과 아들의 죽음 이후 미토씨는 배낭을 메고 외국을 떠돌던 중 2002년 대만에서 '핵발전소 필요 없다. 시모노세키 모임' 대표 사와무라 가즈요씨에게 부안 핵 폐기장반대 투쟁 소식을 들었다. 사와무라씨와 부안을 찾은 미토씨는 에너지 넘치는 부안의 반핵 운동에 감동해 일본으로 돌아온 후 노후비상금 100만 엔을 몰래 기부해 부안에서는 1000만 원의 할머니로 불렸다.

2015년 원불교환경연대의 초대로 한일 탈핵 교류 '탈핵할매가 간다'를 위해 9월 1일 한국을 방문한 미토씨와 사와무라씨 두 사람은 마침 80세 동갑이었다. 첫 방문지인 삼척에서 삼척핵반투위 사람들과 교류하고 근덕면 원전 백지화 기념비를 방문한 뒤 옥분씨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두 분 다 80세이니 가는 곳마다 팔순 잔치를 벌입시다. 그리고 전국 순회를 마친 9월 8일 마지막 밤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자발적인 축하객들을 모아 팔순 잔치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거예요. 음식과 요리는 각자 준비하고 홍보는 SNS를 활용해요."
  
2015년 '탈핵 할매가 간다'의 주인공 일본 탈핵운동가 미토 기요코 씨와 사와무라가즈요씨는 삼척, 영덕, 부안, 영광, 서울 등지를 돌며 한일 탈핵 연대를 강화했다. 마침 80세 동갑이었던 미토와 사와무라씨에게 한국의 탈핵 활동가들은 곳곳에서 팔순 생일 잔치를 벌였다.
 2015년 '탈핵 할매가 간다'의 주인공 일본 탈핵운동가 미토 기요코 씨와 사와무라가즈요씨는 삼척, 영덕, 부안, 영광, 서울 등지를 돌며 한일 탈핵 연대를 강화했다. 마침 80세 동갑이었던 미토와 사와무라씨에게 한국의 탈핵 활동가들은 곳곳에서 팔순 생일 잔치를 벌였다.
ⓒ 원불교환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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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분씨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영덕에서도, 영광에서도, 부안에서도 방문지마다 팔순 잔치가 열렸다. '탈핵 할매가 간다'는 한국 핵발전소 지역에서 거대한 핵마피아와 고군분투하며 투쟁하는 현장 활동가들을 격려한다는 애초의 취지를 뛰어넘어 연대와 교류가 넘쳐났다. 평생 탈핵 운동에 헌신한 팔순의 현역 선배 운동가들의 삶에 한국 탈핵 활동가들은 존경과 감사를 전했고 탈핵 할매들은 지혜와 격려를 나누었다.

출국을 하루 앞둔 9월 8일 저녁에도 SNS와 환경 활동가들의 단체 소통방을 통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각자 음식과 선물을 들고 모였다. 서울시청 앞에 도착한 미토와 사와무라씨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날이 시아버지 제사였어요. 탈핵 할매 팔순 잔치를 제안한 책임감에 일단 올라왔죠. 팔순 잔치 마치고 미토씨가 저를 끌어안으며 "You're my daughter(너는 내 딸)"라고 해서 "はい(네)"라고 대답했죠. 그때부터 미토 엄마가 되었어요."

한-일 탈핵 모녀의 탄생 또한 '탈핵 할매가 간다'가 남긴 큰 성과다

삼척에서 살고 싶어요

"이런 싱싱하고 깨끗한 생선을 나 혼자 먹으려니 가슴이 아픕니다. 후쿠시마 아이들은 생선도 못 먹고 마음껏 뛰놀 수도 없어요."

'탈핵 할매가 간다' 부안 방문 당시 부안 사람들과 함께 간 횟집에서 미토씨의 혼잣말이 가슴에 남았다. 방학이 되면 방사능 오염이 상대적으로 덜한 서일본 쪽에서 '후쿠시마 아이들 보양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말에 원불교환경연대 강해윤 대표는 '후쿠시마 아이들 한국 보양프로그램'을 약속했다.

2017년 일본에서는 한국 보양프로그램에 참여할 후쿠시마 아이들을 모집했고 한국에서는 프로그램과 공동기획단을 조직했다. 또래 청소년들 맞이는 대안학교 크리킨디 센터가 맡았다. 몸과 마음의 보양을 위해 맑은 바다와 하늘을 자랑하는 삼척의 옥분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옥분씨는 당연히 '콜'을 외쳤고 7박 8일 일정 중 3박 4일을 삼척 바닷가 옥분씨네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다. 미토 엄마가 '후쿠시마 보양프로그램' 사업단장을 맡았다.

중학생 3명, 고등학생 3명, 대학생 2명 그리고 어른 스태프 4명의 일행이 2018년 8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삼척 바다를 배경으로 일본 방한단원 한 명, 한 명을 그려 넣은 '야, 놀자' 현수막에 미토 단장 눈이 휘둥그레진다. 옥분씨가 인맥을 총동원해 정성껏 만든 현수막에는 보양단에 참여한 아이들과 미토 단장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옥분씨가 온갖 인맥을 동원해 만든 후쿠시마 청소년 보양프로그램 포스터. 후쿠시마 아이들과 미토 단장을 그려넣었다.
 옥분씨가 온갖 인맥을 동원해 만든 후쿠시마 청소년 보양프로그램 포스터. 후쿠시마 아이들과 미토 단장을 그려넣었다.
ⓒ 이옥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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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연속이었어요."

3박 4일 12명의 외국인, 그것도 후쿠시마 아이들을 맞이해야 하는 옥분씨는 7일 동안 보양이 될까 싶었지만, 최대한 삼척의 바다와 건강한 먹거리를 준비하려고 애썼다. 무엇보다 아이들이다 보니 한국 학생들을 섭외하는 것이 제일 신경 쓰였다. 수소문을 하니 최근 일본 배낭 여행을 다녀온 대학생이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일단 통역 문제는 해결했고 같이 놀아줄 청년들이 필요했다. 강원대 학생들을 소개받고 만났다.

"아무래도 음악이나 악기 같은 것이 있으면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같이 부를 노래 같은 것 준비해 볼래요?"
"저희 밴드 동아리 멤버들이에요."
"어머, 그래요?"
"그런데 악기는 동아리 지도교수님 허락 없으면 외부 반출이 안 돼요."
"지도교수님이 누군데요?"
"성원기 교수님이요."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성원기 교수가 밴드 동아리 지도교수라는 사실도 놀라웠고, 눈 앞에 펼쳐진 우연은 더욱 놀라웠다. 옥분씨가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성 교수는 "내가 이렇게 쓰이려고 5년 동안 동아리 지도교수를 놓지 않았나 보다"라며 밴드 동아리와 악기 반출을 흔쾌히 허락했다.

"한 유명 셰프가 8월 18일 우리 마을 경관 조명 설치 완료에 맞춰 비밀키친&살롱 경관 조명 오프닝 이벤트를 하더라구요. '비밀 요리'라는 이름으로 해산물 요리를 시연하고 마침 시식 행사까지 하는 거예요. 후쿠시마 아이들을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 마을 바닷가에서 불꽃놀이 보면서 유명 셰프가 만들어 준 해산물에 저녁 만찬을 즐겼어요."

또 한 번의 우연이 필연처럼 빛났던 광경이다.

"대학생이었던 후쿠시마 피난민 미쿠니는 삼척을 떠날 때 '자신의 삶을 짓눌렀던 돌덩어리를 삼척 바다에 내려놓고 가볍게 간다'라고 했어요. 환선굴 등 천연동굴도 가고, 삼척시장님 만찬도 즐기고 삼척 반투위에서 제작한 기념식수와 기념비도 원전 백지화 기념탑 옆에 세우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어요."

아이들과 부모들이 참여하는 단체 소통방에 옥분씨는 아이들 사진을 올려 안심시켰고 일본 부모들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이렇게 밝고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감사 인사를 남기기 바빴다.
 
후쿠시마 청소년 보양단 참가자들이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고 있다.
 후쿠시마 청소년 보양단 참가자들이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고 있다.
ⓒ 이옥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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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 8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마중 나간 부모들은 풀이 죽어 공항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 모습에 "재미없고 힘들었나?"라고 생각했었단다. 엄마, 아빠를 만난 아이들은 "오기 싫었어요. 한국으로 다시 가고 싶어요. 삼척에서 살고 싶어요"라며 떼를 썼다고 한다.

다음 해 자매 중 동생인 한나는 무주의 대안학교로 유학을 왔고, 그 후 언니 미쿠니도 한국을 몇 차례 다녀갔다. 그사이 옥분씨도 탈핵 연대 등의 일로 일본에 갈 일이 생기면 아이들과 부모님을 만났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왜 이렇게 친절한 건가요? 인생에서 보물 같은 7일이었어요. 까맣던 나의 인생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어요. 어디를 가든 희망으로 넘치는 하얀색 말이에요. 후쿠시마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었고 우리에게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마웠어요. 살아갈 힘을 얻었어요."

7일의 기적을 일군 '후쿠시마 보양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아이들이 남긴 후기다. 삼척의 바다와 옥분씨의 정성이 일군 기적이기도 하다.

다시 탈탈탈 현장으로
 
옥분씨는 예쁘고 손에 잡힐 듯 아기자기한 바닷가 마을에 산다. 파란 고래가 모래사장과 접한 벽면을 활기차게 채우고 바닷물에 밀려온 조개껍데기와 고동, 플라스틱 소품들로 구성된 모빌이 벽면 한 쪽을 장식한다. 집 앞 모래사장에 버려진 아이들 장난감이며 앙증맞은 슬리퍼도 담벼락에 걸치면 훌륭한 소품이 된다.

이 집의 압권은 장독대에 장독 대신 자리한 파라솔이다. 식탁에는 잠시 쉬러 왔던 손님들이 두고 간 온갖 차가 올라오고 마당까지 연결한 스피커에서 남미 음악이 흐르면 동화 속 어디메쯤인 듯 착각하게 된다. 바다와 모래사장을 정원으로 가진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옥분씨는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가 쓰였는지 모른다고 회상한다.
  
옥분 씨의 바닷가 집 담벼락위에 최병수 작가의 작품이 놓여있다. 바다와 하늘, 생명을 담고있다.
 옥분 씨의 바닷가 집 담벼락위에 최병수 작가의 작품이 놓여있다. 바다와 하늘, 생명을 담고있다.
ⓒ 이옥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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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잖아요. 그때 바로 이 자리에서 성원기 교수랑 예수회 조현철 신부님이 막걸리 한 잔하다가 탈핵 도보 순례단이 교황님을 맞이하자고 결의했어요."

2014년 8월 15일 대전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미사에 맞춰 6월 30일 부산 고리 핵발전소에서 출발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모승천대축일 미사가 열리는 대전 월드컵 경기장까지 탈핵 희망 도보 순례를 하기로 했다. 사전 작업으로 교황 방한을 준비하는 한국 주교단에 한국 핵발전소 문제를 알리고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속한 수도회가 예수회라 조현철 신부를 중심으로 서한을 작성하고 전달하기로 했다.

40여 일을 걸어 탈핵 도보 순례단이 대전 월드컵 경기장 앞까지 갔지만 결국 행사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전달되었고 교황님도 핵발전소에 대한 우려의 입장을 밝혔단다.

본인을 극소심 형, 겁쟁이라고 명명하는 옥분씨가 탈핵과 탈석탄 현장에서 용기를 낸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결혼 전 연극이나 보러 다니고 바닷가 마을 출신 친구 덕에 삼척을 들락거리던 옥분씨는 어느 일요일 2층 자신의 방에서 내려다 보다 사람들이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로 가는 것을 보고 의문과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저들이 가는 저 길에 무엇이 있길래 저리로 몰려가는지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성당에 다니던 앞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가톨릭 장례 미사는 조용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마침 집에서 가까운 곳에 신축한 자양2동 성당이 문을 열었고 '호기심 천국' 옥분씨는 궁금증을 풀러 성당 문을 두드렸다.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골롬반선교회 소속 성당이어서 그런지 주임 신부님 또한 아일랜드인이었고 궁금해서 알아보러 왔다는 옥분씨에게 '많이 알아보라'고 웃으며 맞아주었다. 첫 인연이 된 유데스 신부님은 마음 약한 옥분씨가 탈핵 운동에 뛰어든 것을 보고 기도로 힘이 되어주셨다.
 
옥분 씨가 한일 탈핵연례 순례단과 함께  2016년 5월 '일본 이카타 핵발전소 재가동반대'를 위한 도보순례에 참가했다. 아랫쪽 해변가에  이카타 핵발전소가 보인다.
 옥분 씨가 한일 탈핵연례 순례단과 함께 2016년 5월 '일본 이카타 핵발전소 재가동반대'를 위한 도보순례에 참가했다. 아랫쪽 해변가에 이카타 핵발전소가 보인다.
ⓒ 이옥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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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옥분씨는 신앙인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탈핵 운동도, 탈석탄 운동도 부정의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당연한 저항일 뿐이다. 석탄 발전소가 가동되면 송전탑 건설이 불가피하다. 그러니 '탈석탄 운동'과 '탈송전탑 운동'은 세트다. 탈핵 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석탄발전소가 비록 시범운전에 들어갔지만 반드시 멈추게 할 거예요. 그게 정의잖아요."

삼척에 있는 두 성당 모두 골롬반선교회에서 설립했다. 우연 같은 필연이다. 옥분 씨에게 '탈탈탈' 운동은 신앙 실천이다. 늘 이긴다고 기도하고 행동한다. 무해한 바닷가에서 무해한 옥분씨가 물장구 치고 노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매거진 '탈핵 잇_다'에도 연재됩니다.


태그:#탈핵 잇_다, #삼척평화, #삼척탈핵운동, #원전백지화기념비, #탈탈탈도보순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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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고 연결된 삶을 그리며 오늘도 바쁘고 단절된 삶을 살아갑니다. 영광에 22년 살면서 '핵 없는 세상'을 염원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빠른 태양과 바람의 나라를 꿈꿉니다. 생태와 자연, 젠더와 영성에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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