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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6월항쟁 당시 사진.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 발생한 수많은 의문사 사건들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들의 집합만은 아니다. 의문사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 데에는 역사적 배경과 독재권력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의문사를 가져온 하나의 역사적인 요인은 또다른 요인을 낳으며, 의문사가 빈발하는 정치적 지형을 형성했다.

의문사를 빈발하게 한 역사적 요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경찰, 특무대, 헌병사령부 등 공안기구에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았던 고등경찰·헌병 등 민족반역자들이 대거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공안기관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족의 분단 과정에서 미국이 이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비호 아래 공안기구 내의 친일민족반역자들은 좌우대립을 부추기며 자신들의 입지를 민족반역자에서 '공산당 때려잡는 전문가'로 변화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공안기관에서는 구타와 고문 등 가혹행위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1980년∼1995년, 연평균 577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사는 한국전쟁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발생한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학살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희생자가 약 1백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학살의 광풍 속에서 생명 존중이니 인권이니 하는 것은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1백만의 죽음 앞에 단 한사람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현실 속에서 공안기관에 끌려 온 사람들은 "너 하나 죽어 봐야 내가 털끝 하나 다칠 것 같으냐"는 고문기술자들의 말을 칠성판에 누운 채 들어야 했다.

또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의문사는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극히 열악했던 인권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화운동과 같은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하는 사건의 혐의자들만 경찰 등 공안기관에서 가혹행위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절도나 폭행 등으로 조사를 받던 수많은 사람들도 구타나 고문과 같은 가혹행위를 일상적으로 당했다.

민주화의 진전과정에서 정치범들에 대한 구타와 고문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일반 범죄의 경우 구타나 고문이 근절되었다고 할 수 없다. 정치적 사건에서 의문사가 발생하는 구조적 요인은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 진전과 인권 존중의식의 신장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의문사법에 의해 의문사위가 다루는 의문사 사건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사로 한정되어서 의문사 발생 건수가 제한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한국사회는 의문사의 왕국이었다. 특히 수천 건에 달할지도 모를 규모로 보나, 은폐와 조작이라는 구조적인 측면으로 보나 군 의문사 사건은 대한민국의 군이, 아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1980년부터 1995년 5월까지 15년5개월간 군복무중 사망한 사람은 자살 3263명, 폭행치사 387명 등 모두 8951명에 달한다. 이는 연평균 577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우리 군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3년마다 1개 연대 병력을 잃고 있는 셈이다. 걸프전 당시 미군쪽 사망자가 269명에 불과한 것에 비한다면 이같은 손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있다.

정통성 결여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의문사 자행돼

다음으로 의문사를 자행한 정권이란 정통성을 결여한 군사독재 정권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은 저항세력의 도전을 벌거벗은 물리력에 의존하여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성격과 권력관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공안기관 간의 권력관계도 변화해갔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공안기관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심화되어 갔다.

공안기관들은 때로는 정보력으로, 때로는 독재자의 신임을 무기로, 때로는 보안감찰 등 다른 기관을 감독하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을 바탕으로 힘을 키워가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최고 권력자의 의지 이외에는 아무런 견제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공안기관은 점점 더 방자해져갔다.

더구나 권력의 주변에서 권력자를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떠받드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예를 들면 '심기경호'와 같이 독재자의 기분 상태를 맞추는 것조차 경호의 과제로 제기되는 상황이 되었다. 독재자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저항운동은 당연히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 권력 내부에 반대세력을 용인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의문사의 전제조건인 고문과 가혹행위는 광범위한 시민들을 상대로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군사독재 권력은 다양한 공안기관을 설치하여 서로 경쟁시켰다. 공안기구 간의 경쟁이 가열되면서 각 공안기관은 보다 적극적으로 프락치공작을 시도했다. 특히 10·26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에 비해 일시적 우위를 점하게 된 보안사는 거침없이 강제징집된 병사들을 프락치공작에 동원했다. 이른바 녹화사업을 통해 모두 6건의 의문사가 발생하는 등 모두 10건 정도의 사건이 프락치공작이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어 당사자가 죽음에 이르렀다.

프락치공작은 기관 차원에서 침투시킨 프락치가 있는가 하면, 개별 기관원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망원을 활용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프락치로 이용당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본다면,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프락치 역할을 강요당한 사람은 엄청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또 프락치를 이용한 기관이나 기관원들도 프락치가 변심하여 그 동안의 활동을 폭로하는 것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프락치공작은 절대 강자인 공안기관이 절대 약자인 피의자 또는 사병들을 대상으로 동지들을 팔라는 프락치 행위를 강요한 비열한 국가범죄이다. 프락치공작으로 인하여 발생한 의문사 10건은 의문사위에 진정·접수된 사건 중 의문사로 결정이 난 30건, 진상불능으로 결정된 24건 등 모두 54건의 18.5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오만해지는 공안기관들 "사상까지 바꿀 수 있다"

군사독재 정권이 공안기관에 의존하게 될수록 공안기관은 더욱 방자해져 갔다. 1970년대 들어 북에서 직접적으로 남파공작원을 파견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자, 간첩단 사건의 정치적 효과에 맛을 들인 공안기관은 간첩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971년 서승·서준식 등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을 비롯하여 숱한 조작간첩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최종길 교수 사건에서 보듯 조작간첩사건은 당연히 모진 고문을 동반했다. 이 고문에 굴복하여 거짓 자백을 하게 되면 조작간첩이 되는 것이고,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면 의문사라고 할 만큼 조작간첩 사건, 고문, 그리고 의문사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프락치공작이나 조작간첩 사건과 관련하여 꼭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실은 공안기관의 불법행위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이런 유형의 사건들이 기관 차원이 아니라 기관원들의 승진이나 포상, 해외연수 등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자행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김병진의 <보안사>(1986, 소나무)는 공안기관에서 수사관들의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서조차 얼마나 쉽게 간첩이 만들어지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의문사 사건의 유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강제전향 과정에서 발생한 5건의 의문사이다. 공안기관은 사람들의 사상까지도 자신들의 권력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갖고 강제전향 공작을 벌여 나갔다. 이 과정에서 3명이 강제급식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강제전향공작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사는 사상의 자유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독재권력이, 아무런 감시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교도소의 가장 구석진 특사에서 이미 처벌을 받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대상으로 행한 국가범죄였다.

의문사 발생 초기라고 할 수 있는 1984년까지의 기간을 보면 의문사 인정 19건, 진상규명불능 11건 등 모두 30건의 사건 중 수감시설 내 6건, 군부대 내 10건, 삼청교육대 2건 등 60퍼센트에 해당하는 18건이 군대·교도소·삼청교육대와 같은 폐쇄공간에서 일어났다.

반면 1984년 이후에는 교도소 내에서 발생한 사건은 1건, 군부대 내에서 발생한 사건은 6건으로 의문사 인정 11건, 진상규명불능 13건 등 모두 24건의 사건 중 25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는 1985년 이후 의문사가 일어나는 공간이 군이나 수감시설과 같은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널리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확산된 것은 비단 의문사의 발생공간만이 아니었다. 초기의 의문사는 교도소·군대·삼청교육대와 같은 특수한 공간에서 방어수단을 갖지 못한 특수공간 수용자를 대상으로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리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의문사의 양상도 변화한 것이다.

87년 이후 노동운동 의문사 가파르게 증가해

의문사가 널리 발생하는 과정은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 폭이 넓어지고 그 강도 역시 강해지는 과정과 궤를 같이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의 초기에는 독재의 악랄함에 비해 그 정권에 의해 직접적으로 목숨을 빼앗긴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이는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로 인해 저항의 싹을 완전히 잘라 버린 토대 위에서, 권력을 가진 쪽이나 저항세력 쪽이나 권력의 행사에서도 저항의 강도에서도 나름대로 자제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80년 광주학살은 저항세력에게도, 군사독재에게도 그동안 다소 멀리 있던 죽음을 가까이 가져다 주었다. 광주를 거치며 저항세력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되었고, 이미 방자해진 공안기관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항세력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저항세력과 권력에 취해 이성을 잃은 공안기관과 그 하수인들이 충돌할 때 의문사는 피할 수 없었다.

의문사 발생의 구조는 군사독재에 대한 민주화운동의 발전 속에서 의문사와 같은 밀실에서의 죽음 이외에도 국가권력에 의한 타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그리고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한 사실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특히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분신과 투신, 할복 등의 죽음으로 저항한 민족민주열사의 숫자는 모두 67명인데, 1985년 이전은 분신 4건, 투신 3건 등 모두 7건에 불과하다.

1986년 이후 민주화운동은 분신·투신 등 정치적 자살을 수반하는 등 투쟁강도가 극히 높아졌고, 공안기관은 이를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의문사가 빈발하게 되었다. 박종철 사건처럼 은폐를 시도했으나 시체처리가 불가능했던 경우 국가폭력이 벌거벗은 채 시민들 앞에 노출되기도 했다.

한편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주화운동의 주체는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의문사가 발생하는 공간만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의문사 당하는 사람들의 신분도 다양해진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변화는 의문사 사건에서 노동운동과 관련된 사건이 1987년 이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운동 관련 의문사 사건은 1987년 이전에는 1982년에 발생한 문영수 사건 1건뿐이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 이어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친 1988년에 문용섭·오범근·정경식 등 3건, 1989년에 임태남·이재호 등 2건, 1991년에 박창수 사건 등 4년 사이에 모두 6건이 발생했다.

민주화가 일정하게 진전되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고, 노동운동의 갑작스러운 고양과 민주화라는 새로운 상황에 공안기관과 그 구성원들이 채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 충돌이 벌어지면서 의문사는 빈발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노동운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6월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7년 이후 민주화의 일정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의문사가 오히려 증가하였다는 점에서 보듯이 다른 분야의 민주화운동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의문사를 종식시킨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였다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공안기관이 개입한 의문사가 빈발하게 된 데에는 검찰을 포함한 사법기관과 언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법부가 검찰의 기소장의 오자까지 베껴 쓰는 판결문을 내놓으며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에게 '증거의 왕' 자리를 내줄 때, 언론은 수사기관의 조작사건 발표에 아무런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고 열심히 '받아쓰기'를 하기에 바빴다.

의문사를 낳아온 구조적 요인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건설과정부터 배태되었다. 민주화운동의 발전은 독재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자체가 의문사를 낳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의문사가 발생하는 구조를 해체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1986년 이후 민주화투쟁이 고양되면서 분신·투신 등이 급격히 늘어났고, 의문사 역시 급증했지만, 결국 의문사를 종식시킨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였다. 수사기관에서의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줄어들고, 교도소, 감호소 등 수용시설에 대한 바깥사회의 감시가 가능해지고, 일반 시민들의 인권의식이 성장하면서 의문사가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은 크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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