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우리 나라의 문장은 최치원으로부터 피기 시작하였다."(성현(成俔), <용재총화>)

"(…) 최치원에 이르러서 문체가 대비(大備ㅡ썩 잘 갖추어져 있음)하여 드디어 동방문학의 조(祖)가 되었다." (이조 인조 때의 문인 홍만종의 <소화시평(小華詩評)>)


일찍이 글(문장)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우리 나라에서 그 원조라 불리는 인물이 있다. 최치원(崔致遠, 857~?)의 자는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父), 호는 유선(儒仙)이다. 6두품 출신으로 신라 말기의 혼란시기에 태어났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뱃길로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가 "네가 당나라에 가서 10년 공부를 하여, 과거를 못한다면 나의 자식이 아니니 아무쪼록 부지런히 하여 이 아비의 기원하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공을 이루게 하라."는 부친의 당부를 잊지 않고 발분하여, 18살 되던 해에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나라 과거 '보귀과' (타국인을 위한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은 지금의 감소성 강녕의 현위가 되었다. 이무렵 당나라에서는 (875년)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 출신 황소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농민 수만 명이 가세하고 북방의 돌궐·위구르 출신 전문 병사들까지 합세하여 수도 장안까지 위협하였다.

최치원은 <황소에게 격(檄)하는 글>을 지었다. 황소가 읽고 책상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주요 대목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权)이라고 한다. 지혜 있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너는 본시 먼 시골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대를 타고 감히 상도를 어지럽게 하였다. 드디어 불칙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죄가 이미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로 되어서 반드시 여지없는 패망을 당하고 말것이다. 애달프다. 당우 시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묘호(苗扈: 묘와 호는 각각 순임금과 우임금 때 제후의 나라로, 복종하지 않다가 토벌당한 나라) 따위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은 즉 양심 없는 무리와 충의없는 것들이란 바로 너희들의 하는 짓들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기로 의논했으리.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아니하여 어두운 길에 헤매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는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글 한 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이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최치원, <계원필경>)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 진압에 크게 기여하고 문명을 떨친 그는 28살이 되어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는 융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골품제는 여전하여 육두품 출신인 그는 전북 태인, 충남 당진과 서산의 군태수로 임명되었다. 군태수는 신라 17개 관등 중 제3~제6관 등의 하급 관리였다. 별로 내키지 않는 관직을 전전하다가 한 번 당나라 파견 사절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최치원은 울울한 심경을 <추야우중(秋夜雨中)>에 담았다.

가을 바람에 애타게 읊조려도
세상에는 알아줄 이 별로 없구나
창 밖엔 삼경인데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엔 만리를 달리는 마음.


38살이 되는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 10조>를 지어 골품제 폐지 등 국정개혁안을 제시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산예(狻猊)>란 시에 심경이 실렸다.

멀리 사막을 건너 만리를 오니
털을 빠지고 먼지만 남았구나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지어 어질게만 보이니
호기는 어찌 뭇 짐승 같을 것일까.


산속으로 들어갔다.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겨레의 뿌리사상을 탐구했다.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그 교(敎)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로 3교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하는 것이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과 같고, 무위로 처신하고 말 없이 교를 행함은 노자의 근본과 같으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와 같다.

최치원은 우리 민족의 근원사상으로 풍류도를 제시하면서 유·불·선의 3교회통을 정리했다. 그리고 세속을 떠나 가야산에 들어가 정진을 계속하였다. 그 사이 신라는 낙조를 드리우고 반도의 정세는 후삼국 시대로 치달았다. 그는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라고 하여 왕건의 등극을 예언하였다. 계림=경주는 낙엽이 지고, 곡령(개경)은 푸른 잎이 돋는다는 일종 예언이었다. 그대로 되었다. 다음은 말년에 쓴 불교적인 시문이다. 제목은 <증운문난야지광상인(贈雲門蘭若知光上人)>이다.

구름 가에 정자를 지어 놓고
조용히 선정(禪定)에 들기 40여 년
지팡이는 산 밖에 나가본 일 없고
붓은 서울로 가는 글 안 쓰네
대나무 숲에 샘물소리 졸졸
송창(松窓)에 햇빛이 성그네
맑고 높은 경지를 옳다 못하여
눈 감고 진여를 깨치려 하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자서전 <역사가의 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