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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고 난 후, 항상 무력한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의 세계를 유영하다가 현실로 돌아와 두 발을 대지 위에 디딜 때의 허탈함이란! 지구라는 행성에서 지글지글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규정해 놓은 트렌디한 것, 평범한 것, 보통이라는 것의 정의에 신물이 날 지경이 된 사람들에게 그래서 꿈은 안식처인 동시에, 지옥과도 같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그 무엇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욕망은 끊임없이 타오르다가 여기저기에서 조용조용 그 존재를 잃어간다.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무지(無知)의 유혹은 그래서 매혹적이고 치명적이다. 남들은 거의 듣지도 않을 희한한 음악을 듣고 온갖 제3세계의 영화들을 찾아다녀도 소망하는 환상은  결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꿈이 아름답다는 것은 평범함의 범주에 놓인 자들의 논리일 뿐. 어디에서도 빛날 수 없고, 딱히 빛나고 싶지도 않은 아웃사이더들은 그래서 체념을 재빠르게 체득한다. 적당하게 꿈꾸고, 적당하게 우울하기 그리고 적당히 가식적으로 웃기.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황정은 지음/ 문학동네 펴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은 '벤야민'스러운 기질로 가득 차 있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세상의 기준과 빠른 속도감에 신물이 난 그들은 앞서 말한 체념을 통해 우회하고 지연하면서 희망과 환상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깨우친다.

 

황정은의 소설들에는 기이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그러니까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환상'이 아니라 그저 그런 일상의 일부분인 셈이다.

 

등 뒤에 남이 볼 수 없는 문이 하나 생겨 죽은 할머니가 되돌아오고(<문>), 아버지는 갑자기 모자가 되며(<모자>), 기이한 애완동물 곡도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르는데도(<곡도와 살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전혀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귀찮고 짜증이 나더라도, 그들에게 그 일은 당연히 감내해야 할 부분으로 그려진다.

 

자멸과 체념, 틈새의 미학

 

"소년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 동화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있고 작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는 혈색 좋은 어머니가 있고 아이를 때리는 어른은 항상 벌을 받는 동화의 세계 따위, 거짓말이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다."

- <소년>

 

가난과 세상의 부조리함이 만들어낸 유희의 진실을 깨달은 그들은 성장을 거부하고,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뒤에 자멸과 명랑함으로 세상에 맞선다.

 

<문>에서 m은 등 뒤에 있는 할머니와 만나고,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사자(死者)와도 만난다. 달리는 열차에 몸을 내던져 자살을 선택했던 사자는 자신을 사과로도, 두리안으로도 불러도 좋다고 말한다. 불린 적이 없기 때문에 원래 이름의 의미가 소멸된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의 인물들에게는 특별하게 불리는 이름이 거의 없다. 이름이 있다 해도 그것은 누군가 억지로 규정한 것 뿐,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 대부분은 틈새의 미학을 꿈꾸고 있다.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건 나쁜 걸까"라는 한 인물의 물음처럼 그들은 불분명한 흐릿함으로 폭력적인 세상에 자신을 방어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어떤 점들이 그렇게 폭력적이라고 여긴 것일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모두가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모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우리 부부는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뻔뻔함의 상식,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 애쓰던 개인이 소모되면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권력의 힘, 그리고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요구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닐까.

 

느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소설 속 인물들은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왕따가 되기에 적합한 경우가 많다. 모자가 되는 아버지, 날 수 있는 지빠귀가 되고 싶었지만 툭툭 건드리면 이리저리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오뚝이가 된 사람 등은 모두 현실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뚝이처럼 끝내 넘어지지는 않으며, 현실을 완전히 배신하지도 않는다. 신물이 나면서도 텔레비전 재방송 코미디 프로에 집중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모자의 가족들이 이사를 가는 것은 결국 살기 위해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는 결코 난다거나 순간이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물들 간 대화가 많이 나오지만 이는 대부분 무미건조하다.

 

"가자. / 그래. / 주말에? / 주말에"

-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밋밋하게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의 대화가 주는 지루함을 유머러스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소설 곳곳에 배치된 의성어다. 특히 책의 반 페이지 이상을 수놓은 '풉풉풉풉'(무지개풀)의 기발함은 기과하기 짝이 없던 소설 속 공간을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현실이 성가시고 불편하더라도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심 나머지 회원들도 바라는 것 아닌가. 자신 말고 누군가, 아직은 살고 싶다, 라고 말해주길. 그리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또다시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여유로 살아갈 수 있도록."

- <마더>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체념을 '여유'라고 수정한다. 그것이 자멸과 체념으로 가득한 그들 내면의 작은 희망 같은 틈새가 될 것이니까.

 

희망 없는 삶을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것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황정은 작가는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를 통해 무표정한 인물들의 얼굴 속에 숨겨진 삶의 우울과 비애를 건조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책은 그 비애를 그 자체로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는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도 아니다. '모자'도, '곡도'도, '오뚝이'도 그 어떤 환상적 이미지들도 인물들을 구원해 주진 못한다.

 

다만 작가는 희망 없는 삶을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이 자신들에게 무책임하게 내던져준 이름과 명칭 등을 거부한 채 불분명함으로 무장한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가장 큰 무기다.

 

철저하게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것이 다분히 자폐적이고 소모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는 황정은 소설에서는 예외적인 허용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아니, 오히려 당위성을 가진 외침이다. 왜냐고? 현실도, 환상도 잃어버린 자에겐 오직 그 '틈새'만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될 테니까.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나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사람들. 그들은 밤하늘 곳곳에 자신을 수놓으며 어두운 터널의 밤을 견디고 있다. 내 옆에서, 혹은 당신의 옆에서. 황정은의 소설들에 공감할 수 있다면 그건 당신도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문학동네(2008)


태그:#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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