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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돌아가야 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1970. 8.9. 전태일의 일기 중


전태일이 떠난지 30년이 지났다. 지난 4월 29일 종로구민회관에는 전태일,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땅에서 묵묵히 일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담아온 전태일 문학상이 올해로 9회째를 맞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일터에서 고단함을 이기며 삶을 더듬어 온 이들의 글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길 위를 뒹구는 노란 은행잎조차
힘겨운 삶의 일부로 다가오던
스무살, 나는 사랑을 했습니다.

하루 열다섯 시간의 긴 노동
물먹은 솜처럼 지친 목으로 돌아온
약수동 꼭대기 자취방에서
그 사람을 소개받던 날,
나는 그만 첫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노동자였습니다.
스물세 살의 청년노동자
동료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갖고 있었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버리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 내 안에 살아 있는 사랑에 대하여


시 부분에서 당선된 장옥자(36)씨는 미싱사로 일하면서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결혼해서 남매를 둔 주부이며 서울지역의료제조업노조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내 안에 살아 있는 사랑에 대하여'는 한 여성노동자가 사랑에 눈뜨면서 그것이 노동자의 자각으로 이어지고 사랑과 운동의 조화 속에서 결혼에 이르렀다가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노동운동가로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700행에 가까운 긴 시다.

생활 글 부분에서 한글을 모르는 엄마와 아들이 함께 쓴 일기 '어머니와 나'(박기범)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서울어머니 학교> 자원 교사로 일하는 아들과 한글 공부를 위해 학생으로 입학한 엄마가 함께 써낸 일기에는 그들과 이웃의 삶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

생활글 심사를 맡은 한글교육 연구가 이오덕씨는 이 글에 대해 "지금까지 어느 책, 어느 잡지, 어느 신문에서도 이만큼 살아 있는 말로 쓴글, 오염된 말을 쓰지 않고 쉬운 우리말로 쓴 글을 보지 못했다"며 좋은 글쓰기 교과서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80년 광주민주화항쟁에 참여했던 한 특전병사의 고백 '5월의 회고- 어느 특전병사의 기록'(이경남)은 생활글 우수작으로 선정돼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현재 감리교 목사로 재직중인 이경남(44)씨는 "이번 상은 그 어떤 상 보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며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전태일과 나의 인생'이라는 글로 생활글 부분에서 입선한 이호승(62) 전 한국노총 산업안전본부장은 자신을 이번 총선에서 원주에서 당선된 이창복 국회의원의 불알 친구라고 소개하며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종교운동을 발전하는데 왜 노동운동은 발전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운동을 시작했다"며 "보잘 것 없는 글로 분수에 넘치는 상을 받았다"고 인사를 대신했다.

수상자들의 면면은 실로 다채로웠다. 노조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상근자에서부터 하숙집 주인 아줌마,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사, 농산물 가게 파트타이머, 공익근무 요원, 72살 고령의 할머니까지.

수상자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참석한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해 20여분 동안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태일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훌륭하고, 여러분의 노력이 더 위대합니다. 노동자는 배고프다고 빵을 얻어 먹는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 먹고, 나누어 먹는 주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30년전이나 지금이나 '불법 집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합디다. TV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몫을 찾기 위해 싸운다는 내용 한번 나오는 것 듣지 못했습니다. 노동자가 하나라고 하지만 권리를 못찾고 있습니다. 이제 IMF로 빼앗긴 권리를 꼭 찾읍시다."

옆에서 이소선씨의 이야기를 듣던 '70동지회'의 한 회원은 "어머니는 마이크만 잡으면 아프다가도 힘이 벌떡벌떡 솟는 것 같다"며 한마디로 '마이크 체질'이라고 표현했다.

생활이 우리를 속일 때 쓰러지지 않는 꿈들이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피어날 수 있을까 ?

시장의 불빛, 공장의 불빛, 가정의 불빛을 새로 밝히기 위해 일하는 그들. 그들의 얼굴에 한 없이 웃음이 묻어난 전태일 문학상 시상식이었다.

다음은 제9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 명단

시부분
최우수상 장옥자 '내안에 살아있는 사랑에 대하여
우수상 조혜영 '이팝꽃'
우수상 조수광 '비가2'

소설부분
우수상 김진영 '뜀틀 넘는 고양이'
우수상 이희택 '고향에서'
우수상 김영희 '선택'

생활·기록부분
최우수상 박기범 '어머니와 나'
우수상 이경남 '20년만의 고백 -어느 특전 병사의 회고'
입선작 기은미 '뒤늦게야'
김유정 '이 채소 오늘 거 맞아요'
배애순 '무제'
박정미 '일기'
이호승 '노동조합 이야기'

덧붙이는 글 | 제9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집 '내안에 살아있는 사랑에 대하여'(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는 현재 서점에 나와 있으며 2권 '어머니와 나'(아들과 엄마의 일기글)는 5월 중에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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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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