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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총기전문가들은 총구 자살에 의한 핏자욱과 골편이 보이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처음 사고 현장에서 사진 상의 장소로 사체가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사진 오른쪽 자국은 스테이플러 자국)
 미국 총기전문가들은 총구 자살에 의한 핏자욱과 골편이 보이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처음 사고 현장에서 사진 상의 장소로 사체가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사진 오른쪽 자국은 스테이플러 자국)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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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근 일병은 타살 당했다"

허원근은 1962년 출생으로 1981년 대학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983년 육군에 입대하고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1984년 4월 2일 군대에서 사망했다. 내가 1979년 대학입학, 1981년 공군에 입대하고 1984년 제대했으니 그는 대략 나와 같은 세대다. 

허원근은 1984년 4월 2일 오후 1시20분쯤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 GOP 철책근무지 전방소대 폐유류고 뒤에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M16 총상을 입고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7사단 헌병대는 허원근 일병이 처음에는 오른쪽 가슴, 두 번째는 왼쪽 가슴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으며 마지막에는 오른쪽 눈썹에 밀착해 사격, '두개골 파열로 인해 사망한 것'이라고 허원근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내렸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부대 상관의 총에 맞고 죽었다는 타살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2002년 8월26일,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당혹스러워진 국방부는 8월28일 군검찰과 헌병대 24명으로 특별진상조사단(이하, 특조단, 단장 정수성)을 꾸려 재조사에 나섰다. 군검찰 사무관이었던 인길연 상사도 이때 특조단에 합류했다. 우리는 여기서 인길연 상사를 기억해야 한다.

당시 특조단은 의문사위에 사건 기록을 요구했다. 이에 의문사위는 2002년 9월12일 사건 기록 전부를 특조단에 넘겼다. 당시 인길연 상사가 이 기록을 인수해 갔다. 그리고 그 해 10월1일 의문사위는 조사 기록 일체를 특조단에 넘겨주었다. 그 후 약 한 달 후인 11월28일 특조단은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자료를 은폐한 국방부

그래서 다음 해인 2003년 10월28일 의문사위도 특조단에게 허원근 조사 기록을 송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2002년 의문사위에서 특조단에게 자료를 건네 준 것과는 달리 특조단은 의문사위 자료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 해 11월20일 의문사위는 특조단에 다시 자료를 요청했고, 12월13일, 특조단이 일부 자료를 공개했다.

당시 특조단이 건넨 자료는 총 아홉 권(2574쪽) 분량이었다. 그러나 특조단이 조사한 1백26명의 진술조서 두 권을 제외하고는 핵심자료가 빠져있었다. 특조단은 자료를 보관하던 캐비닛까지 열어 보여주며 자료가 더 없다고 주장했다. 그때 의문사위 박종덕 과장이 특조단이 가지고 있을 자료 목록을 제시했다. 박 과장은 '장관 최초 보고서, 핵심 참고인 거짓말 탐지기 검사내용, 규명해야 할 쟁점' 등 조사 기록과 참고 자료 전부를 특조단에 요구했다. 의문사위는 특조단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꿰뚫고 있었다. 그결과 지난 2004년 1월9일부터 특조단은 일부 자료를 의문사위에 추가로 건넸다.

당시 자료를 넘겨받은 의문사위 분석 결과, 일부 특조단 조사관들도 허일병의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한 것으로 확인했다. 의문사위로서는 그나마 객관적인 시각을 지닌 특조단원을 파악한 것이고, 그 가운데 인길연 상사가 있었던 것이다.

인 상사는 허원근의 총기번호가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낸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의문사위는 허일병이 타살된 증거로 사건 당시 시신 옆에서 발견된 허일병의 총기 번호가 수정되었다고 발표했다. 허일병이 자신의 총으로 자살했다는 그 동안 국방부의 수사 결과를 뒤집을 만한 증거였다.

그 후 지난 2004년 1월27일 의문사위 정은성 조사관은 인길연 상사와 처음으로 통화했다. 첫 통화에서 인상사는 "할 말이 없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정조사관은 약 보름 후인 2월12일 대구로 내려가 인상사를 직접 만났다. 이때부터 정조사관은 디지털 녹음기로 인상사와 나눈 대화를 전부 녹취했다.

첫 만남에서 인상사는 놀랄 만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인상사가 먼저 특조단 내부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당시 인상사는 자기 휴대전화를 꺼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보관 중인 자료사진까지 보여주었다. 5년 후에 양심선언을 하려고 자료를 보관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 의문사위 입장에서 인상사는 내부고발자나 다름없었다.

"허원근 사건 자료는 은폐의혹 자료다"

다음날인 2004년 2월13일 정조사관은 자료 제공을 요구했고, 인상사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 자료를 보여주었다. 'DBS 파일'이라는 표지가 붙은 두 상자 분량이었다. 인상사는 DBS의 "D는 Dirty, B는 Black, S는 Secret 약자"이며 "은폐 의혹 자료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국방부 특조단이 참고인 박아무개씨의 입을 막았으며, 의문사위가 확보하지 못한 시체 사진이 있다는 등 자료를 보여주고 설명까지 해주었다. 인상사는 의문사위가 자신을 파견시켜 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하면 자료를 건네고 조사를 돕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인상사는 매번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그러자 의문사위는 2004년 2월26일 실지 조사를 결정했다. 정은성 조사관이 인상사 집에서 문제의 자료를 가지고 나가자, 이를 알고 인상사가 총(이 총은 나중에 소리가 나는 가스총으로 밝혀졌다)을 쏘며 반발했다. '나 죽는단 말야! 나 죽어 그거면!'이라며 조사관에게 총을 겨누는 한편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자해를 시도하며 자료를 돌려달라고 소리쳤다. 이 과정에서 인씨는 의문사위 조사관의 얼굴 옆 허공을 향해 총을 쏜 뒤 수갑을 채웠다. 의문사위는 결국 인상사에게 자료를 돌려주었다. 당시 인상사는 군 내부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며 자료 제출을 거부했던 것이다.

LAPD·NYPD 강력계 총기전문가 "허원근은 타살 당했다!"

나는 지난 2004년 1월부터 12월까지 의문사위에서 국영문 보고서 담당 전문위원으로 근무했었다. 당시 내 업무 중 하나는 허원근 일병의 사망 사건을 조사중인 조사관들이 그 전해인 2003년 11월 미국을 방문해 LAPD와 NYPD 강력계형사 경력자들 그리고 총기전문가들과 면담한 영문녹화동영상을 한국어로 통역하는 일이었다.  

그 동영상은 약 20시간 이상의 분량이었다. 나는 약 하루에 1시간씩 한달 이상 그 동영상을 유심히 보며 미국 총기전문가들과의 면담내용을 한국어로 통역하여 녹음하였다. 이 20시간 이상 분량의 동영상을 꼼꼼히 본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면담내용을 영어로 통역하여 녹음하자니 자연히 나는 그 내용 한 마디 한마디에 대해 극도로 신경을 쓰고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NYPD와 LAPD 강력계 고참형사들, 총기전문가들 그리고 검시관들은 허일병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다만 허일병 사망사건 관련사진자료를 보고 그가 자살했는지 혹은 타살 당했는지 여부를 증거물에 입각해 냉철하게 진단하는 것만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 미국 전문가들은 NYPD와 LAPD 둘 다(그 두 그룹은 각자 따로 진단을 내렸지만) 똑 같이 허일병이 타살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타살의 이유와 증거로 미국총기전문가들은 아래와 같은 3가지 공통된 결론을 내렸다.   

1. M16소총의 화력을 고려할 때 세 군데의 총상의 거리가 너무 멀다.
2. 현장 사진에서 사체 주위에 핏자국과 골편(뼈가 부스러진 조각)이 보이지 않는다.
3. 처음 사건 현장에서 사체가 이동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강력계 형사 총기전문가들의 구체적 진술이 아래와 같았다.

지난 2004년 의문사위의 허원근 사건 관련 기자회견 장면.
 지난 2004년 의문사위의 허원근 사건 관련 기자회견 장면.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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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했다면 총에 피가 묻어야 하는데 총에 피가 보이지 않는다"

"사체 주변에 피나 골편(骨片), 뇌조직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즉 사체가 이동되었다는 것을 사진이 보여준다. (미국 LA경찰 과학수사부 현장감식반 Chase Choe)"

"사체 주위에 피가 너무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을 경우 사체 주위에 피나 골편, 뇌조직이 산재해야 하는데 현장 사진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미국 NY경찰 현장감식반 Gary R. Gomula)"

"자살했다면 총에 피가 묻어야 하는데 총에 피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자살했다면 총상의 각도를 볼 때 땅에 총을 대고 쏴야 하는데 총 개머리판에 흙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 LA경찰 과학수사부 총기감식반 Rafael Garcia)"

"왜 총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은지 의문이다. 여러 번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아 의문이다. (노여수 박사•재미 법의학자)"

이렇게 미국 LAPD와 NYPD 경찰국 총기감식반과 현장감식반 전문가 관계자들과 재미 법의학자는 지난 1984년 허원근 일병이 군복무 중 자살했다는 국방부 발표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이런 미국 총기전문가들의 감정을 바탕으로 2004년 의문사위는 "당시 헌병대의 수사결과대로 허 일병이 폐유류고에서 M-16소총을 이용하여 3발을 스스로 쏴 자살하였다면 사체 주위에 핏자국이 다량 발견되어야 당연하다"며 "헌병대 수사기록에 있는 현장 사진에서는 전혀 핏자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며 "사체가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허 일병이) 두부 총상으로 사망 하였는 바, 골편 등 뇌조직이 (파편으로 튀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은 것은 폐유류고가 사망장소가 아닌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헌병대 수사 기록에는 "사망자의 두부 좌전방 30cm∼1m 일대에 골편이 산재해 있는바, 동소가 사건 현장임을 입증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2004년 당시 의문사위는 "입수한 국방부 특조단 기록 가운데 당시 헌병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장사진 2장이 사건 발생 후 최초로 발견됐다"며 "국방부는 기타 사진과 기록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새로 발견된 사진 2장에 대한 출처를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그러나 지난 22일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강민구)는 "M16 소총으로 흉부에 2발, 머리에 1발을 쏴 자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며 "같은 총상으로 자살한 사례가 있다"고 덧붙이며 허원근 일병 사건을 자살로 결론지었다.

이런 강민구 판사의 판결을 읽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판사님이 군대 갔다 오셨나?" 우리 60만 군대의 강력한 화기인 M16을 허일병이 우측 가슴에 1발쏘고, 그래도 안 죽자 다시 좌측 가슴에 1발쏘고, 또 그래도 안 죽자 3번째로 다시 머리에 1발을 쏘고 죽었다. 그래서 자살이다?

그러면 국방부는 이렇게 화력이 안 좋은 M16을 당장 교체해야 한다. 1미터도 안되는 근접에서 3발이나 발사해도 안죽는 총을 어떻게 우리 군인들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허일병이 자살을 원했다면 스스로 쏘기도 힘든 M16을 처음부터 머리에 쏘았을 것이다. 나는 군대에서 M16을 수도 없이 쏴봤다. 이 총은 소리가 크고 반동도 심해서 보통사람들은 총소리만 들어도 뒤로 자빠질 것이다. 그런데 자살 할 사람이 먼저 우측과 죄측 가슴에 각각 1발씩 2발을 쏴보고 그래도 안 죽자 머리에 1발을 다시 쏘고 자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나는 강민구 판사가 M16으로 사망한 사망자들의 상처를 보았는지 의문이 든다. M16을 가슴에 맞으면 등 쪽으로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난다. 그런데 그런 주먹만한 총상을 두 번이나 입고서 다시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는 것은 군대를 다녀 온 사람 중에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혀 납득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국방부라면...

나는 우리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장준하선생 의문사 관련 기록은 70년 간 비공개다. 국가기밀도 30년만 비공개다, 그런데 개인 장준하 선생 사망에 관한 기록은 국가기밀보다 중요한지 무려 70년간 비공개다. 박정희가 정말 장준하 선생을 죽이지 않았다면 나 같으면 당장 기록을 공개할 것이다.

그래서 기록을 읽는 사람들이 장준하 선생이 과연 사고사로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박정희가 암살 했는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70년간 비공개 하면서 장준하 선생님 사고사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허원근 사건도 마찬가지다. 국방부 특조단 인상사가 허원근 일병 기록을 의문사위 조사관에게 총을 쏘아대며 탈취해갔다. 그러면서 허일병이 자살했다고 한다. 내가 허일병이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국방부 관계자라면 나는 허일병 관련 모든 기록을 언론에 완전 공개할 것이다. 그리고 소리칠 것이다. "기록을 마음대로 보세요, 그리고 과연 허일병이 타살 당했는지 판단해 보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상식이 실종되고 억지와 조작이 판을 치는 한국사회, 그 모습이 정말 처량하다. 언제나 우리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첨부파일
허원근1


태그:#허원근, #김성수, #의문사, #장준하, #정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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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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