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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거미'. 거미줄은 끈적끈적한, 그리고 다른 곤충들을 빨아들이는 강렬한 이미지. 교미가 끝나는 순간 수거미를 잡아먹는 암거미를 보면 생존을 위한 섹스와 죽음이라는 극대화된 욕망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감방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몰리나는 자기 식으로 다시 쓴 영화로, 지극히 여성적인 보살핌으로 외견적으로 마초적인 혁명가인 발렌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 거미 여인의 키스 표지
ⓒ 민음사
두 번째 '여인'. 이 작품에서 여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16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세 번에 걸친 몰리나와 소장과의 극 형식의 대화, 9개의 긴 각주, 15장의 사건 보고서, 16장의 몰핀을 맞은 발렌틴의 환영을 빼고는 모두 육체적으로 남성인 발렌틴과 몰리나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여성'은 물론 게이, 몰리나이며 이는 소설이 '여성'과 '남성', 즉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두 사람의 어머니 동료, 애인과 소설 속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종종 거론됨으로써 이 화두는 여러 층위로 해석될 여지를 남겨준다.

마지막으로 '키스'. 섹스보다 더 정신적이고 오묘한 교감의 형태로서 키스는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궁극적으로 원한 교감의 제스처다. 게이 몰리나가 발렌틴과의 섹스 이후에 원한 것도 키스이기에 소통의 마지막 단계로, 그리고 육체적 사랑의 시작으로 키스를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마치 B급 영화의 제목처럼 보이는 <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미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실마리는 어쩌면 제목이 주는 키워드 안에 함축되어 있는지 모른다.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다층적 텍스트인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키워드들의 함의를 두 주인공의 대화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듯하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76년까지의 동성애에 관한 이론을 전부 요약한 듯한 각주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의 기본 전제가 되는 것은 몰리나가 게이란 사실이다. 청소년 성범죄를 저질렀고, 또한 '혁명가'와 '변태'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이유로 발렌틴과 만나게 된 것도 다 거기서 연유한다.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힌, 그리고 감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갇힌 발렌틴을 변화시키는 것이 몰리나의 '게이'라는 성적 정체성과 무한한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영화 '캣 피플'의 이미지를 보면 팜므 파탈이자 지극히 대상화된 타자로 상정되어 있다. 몰리나의 의도에 의해 각색되어 있기는 하지만 남성과 사회를 파멸시킬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로 그려진 이레나는 명백히 치명적이지만 아름다운 타자로서의 몰리나의 은유이다.

사실 몰리나가 구술하는 영화 속 여성들은 할리우드 B급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주인공이다. 하지만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가 고조되면서 위험한 타자로 상정되는 팜므 파탈에서 남자 주인공을 위해 헌신하고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을 의도적으로 몰리나가 등장시키고 있으며 이는,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대로 몰리나=여성성을 등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매혹의 오두막'에서 추한 하녀의 변신, '볼레로'의 사랑의 편지, '좀비 영화'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을 지키려는 신부, 그리고 멕시코 배경의 영화 속에서 창녀로까지 전락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키려는 여배우의 모습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몰리나는 섹슈얼리티는 여성이 아니라는데 있다. 사회적으로 철저히 타자화 되어 있으며 여성과 남성의 경계, 육체와 정신의 차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을 법한 몰리나를 통해 적극적으로 젠더로서의 여성성을 발현시키는 것에서 이 소설의 전복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극히 마초적이고 마르크스적 혁명에 경도되어 동성애를 부르주아 사회의 부산물로 취급하던 발렌틴이 점점 몰리나의 영화 읽기의 매력에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와 상류 사회, B급 영화의 장르 틀 등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단하고 비판하던 발렌틴이 점점 몰리나의 의도대로 영화를 수용해 거시적인 주제와 배경보다 미시적인, 텍스트를 읽는 주체의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전혀 상반된 가치관을 소유한 몰리나와 발렌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가운데 다시금 세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시각을 확보하게 되는, 그 영향을 주고받는 매개가 바로 '영화'다. 1차 텍스트를 자신의 것으로 독해해나가고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해 나가는 힘은 결코 혁명과 같은 거대 담론의 틀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몰리나의 영화 읽기는 마누엘 푸익이 의도하는 하위문화 속에서의 의미 찾기와 텍스트 다시 쓰기의 전략을 그대로 보여주며 거기서 또한 주체의 문제를 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감방에 갇혀 있는 존재들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의 공간으로 상정한 감옥은 억압의 최고 형태로 사회 체계, 라깡식으로 '아버지의 법' 그 자체의 은유가 된다. 중요한 것은 마누엘 푸익이 여기에 동성애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시에 끌어왔다는 점인데 푸익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그것들을 재단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몰리나와 발렌틴을 동시에 억압받고 있는 존재들로 그리고 있다.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거부당한 두 인물은 그 자체로 전복의 기운을 띠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며 핵심은 두 인물의 변화에서 기존 가치관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공인 받은 '혁명가' 발렌틴이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전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애자 '몰리나'에게 영화라는 1차 텍스트를 미시적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사회를 다시 사고하는 전복의 기운을 얻으며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마누엘 푸익이 7번에 걸쳐 동성애에 대한 각종 이론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것은 이러한 의도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특히 프로이트적인 관점에서 동성애자의 발생 이유와 환경적 요인, 사회적인 평가 등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사회와 개인, 의식과 무의식을 설명하는 도구로서 정신분석학적 사고가 밝힌 동성애자에 대한 이론들은 '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텍스트와 맞물려 그 자체로 전복성을 띠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억압적인 가부장적 질서가 동성애자들을 생산해 냈으리라는 이론은 아직까지도 타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성애자들의 현실에 비추어 봤을 때도 재론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반대항으로서의 맑시즘적 세계관이 보여주는 사고의 경직성보다 내부에서 성적, 사회적으로 억압된 동성애에 대한 해석과 그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 어쩌면 더 전복적일 수 있다는 것을 푸익을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남자' 몰리나에게서 우리는 군사 파시즘과 또 맑시스트의 사고의 경직성까지 넘어설 수 있는, 가부장적인 법적 질서의 대항의 가능성까지 엿볼 수 있다.

다시 몰리나와 발렌틴은 모두 서로에게 영향 받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중간에 있는 인물들이다. 동성애적 사랑과 혁명, 이 사이에서 그들은 서로 자신의 자리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게 된다. 특히 몰리나의 경우 발렌틴의 조직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한 목적에서 점점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면서 체계의 공작에서 발렌틴의 공작으로 자신의 자리를 이동한다. 또한 지극히 마초적이고 좌파적인 관점에서 몰리나와 그의 영화들을 평가하던 발렌틴이 그의 진정한 사랑과 욕망을 눈뜨는 과정도 그러한 변화와 전의의 과정인 것이다.

아이러니는 그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욕망하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함을 눈뜨게 되면서 결국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다는데 있다. 몰리나와 발렌틴의 교감과 사랑이 결국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한다면 몰리나는 그러한 사랑 때문에 발렌틴의 조직의 스파이 활동에 가담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라깡식으로 '무의식은 구조화된 타자의 욕망'이라는 명제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이 서로 소통하는 매개인 영화라는 텍스트에 재해석을 가하는 것은 몰리나의 동성애적 성향에서 오는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발렌틴 또한 그러한 재해석에서 초반부에는 맑시즘적 논평을 가하기는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감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라는 절망감과 사랑하는 애인에 대한 욕구를 투영시킨다.

라캉이 밝힌바 대로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면 이러한 해석은 언어처럼 독자적인 의미망과 질서를 가져야 하며 이러한 개인이 독립적인 질서와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타자의 담론, 욕망'이 되는 것이다.

결국 몰리나와 발렌틴이 무의식적의 차원에서 영화라는 텍스트를 해석한 것은 작게는 자신의 결핍된 부분, 즉 몰리나는 사회적인 역할과 발렌틴의 사랑, 발렌틴은 여성성의 가치와 개인적 욕망을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며, 크게는 근본적인 억압의 상황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구조화된 타자의 담론 속에서 자신을 주체화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자기의 자리를 찾아나가는 것, 이 과정 속에서 타자의 담론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단계에서 만난 것이 몰리나와 발렌틴인 것이다.

어쩌면 몰리나와 발렌틴의 만남과 변화가 구조화되어 있는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군사독재와 가부장적 질서라는 '아버지의 법'에 포획되어 있는 인물들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질적인 그들이 서로 '소통'의 순간을 맛보았다는 것에 있다.

몰리나라는 동성애자가 보여주는 여성성의 긍정적인 가치는 그것이 구조화된 무의식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영화라는 하위문화를 재해석하는 가운데 '대화'를 주고받는데서 오는 상호작용에서 극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미 여인의 키스>는 체계가 이미 구조화된 사회에서 개인적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 사회에 균열을 내는, 다시금 전복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에 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 하성태 기자는'daum 영화평론가'와 '한국일보 디지털 특파원'으로 활동중이며 생산적이고 깊이 있는 영화 보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egloos.woody79.com 에서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한국일보 디지털 특파원에 함께 실렸습니다.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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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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