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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전사는 친구들 보다 적들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로 알아볼 수 있다.
- 베르베르의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여기서의 진보는 정치적 이념 이야기가 아니라 발전, 진화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글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나, 보다 진보적인 이들과 이야기 한다는 느낌으로 썼다.

극우 보수

꽤 오래 전 한나라당이 호남과 광주에 공을 들이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냥 흘려 버렸다. 무엇보다 그 진정성에 신용이 가지 않았고, 정치공학적으로도 아무리 공을 들인들 호남과 광주의 표가 휩쓸려 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저 영남의 기반이 워낙 단단한 박근혜 대표이기에 가능한 사치쯤으로 생각했었다.

이번 선거기간 중에도 박 대표와 한나라당은 5·18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고, 바로 같은 시기 조갑제, 서정갑을 비롯한 이들은 서울에서 무슨 무슨 대회를 열어, 정부 여당 뿐 아니라 자신들에 동참하지 않은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바가지로 욕을 해대고 있었다. 극우 세력에게 욕을 먹는다는 사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들에게 욕을 먹음으로써, 항상 한나라당과 결부되었던 수구적이고 극우적인 이미지로부터 점점 탈피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당 안팎 극우인사들의 날갯짓 없이도 유지되는 지금의 전국적 지지는, 이러한 분리를 더욱 촉진시킬 것이고, 더 이상 조갑제와 손을 맞잡고 만세 삼창을 부르는 박 대표나 열린우리당은 김정일의 수하 운운하며 독설을 날릴 오세훈 후보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이제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하면서도 조갑제, 지만원 등을 보며 "쯧쯧 아직도 저 사람들은…" 하고 혀를 찰 수 있게 되었다.

부패의 카르텔

한나라당이 공천을 각 지역 정당에 맡기고난 후, 금품수수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하더니, 급기야는 중앙당에서 몇 가지 뇌물수수에 대해 검찰수사를 의뢰하기에 이른다. 그러는 동안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약간 하락 하는 듯하다가 곧 튀어 올라, 당 내에서 조차 이게 사실이냐고 반문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전국 지분 30%를 기반으로 당원들의 절대충성으로 유지되던 한나라당은, 부패한 돈을 나누어 배신을 방지하고 외부 감시에 집단으로 대항함으로써 당의 구조 자체가 부패와 뇌물로부터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양심있는 시민들로부터의 외면과 비판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권력을 분산하고 감시체계를 갖는 민주적 시스템만이 유일하게 구조적 부패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공천을 각 지역정당에 맡겨 권력을 나누고 중앙당이 감시, 고발하는 이번 선거에서의 진척은 부패를 완전히 도려내는 것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부패를 확대 재생산해 내는 내부의 카르텔이 깨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심리가, 과거의 경험상 늘 있어왔던 뇌물수수보다 내부로부터 나온 이러한 자정노력에 더 많이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강남신사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씨를 뽑은 것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광주경선과 흡사한 데가 많다. 조직표의 절대적 불리를 일반 당원과 여론을 통해 뒤엎은 것도 그렇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이 경선을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노무현 후보가 광주 경선에서 승리하였을 때, 그는 소탈하고 강직하고 따뜻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농군의 이미지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정확히 민주당의 이념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번 서울시장 후보선거를 통해 한나라당은 세련되고 똑똑하며 부자이면서 깨끗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자신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할 때, 그 폭발력은 허투의 것이 아니다.

오세훈 후보가 단 보름 만에 반 년 이상 갈아놓은 표밭을 뒤집었을 때, 당내에서는 '궂은 일에 손끝 하나 안 댄 사람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 불만이, 실은 의미심장하다. 단단한 충성의 조직으로 운영되던 한나라 당에서 궂은 일이란, 우두머리에 충성하고, 돈 심부름도 하며, 필요하면 대신 옥살이도 해주고, 법안 한 장 뒤적여 보지않고 거수기 노릇을 함으로써 조직에 헌신, 정치적 출세를 보장받던 것을 의미하였다.

이제 궂은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출세를 보장해 주지 않을 때, 조직의 하수가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와 목소리를 가진 강남의 신사가 되기 위한 정치인이 한나라당에서도 늘어날 것이고, 이것은 한나라당이 보다 민주적인 정당으로 발전해 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김영삼의 뺨에…

박 대표가 피습을 당한 지 며칠이 지나고, 여론에서는 정치적 오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으로서야 참으로 억울할 노릇이겠지만, 나는 충분히 오버해야 마땅한 일이며, 국민들이 보여주는 우려와 걱정은 결코 감정의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책과 이념과 수준의 차이를 떠나, 한나라당은 현재 제1야당임을 상기하자. 지난 날, 야당을 이끌었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이 테러당하고 구금당하고 핍박받을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짓눌렀던 악몽을 회상해보라. 그분들이 핍박당할 때마다, 폭력을 통하여 정치를 뒤흔들 때마다, 보여주던 국민적 저항과 지지가 오늘날 민주주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가장 강력하고 원천적인 힘이다.

시대가 다르고 정부가 다르다고 강변하지 말자. 이제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시는 정치적 테러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면, 과거사 규명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전두환, 노태우의 훈장조각을 회수한들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피습 이후 보여주는 국민들의 예민하고 사려깊은 반응은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의 광장에 폭력과 테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항의이다. 전두환의 무리가 자신의 총칼을 과신하였 듯, 오늘은 우리의 힘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너무 과신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봐야 한다.

정치철학의 입장에서 살펴 보아도, 오히려 한나라당은 이를 개인적 범죄로 해석할 여지가 있겠지만,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이라면 좀 더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 봐야 마땅한 일이다.

반 컵의 물

여론은 대체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정부여당의 부진을 그동안 정부여당이 정책 방향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정부를 이끌어 온 데 따른 결과라고 진단한다.

반 컵의 물을 반이나 남았다고 보는가, 반 밖에 안 남았다고 보는가는 성향의 차이이다. 나의 낙관적인 성격은, 그동안 참여정부의 활동과 성과에 크게 박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경제가 심각한 난관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며, 장기적 관점에서 양극화 의제는 환영하고 싶은 문제제기이다.

참여정부 기간 내내, 포연기 가득했던 국제정세는 외교적인 성과물을 제한하고 있으며, 절차로서의 민주화를(나는 민주란 단어에서 참신이나 효율보다, 느림과 시끄러움이란 단어가 연상된다) 실천하고자하는 현 정부에게 동춘서커스 마술쇼 같은 세상 바꿈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이다.

이번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강금실 후보 같은 멋진 외부 인사를 영입하기도 하고, 으레 여당의 몫이던 관권, 금권선거 이야기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단지 한나라당이 보다 분명한 진전을 보임으로써 상대적 열세에 몰리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선거란 제로섬 게임이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시각의 차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진보의 입장에서 열린우리당이 무능하다고 진단하면 그 건너편 한나라당은 당연히 구제불능이어야 하고, 한나라당은 구제불능이라고 인식하는 한 그들의 변화나 발전에 대해 살펴볼 눈을 잃게 된다.

바로 그러한 인식의 한계가, 정반대의 입장에서 지난 10여 년간 한나라당을 매번 실패로 몰아 넣은 판단 오류라 생각한다. 또한 현재 많은 진보 여론들의 진단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과 생활에 스며든 실제적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분명한 발전을 보여주었고, 많은 국민들의 진심어린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도 절차로서의 민주화에 상당한 진척을 이루었고, 국민들은 이에 지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나라당이 진정한 민주 정당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든가, 결국 내용없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말 거라는 실없는 교훈 따위를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런 문제야, 표를 먹고 사는 한나라당이 더욱 잘 알 것이다.

그런 것보다는,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보다 민주적인 정당으로 한 걸음 나감으로써, 대한민국 정치가 또 한 단계 전진할 터전이 되었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축하하고 온전히 같이 기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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