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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⑭] 검정 고무신의 행렬(https://omn.kr/26hxq)에서 이어집니다.

필자는 2020년도 10월 말경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골령골) 10차 발굴에 참여했다. 대전 골령골은 사건의 규모가 전국에서 최대 인원(7천여 명 추정)이 집단 학살된 지역이다.

그래서 발굴 기간과 횟수도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유족분들을 만나지만 사연을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필자의 가까운 지인이 대전유족회장을 소개해 해주셨다. 대전유족회장 전미경(72)과는 이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

골령골 학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린다. 무덤의 길이가 1km 이상이다. 골령골은 빠르면 2022년까지 늦으면 올해 상반기까지 발굴을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발굴 완료 시점은 여전히 미정이다.

대전유족회장은 현재 부여에 거주하고 있으며 발굴할 때마다 대전 골령골로 온다. 행정안전부는 골령골 유해 발굴장 옆에 대전유족회 사무실을 임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주택 한 채를 주었다. 전 회장은 바쁘면 골령골에서 잠을 청했다. 밤이면 7천여 명의 영혼과 함께 지내는 셈이다. 다른 유족들은 오후 4시면 무섭다고 집으로 가버린다.

지금부터 한 여인의 통한을 담아낸 대하소설 같은 73여 년 현대사의 뼈저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발굴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1시간 간격으로 10분간 휴식 시간에, 텐트에서 간식을 찾고 있는데 중년 여자 두 분이 지나가는 듯 보였다. 필자는 그때까지도 대전유족회장이 누구인지 만나지 못했던 터라 잘 모르는 상태였다.

홍수정 공동조사단 실장이 간식으로 삶은 밤을 드시라고 한다. 웬 밤 하면서 한 줌을 쥐고 까먹는데 필자가 태어나서 먹어본 밤 중 그렇게 맛있는 밤은 처음이었다. 파삭하고 달콤하니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이 밤 누가 가져오셨어요' 물었더니 "대전유족회장이 가지고 오셨어요"라고 한다. 이 밤을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휴식 때도 밤을 또 만났다. 필자는 맛있어 계속 먹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밤을 잘 먹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틀 밤이 지나면 밤이 쉴 것 같아 홍 실장보고 호텔에 가져가서 먹든지 냉장고에 넣으라고 했다. 밤과 인연은 끝이 났다.

대전유족회장과 첫 대면
 
대전유족회장 전미경과 그의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대전유족회장 전미경과 그의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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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골령골 4번째 발굴을 마치고 한 달 후, 지인이 대전유족회장을 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나게 약속을 해줬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전미경 회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유족 세 분과 함께 계셨는데 첫 대면에서 70여 년 뼈저린 삶이 얼굴에 고스란히 그려지는 듯 보였다.

대화 중 전미경 회장은 자신이 쓴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를 한 권 주신다. 그리곤 대전 골령골에 관련된 책들 몇 권 더 주셨다. 책을 받고 나오다가 먹었던 밤이 생각나 '지난번에 가져오신 밤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서둘러 진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서로 먼 거리상 전화 통화로 이런저런 사연을 듣게 됐다.

시집의 이름 전숙자와 현재 이름 전미경

전미경 회장의 아버지 전재흥은 연희전문 출신인 삼촌 전재원의 인공 시절 활동이 문제가 돼 피신해야 할 처지가 된다.

전재흥은 삼촌을 살리기 위해 본인의 도민증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되어 피신하다가 경찰서에 두 번째 잡혀가서 사살된다. 이후 전미경은 할머니 구덕환, 할아버지 전봉준 슬하에서 자란다.

큰아들은 잡혀가서 학살되고 둘째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정신이 아닌 할아버지가 차일피일하다가 손녀 이름을 호적에 올리지 못하였다. 4살 때가 돼서야 할아버지는 이장에게 호적을 올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아버지가 '전미경'으로 이름을 지어놓은 상태였지만, 호적계에 도착한 이장은 전미경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이장은 호적계 직원과 의논하여 '전숙자'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리고 말았다. 그녀는 전숙자로 70여 년간 살다가 이제야 아버지가 지어주신 '전미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통화 1] 전미경 대전유족회장과 첫 번째 사연

"회장님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네, 선생님. 저녁은 드셨어요?"
"예, 회장님. 아버지는 무슨 사연으로 골령골에서 학살되셨나요."
"우리 아버지는요, 동생의 피신 때문에 덩달아 천방산(집 근처)으로 몸을 피했다가  '딸 미경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온 거여유."


들뜬 마음으로 집에 온 아버지는 전 회장이 태어난 지 3일 만에 곧바로 경찰에 붙잡혀 충남 시초 지서로 연행되었다. 1949년 1월 8일이었다. 엄마(장복순, 1924년생)는 아버지가 잡혀갈 때 경찰과 아버지를 따라 허리까지 오는 눈길을 10리 정도 걸어서 시초 지서에 도착, 지서장에게 항의했다.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에 가두는 거예유?' 하니까 '당신 시동생 때문이야'라고 했데유. 엄마가 항의 했지만, 지서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데유. 엄마가 '내 남편을 풀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유' 하면서 묵비권을 행사했는디유.

엄마가 해산한 지 3일밖에 안 된 것을 알고 경찰이 자리에 앉으라고 달랬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데유, 3일간 날밤을 새우고 심지어 대소변을 선 채로 봐 버렸데유. 그러니깨 경찰들이 기겁하여 아버지께 각서를 받고 석방했데유."


"엄마가 대단한 분이시네요."
"예, 우리 외증조할아버지가 참봉(종9품) 벼슬을 지낸 집안이었데유.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척 예뻐하셨데유."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아버지를 살렸군요."
"예, 한편 저는 태어난 지 3일 됐지만 엄마 젖을 3일 동안 먹지 못해 할아버지가 우유를 먹였다고 해요."


한약방 주인의 사악함

"회장님, 언니 오빠가 있었어요?"
"예!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데유. 그런데 오빠(전생현)는 4살 때 홍역을 앓아서 심하지는 않고 눈곱이 째끔 끼일 정도였데유. 그래서 아버지가 동네 한약방에 약을 짓기 위해 갔는데 한약방 주인은 아버지한테 약을 지어주지 않고 아버지보다 뒤에 온 손님을 먼저 지어 주었데유.

이후 아버지 약을 지어주는데 아주 신중하게 짓 드래유. 집에 와서 그 약을 먹이니까 아이 몸이 불에 타듯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데유. 그래서 아버지는 석방 후 저를 안고 명세했데유. 위에 자식 둘을 잃었기에 저를 더욱 끔찍하게 좋아했고, 아버지가 '내가 죽으면 이 자식이 어찌 살라고 안 된다' 하면서 결심했답니다.

한약방 주인은 우익 사람이라 저의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고 경찰에 신고했데유. 빨갱이 잡아 가두라고. 경찰이 아버지를 조사하니까 죄목이 거의 없어 석방하려고 했는데 우익인사들이 탄원서까지 넣어서 아버지를 석방 못 하게 하였데유.

아버지가 풀려나면 독약을 지어준 죄로 한약방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던 거지유. 아예 우리 집안을 몰살해 버리도록 작정을 한 것 같아유. 그래서 자신이 살인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모진 고문과 구타 끝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까지 고문하여 강제 살인자로 조작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는 것 같아유."


두 번째 잡혀간 아버지의 행방

"회장님! 그다음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는데요?"

"엄마의 목숨 건 항의로 지서에서 풀려났지만 계속 아버지는 피신하면서 살았시유. 어느 날, 아버지가 제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데유. 태어난 지 두 돌이 되었건만 아직도 서서 걷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래유.

아버지의 먹을 것을 가져간 엄마가 '미경이가 섰어요'라는 소식을 전했더니, 그날 밤늦게 아버지가 마을로 내려와 딸의 걸음마를 보며 기뻐했데유. 근데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데유. 경찰들이 군홧발을 신은 채로 방문을 열며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갔데유. 그날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유."


전 회장이 말을 이어가며 눈물을 흘렸다.

'잡혀가신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요'라고 묻자 "잡혀간 지 몇 개월 후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이장인 라권집을 살인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유"라고 한다. '뭐라고 예? 회장님, 무슨 살인요? 아버지가 누굴 살인했다고요?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말씀해보세요'라고 하자 잠시 정적이 흐른다.

"아버지가 숱한 고문을 당한 것을 동료 수감자의 증언으로 익히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강압 수사와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것은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의 재심 결정에서 밝혀진 바 있시유."

'재심 결정요? 이건 또 무슨 말씀인지요' 여쭤보니 또 한숨을 쉬더니 그녀가 "우리 아버지를 경찰과 군법회의에서 빨갱이로 몰아 살인자로 조작해 사형했는데, 억울하게 학살당한 우리 아버지를 62년 만에 명예 회복을 시켰시유"라고 말한다. 전화기 저편에서 '흐흐흐 흐흐흐'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필자는 많은 피학살자의 사연을 들어 봤지만, 회장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진실화해위원회 수정 결정문과 무죄로 결정난 재심 판결문
 진실화해위원회 수정 결정문과 무죄로 결정난 재심 판결문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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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대전유족회장 전미경

스산한 가을바람
앙상한 가로수 휘몰아쳐
마지막 잎새 떨쳐 버리던
2010년 10월 29일
계룡대 육군본부 민원실

아비 죽어 오십팔 년
가슴 저린 세월
고등군법회의 사형이란
판결문 받아 들고 망연자실
하늘인지 땅인지 깜깜 절벽
피눈물 뚝뚝 흘리며
돌아서는 불효 여식

인권은 간곳없고
일 열은 사형 이 열은 무기
사형은 무엇이고
무기는 무엇인지
뜻이나 알고 한일자로 찍어진
그것을 놀렸더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한반도 골짜기마다
유골 밭으로 만들어 놓고
동작동에서 현충원에서
저들은 저리도 당당한가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죽인자 뼈를 갈아
아버님 영전에 바치고
산 자 정의와 진실이란 이름 앞에
두 무릎 꿇리지 않고는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통화 2] 딸 바보 아버지가 학살당한 과정과 절차
 
전미경 아버지의 전재흥(23)씨 모습
 전미경 아버지의 전재흥(23)씨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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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대전 시굴은 어느 정도 진전이 되고 있어요?"
"예, 아직 유해가 나오지 않아 걱정이여유. 그래도 계속 시굴을 해봐야죠. 도로공사 할 때 유해가 8가마니가 나왔데유. 동네 사람들이 그래유. 그리고 거기 고랑있지유? 1987년도에 홍수가 났는데 그 고랑이 넘쳐 밭바닥이 유해로 하얗게 덮였데유. 이때 유해가 많이 소실돼 그런가 싶어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시굴 안 한 곳이 더 있으니 나올 겁니다."
"예, 그래야지유."

"회장님 아버지가 학살당한 과정과 절차를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어요.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유, 오랜 세월 지났는데도 아버지 얘기는 봇물 쏟아지듯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유. 아버지는 서천경찰서를 경유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시유. 할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면회 갔을 때 아버지는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데유. 고문과 구타를 20일간 당했다고 하더라고유.

삼촌한테 도민증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 아버지를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는 누명을 씌운 거에유. 어느 날 서천경찰서 경찰이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전 재산을 바치면 아들을 풀어주겠다'고 하더래요.

다음번 면회 때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았데유. 그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전 재산을 바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만간 석방될 테니까요'라고 했데유. 할아버지는 듬직한 아들의 이야기만 믿고 기다렸지만, 영원히 아들을 볼 수 없었데유."


전화기 저편으로 또다시 울음소리가 난다. 필자도 함께 운다. 전화기는 눈물을 훔치고 닦는 소리만 들린다. 전 회장이 "저는요, 70년이 지나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봇물 흐르듯 줄줄 흘려유"한다. 필자가 '회장님, 울보라고 별명을 지어도 될까요' 하자 전 회장이 순간 웃으면서 "그럼유, 그렇게 불러유"라고 한다. 둘이 서로 잠시 웃다가 다시 아버지 사연으로 이어진다.
 
'피고 전재흥은 할 말 있는가?'
'…….'

"피고 전재흥은 1951년 2월 21일 대전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며 사형을 선고받았시유. 군사재판이 열린 지 11일 만인 1951년 3월 4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다른 부역 혐의자들과 함께 골짜기 안의 나무에 세워졌데유. 엄동설한에 신발과 옷도 얇았을 텐데 끌려가서..."

또 울음소리가 난다.

'발사' 소리와 함께 '탕탕탕' 총소리가 이어졌다. 1926년생, 26세 젊은 청년 전재흥은 빨갱이 짓을 했다는 혐의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출신, 전재흥의 판결문 및 사형 확정 판결문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출신, 전재흥의 판결문 및 사형 확정 판결문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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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골령골 전미경 편이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대전골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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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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