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말]
"재단사요, 난 이제 아무래도 바보가 되나봐요. 사흘 밤이나 주사 맞고 일했더니 이젠 눈이 침침해서 아무리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도 않고 손이 마음대로 펴지지가 않아요."

시다 하나가 머뭇거리다 울음을 터뜨렸다. 1960년대 후반 전태일이 일하던 평화시장에선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다가 왈칵 토해내었다. 각혈이었다. 태일이 급히 돈을 걷어서 병원에 데려가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평화시장의 직업병 중의 하나였다. 그 여공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태일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각혈을 한 여공은 평화시장 생활 몇 년에 그 동안 번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고치기 어려운 병만 얻고 거리로 쫓겨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밑지는 생명'이었다."(조영래 지음, 책 <전태일 평전>(개정판), 돌베개, 1991)

몹시 가난한 형편에 부양가족도 많았던 전태일은 빚쟁이들의 독촉이 괴로웠지만 어린 여공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여공들의 현실이 준 충격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누구에게나 전환점은 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 그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 삶의 전환점이란 역사에 눈에 띄는 자욱을 남기기도 한다.

1980년대 초반의 부산, 영화 <변호인>(감독 양우석)은 잘 나가는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의 전환점에 초점을 맞춘다. 송우석이 생각하는 세상은 데모 몇 번 한다고 바뀌지 않는 세상이다. TV뉴스에 등장하는 학생시위 장면을 보는 송우석은 짜증이 난다.

"맨날 저 데모 해쌌는데 저 문제 아이가? 아, 문제가 있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가 논리적으로 따져야지. 저 공부하기 싫어가 지랄 떠는거 아이가!"

군사독재정권에는 별 관심도 없고 돈 버는 재미밖에 모르던 송우석이었기에 그의 삶이 바뀌는 지점은 더 인상적이다. 단골 돼지국밥집 아들과의 인연이 그를 기로에 서게 한다. 국밥집 주인 순애(김영애 분)는 아들 진우(임시완 분)가 실종된 지 수십일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는 편지 한 통을 받게 되고, 송우석은 순애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구치소 면회에 따라 나섰다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적나라한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은 진우(임시완 분)를 면회하다 50일 넘게 갖은 고문과 회유, 협박에 시달렸음을 알게 된다.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은 진우(임시완 분)를 면회하다 50일 넘게 갖은 고문과 회유, 협박에 시달렸음을 알게 된다. ⓒ 위더스필름㈜


사무장 동호(오달수 분)는 굴지의 건설회사인 해동건설과 대형계약을 앞두고도 시국사건 변호를 접지 않겠다는 송우석이 안타깝다.

"에이, 송변호사! 인생은 타이밍이라는게 있는 법이다. 송변호사 앞에 8차선 도로가 뻥 뚫렸는데 악셀레타만 죽어라 밟아도 뭐 할긴데 브레이크를 밟아? 브레이크를!"

기로에 선 '속물변호사' 송우석의 선택은 그의 삶에 있어 빛나는 한 순간이다. 한편 영화 <변호인>에는 빛나는 순간을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경감, 차동영! 귀하는 국가안보에 혁혁한 공을 세워 대한민국 국법에 따라 훈장을 수여합니다. 대통령 전두환." 경감 차동영(곽도원 분)에게도 역시 빛나는 순간이다. "이번 건은 차경감이 수고가 많았어." 양주를 따라주는 보안사 대령은 두 손으로 잔을 받는 차동영을 치하한다. "차경감, 거 부탁하나만 합시다. 우리 차경감 말이야. 부산에 내려가서 거기서도 한 건 해줘야겠어." 공손하게 몸을 돌려 술잔을 비운 차경감에게 대령이 말한다. "부산에서 광주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차경감이 잘해야돼. 그게 진짜 애국이야." 차경감의 눈빛이 빛난다. "명심하겠습니다!"

영화의 구성과 형식은 다소 투박하지만, 초반 이후 송우석의 감정이 분노와 격정으로 치닫게 되면서 영화는 놀라운 흡입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송강호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다. 곽도원, 김영애, 오달수를 비롯해 송우석의 동창인 신문기자 이윤택 역을 열연한 이성민까지 배우들의 연기 수준과 서로간의 조화가 뛰어나다.

특히 배우 송강호는 오직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던 극중인물 송우석의 갑작스런 변신이 자칫 개연성 없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전개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일찍 상승시킨 감정을 중반 이후에도 지루함 없이 지속적으로 폭발시키며 종반으로 치닫게 한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분의 인생의 단면을 제대로 표현했겠어요? 그 깊이를. 단 부족하지만 최소한 제대로 그분의 삶을 그리고 싶었어요. 잘 한다 못 한다 떠나 별개로 최소한 저의 진심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관객 분들에게 읽혀야 하는 게 핵심이지 않나 싶었죠. 그런 점에서는 제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최소한 제 진심이 담겨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있을 것 같네요."(OSEN 기사, 송강호 ''변호인'.., 2013년 12월 21일자, 정유진 기자)

송강호의 말대로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인으로 참여했던 1981년 '부림사건' 공판을 영화화했다. 영화 <변호인>의 관계자 인터뷰, 광고, 포스터, 심지어 극장에 비치된 전단지 어디에서도 '노무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찾을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상업영화로서 불필요한 시비를 피하기 위한 의도적 기획이자 연출이리라.

영화는 역시 의도적으로 정치인으로 나서기 이전의 모습, 즉 '속물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변모하는 모습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극중 '부동연사건'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은 실제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소율도 높았고 잘한다는 소문이 나자 사건 수임도 많아졌다. 이후 내가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부산에서 꽤 잘 나가는 조세 전문 변호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재야 운동에 뛰어들면서부터 내 의식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판사로서 변호사로서 살아온 그간의 내 삶이 조금씩 부끄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와 이웃들의 삶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하게 살아온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부림사건'은 내가 재야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기도 했다."(노무현 지음, 책 <여보 나좀 도와줘>, 새터, 2002)

그는 당시 "시국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가지고 있질 못했다"고 회고했지만 실제 변호를 맡으며 '부림사건'이 터무니 없이 조작된 사건이고 정작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됐다.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한창 피어나야 할 한 젊은이의 그 처참한 모습이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그 모습에 기가 꽉 막혔다. 분노로 인해 머리 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도저히 스스로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 내가 그렇게 되따져 묻자 검사는 협박조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 된 이후 어떻게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지 알기나 하시오? 지금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이 죽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검사의 그 협박은 오히려 나의 투지에 불을 붙여 놓았다."(같은 책)


영화는 정확하게 이 지점,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한 어느 변호사의 "투지"를 보여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떠나 '노무현'을 '노무현'이라 부르지 못하는 어찌보면 안타까운 현실이, 송강호의 신들린 연기가 빚어낸 '송우석'이라는 인물을 더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한다.

관객들은 송강호의 열연에 빠져 '송우석'을 보다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무현'의 잔상을 겹쳐보게 된다. 영화 <변호인>의 연출은 기대 이상의 수준에서 관객들의 격한 감정을 끌어낸다. 중반이 되기 전부터 극장은 사방의 훌쩍거림이 지속되고, 영화가 끝나고도 눈을 마주치기를 꺼려하는 상기된 남성관객들을 다수 볼 수 있었으며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마음이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는 의견들도 들을 수 있었다.

 영화 <변호인>은 '속물변호사' 송우석이 '인권변호사'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 <변호인>은 '속물변호사' 송우석이 '인권변호사'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위더스필름㈜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극중 송우석이 서 있는 공간과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딛고 선 공간의 시간차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30년 전 암담했던 군사독재정권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서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한숨이 그것이다. 송우석이, 자신을 만류하는 사무장 동호를 바라보며 던지는 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 애들 건우, 연우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로 브레이크 안 걸리는 세상에서 살게 할라고예. 사무장님 아 병국이도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하믄 안되지요!"

변호인 송강호 노무현 부림사건 양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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