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30 11:54최종 업데이트 23.08.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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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7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단이 일본 후쿠시마 원전 3호기 사고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12년 후인 지난 8월 24일, 일본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 도쿄전력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시작하면서 환경 오염에 대한 국제사회의 무기력증이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기후 현상으로 지구촌 곳곳에 적색경보가 울리는 와중에도 일본은 버젓이 바다를 향해 방사성 폐액 방류를 시작했다. 그런 퇴행적 행위에도 국제사회가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암울한 지구의 미래가 그려지고 있다.  

심지어 미국과 한국 등 일부 국가의 정부는 그러한 만행을 제재하기는커녕 방조하는 뻔뻔함마저 보여줬다. 희석액이니 괜찮다는 주장은 대기 중에 연기가 섞이니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워도 괜찮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그런 궤변이 왜곡된 과학이론을 앞세워 공공연하게 확산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와있다. 


과학적 명제란 극도의 제한된 조건 하에서 선결된 전제와 현재의 경험 세계를 대비해 새로운 하나의 사실을 추론해 내는, 반증이 가능한 가설이다. 무한의 변수들이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긴 시간 동안 빚어낼 수 있는 미래의 모든 결과를 예측해 내는 신통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을 대변하고 옹호하자고 과학 운운하는 일부 정치인의 모습에 측은함마저 느껴진다. 

인류는 현재 과학 맹신주의보다 무서운 과학 환원주의에 빠져 자신의 운명을 오염된 태평양 바다에 내던지는 무모함을 저지르고 있다. 과학맹신주의는 소극적, 수동적 과학 지상주의지만 과학환원주의는 적극적, 능동적 과학 지상주의다. 맹목적으로 믿는 것보다 맹목적으로 믿게 조작하는 행위가 더 나쁘다는 뜻이다.

1992년 리우 선언 '사전예방원칙'
 

1992년 6월 3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 환경개발회의(UNCED)를 개회하고 있다. 지구정상회의로 불린 이 자리에서 환경과 개발에 관한 기본 원칙을 담은 리우 선언이 채택되었다. ⓒ UN Photo/Michos Tzovaras


'사전예방원칙(Precautionary approach)'이라는 것이 있다. 31년 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무려 178개국 대표(115개국 국가원수 또는 정부수반 포함)가 모여 지구의 환경과 미래를 위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를 열었던 당시 정의되고 승인된 원칙이다. 1992년은 여러 의미에서 인류가 희망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지금만큼 눈앞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않았음에도 환경 문제에 대해 최다 규모의 국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응 원칙을 세우던 때였다.

특정 시점에 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지식이 충분치 않아 어떤 행위의 결과에 대한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을 경우, 그로 인해 잠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대비하고 사전적 방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원칙, 그것을 사전예방원칙으로 명명하고 인류는 스스로 미래에 닥칠 위험에 대비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위험에 대한 명백한 확실성이 없더라도 가능성만으로 적극 대비한다는 원칙이다. 확실성이 인류의 합리적 사고와 진보를 보장한다는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보완인 셈이다. '확실성이 없더라도'라는 말이 얼핏 확실성에 대한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언어의 함정이다. 모든 인간의 의도에는 방향성이 있기 때문에 무엇에 대한 확실성인가의 질문이 동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전에 대한 확실성인가 불확실성인가'와 '위험에 대한 확실성인가 불확실성인가'의 질문은 전혀 다르다. 안전과 관련해서는 확실한 보장을 추구해야 한다. 반대로 위험에 대해서는 발생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아도 피해야 한다. 그것이 거꾸로 안전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험' 등의 부정적 가치에 대해 불확실성에도 반응하는 것이 확실성을 추구하는 합리주의에 적극 부합하는 것이며 고대부터 동서양 사상에 공통으로 가장 중심에 있는 지혜(智慧, φρόνησις 프로네시스)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1992년 리우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인류사적 가치와 전통이 반영된 전 인류적 지구촌 선언이었다. 

1992년은 철의 장막이 걷히고 새롭게 탄생한 러시아가 자유주의 세계의 문을 두드리며 화려한 조명을 받은 때였다. 수십 년의 냉전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향할 가치에 함께 집중하게 되리라 믿던 때였다. 리우 선언은 바로 그러한 국제정치적 의미와 희망이 반영된 지구촌 선언이었다. 

31년이 지난 지금, 과연 세계는 리우 선언의 지향점에 걸맞게 가고 있을까?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공산이념 때문이었다는 순진한 생각은 불과 30년 만에 정반대로 극우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어 놓고 있는 러시아를 보면서 산산이 깨졌다. 냉전이 무너졌다는 당시의 환희는 점차적 의심을 거쳐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완전히 실망으로 바뀌었다. 

동구권이 무너지던 당시의 기성세대는 전 인류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그 풍요로움을 다음 세대로 물려주지 못했다. 현재 인류가 가진 부의 총량은 당시에 비할 수 없이 커졌지만 개인은 생존을 위협받고 인류는 번식을 위협받을 만큼 경제 균형과 공정 분배가 완전히 무너졌다.

한미일 공조의 첫 작품, 핵 오염수 방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바이든 미 대통령, 기시다 일본 총리. ⓒ 연합뉴스


다수의 국가 권력은 이런 상황에서 도전에 맞서기보다 30년 이전의 냉전체제로 회귀를 택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도 예외는 아니다. 창조적 사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군국주의 세력에 둘러싸여 존재감 없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왜 정치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윤석열 대통령. 이들이 만들어 낸 한미일 공조의 첫 작품이 결국 핵 오염수 방류였다.

환경문제가 지금 당장 인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자신의 임기 동안은 오염수 방류의 악영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선거 국면에 들어 지금의 방어 태세에서 전환해 역공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의 저주는 4년 주기로 나타나지 않는다. 한 세대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과거 인류가 저지른 환경에 대한 범죄적 행위들은 대부분 지금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990년대까지 미소 양국의 경쟁적 핵실험은 그저 상대방에 대한 군사적 위협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1000회 넘는 미국, 700회 넘는 소련/러시아의 핵실험은 오늘날 환경 오염과 기후변화의 주범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이들은 핵실험 금지조약(LTBT/CTBT), 핵확산 금지조약(NPT) 등을 만들어 더 이상의 핵실험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미 환경은 등을 돌린 뒤다. 

"각 국가는 환경 악화를 심각하게 초래하거나 인간의 건강에 위해한 것으로 밝혀진 활동이나 물질을 다른 국가로 재배치 또는 이전하는 것을 억제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1992년 발표된 총 27원칙의 리우 선언 가운데 '원칙 14'의 내용이다. 과연 핵 오염수 방류가 이 원칙에 호응한다고 한미일 정상은 생각할까? 혹여 후쿠시마 오염수는 환경 악화를 심각하게 초래하거나 인간의 건강에 위해한 것으로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항변할까? 그렇다면 아래의 '원칙 15'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각 국가의 능력에 따라 사전예방원칙이 널리 실시되어야 한다. 심각한 또는 회복 불가능한 피해의 우려가 있을 경우, 과학적 불확실성이 환경 악화를 지양하기 위한 비용/효과적인 조치를 지연시키는 구실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31년 전, 인류가 아직은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은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현명한 지혜를 함께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리우 선언이다. 그런데 한 세대 만에 정반대의 지도자들이 지구를 점령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30년 전으로 세상을 돌리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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