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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014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4일간 일본에서 이예다씨와 함께 징병 반대 활동을 하고 온 '안악희(가명)'라고 합니다. 이예다씨는 2012년 징병을 거부하고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오로지 병역거부라는 하나의 사유로만 망명이 받아들여진 최초의 사례입니다. 저는 앞으로 진행될 연재에서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여러분께 알리고자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예다씨의 방일은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2014년 내내 벌어진 군 내의 사고와 맞물려서, 한국군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구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얼마나 열악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아울러 민주화 이후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아직까지 병역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이예다씨는 아주 바르고 반듯한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활동가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작가 아마미야 카린씨로부터는 '예다링'이라는 애칭까지 받았습니다. 4일 동안 벌어진 질풍노도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이곳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기자 말

한국에는 <가난뱅이의 역습>, <가난뱅이 난장쇼>로 잘 알려진 마츠모토 하지메씨와 코엔지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다. 엄청나게 오래된 건물이라 대략 1980년대 후반 일본영화에서 보던 풍경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 코엔지의 마누케 하우스 한국에는 <가난뱅이의 역습>, <가난뱅이 난장쇼>로 잘 알려진 마츠모토 하지메씨와 코엔지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다. 엄청나게 오래된 건물이라 대략 1980년대 후반 일본영화에서 보던 풍경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 안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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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지의 마누케 하우스는 한국어로는 "멍청이 숙박소"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한국에 <가난뱅이의 역습>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마츠모토 하지메와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다.

구성원들이 이렇다 보니 투숙하는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나는 도미토리 룸에서 잠을 잤는데, 나머지 침대에서는 대만 출신의 사이키델릭 록 밴드가 기거하고 있었다(밴드 이름은 아쉽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마누케 하우스의 공동 공간에서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독특한 사람들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엘레베이터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밴드들의 스티커가 이리저리 붙어있었다.

17일 오후, 나는 한국으로 송고해야 하는 원고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내 침대에서 노트북을 펴 놓고 원고를 작업하고 있었다. 카카오톡 메신저로 이예다씨가 마누케 하우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나는 도미토리 윗층의 객실로 뛰어 올라갔다. 도미토리의 예약이 넘치는 바람에 이예다씨는 넓직한 다다미방을 배정받았다.

조용한 복도를 따라 다다미방에 도착하자, 한 청년이 베란다의 난간에 기대 조용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쿄의 시가 풍경, 특히 주택가의 풍경은 높은 건물이 별로 없이 낮은 건물들이 조근조근 모여있었다. 아직은 살짝 따스한 바람을 만끽하듯, 그는 주위 풍경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영화나 만화같은 장면이었다. 그가 이예다씨였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각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망명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나는 어떻게 이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이예다씨는 한국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굉장히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이 사람이 망명객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예다씨도 오랫동안 이 강압적인 제도에 대해 고민을 하던 차에, "이런 것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이 잘못된 제도를 감수 할 이유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살던 곳과, 가족과, 친구를 버리고 영원히 떠날 각오를 한 뒤 결행하는 엄청난 일이니까 당연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에는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해야하고, 더이상 이러한 불합리한 제도가 존속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비행시간 때문에 예다씨도 쉬어야 했고, 나도 원고를 마쳐야했기 때문에 우리는 저녁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도미토리로 내려와서 하던 작업을 마쳤다. 얼추 저녁시간이 되자 이번 여정의 주인공들이 속속들이 코엔지에 모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 징병제 반대모임은 전업 활동가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 퇴근을 해야 비로소 모일 수 있었다.

코엔지역 북쪽 출구에 이예다씨, 나, 아마미야 카린씨, 양성택씨, 김근태씨(실명이다. 이 분은 우리 징병제 반대모임의 일원으로서 통역을 비롯한 다양한 일을 하고 계시다), 일본 TBS 방송의 관계자 여러분, 웹진 "매거진 9"의 편집부 여러분 등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마미야씨는 예다씨를 만나자 마자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물었다. 예다씨는 주저없이 "가츠동이나 라면"같은것을 먹고 싶다고 대답했다. 역시 일본에 오면 단숨에 떠오르는 음식들이었다. 우리는 역 근처 이자카야에 가서 여러가지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왼쪽은 이예다씨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망명자용 여권. "Pour Refugie"라는 표시가 선명하다. 오른쪽은 필자의 여권.
▲ 두 한국인, 두 여권 왼쪽은 이예다씨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망명자용 여권. "Pour Refugie"라는 표시가 선명하다. 오른쪽은 필자의 여권.
ⓒ 안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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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예다씨의 망명자용 여권을 보고 싶어했다. 전 세계 인구 중 과연 몇 명이나 이 망명자용 여권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 진보신당 대표 홍세화씨도 아마 같은 여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예다씨는 프랑스 정부가 발급해 준 망명자 여권을 보여주었다. 여권 표지에 쓰여진 "Pour Réfugié"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저 망명자용 여권 처음봐요."

잠시 후 마츠모토 하지메씨가 일을 마치고 도착했다. 예다씨는 일본어가 유창했기 때문에 마츠모토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츠모토씨는 서울에서 G20 회의가 열릴 당시, 어쩐 이유에서인지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한국에 입국이 거부된 적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마츠모토씨가 활동가 내지는 작가로 한국에는 꽤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 와서 보면 그냥 골동품점 주인이다.

게다가 큰 가게를 가진 것도 아니고 코엔지의 작은 상점가에 작은 가겟방을 하나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가난뱅이였기 때문에, 집이 없이 동가식 서가숙 하며 친구집에서 샤워를 하기도 했다. 남의 집에서 샤워하는 골동품 가게 주인이 테러리스트라니, 한국 정부의 국제 정보능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왼쪽이 마츠모토 하지메씨, 오른쪽이 이예다씨. 서로 처음보는 사이였음에도 두 분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한국에 못 들어갔던 사람, 한국에서 나간 사람 왼쪽이 마츠모토 하지메씨, 오른쪽이 이예다씨. 서로 처음보는 사이였음에도 두 분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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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향후 일정과 앞으로 있을 이벤트나 기자회견에서 있을 발언들을 논의했다. 예다씨는 어떻게 망명객이 되었는지, 망명의 과정은 어떠했는지, 징병 거부가 한국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사항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나는 한국 군대의 실상을 증언하고, 징병제의 문제는 어떤 것이며, 실제로 병사들은 징병기간 중 어떤 불이익을 받는지를 밝히는 발언을 하기로 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집단적 자위권이 인정된 이후, 연일 전쟁에 관한 이슈가 쏟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간다는 우려 하에, 평화헌법의 근간인 헌법 9조가 파기되는 것이 아닌가, 자위대가 실질적으로 해외 파병이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이 속속들이 수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자위대는 영토방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청년 인구의 감소로 입대 정원을 못 채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상황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하면 해외로 출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전력공백은 물론이고 병력 충원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문제가 불거지는 와중에, 일본 자민당의 일부 의원들을 비롯한 보수 세력에서 징병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비록 아베 수상이 "징병제는 위헌이므로 절대 실시하지 않는다"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지만, 집단적 자위권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보여진 아베 수상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인해 사회 일각에서는 '이것도 또 독단적으로 처리할 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서, 자유국가로 알려진 이웃나라의 젊은이가 어떻게 징병을 거부하고 망명자의 신분이 되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일련의 일정들이 확정된 것이었다. 이예다씨와 한국의 징병제 관련 이슈가 일본에서도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알려진 자위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일본인들에게 자위대는 '군대같지만 군대같지 않은 무력집단'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우리로서는 "군복입고 총들면 다 군인이지 그게 뭐냐"라는 말이 튀어나올 법 하지만, 일본은 평화헌법에 의해 어쨌든 군대의 보유와 전쟁이 금지되어 있다.

자위대는 사실 애초부터 미 군정에 의해 구 일본군을 해체하고 만든 경찰예비대에 그 기원을 둔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시기에 구 일본군의 악습이나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고, 쉽게 말해 "대포와 탱크로 중무장한 경찰"같은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1950년대가 지나면서 구 일본군의 좌관급(한국으로 치면 영관급) 장교들이 재임용되는 등 구 일본군의 적자들의 입김이 좀 들어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경찰과 같은 체계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군사재판을 받지 않는다. 군법으로 처리되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수습에 투입된 자위관이 겁을 먹고 도주했을 때, 군무이탈죄가 아닌 공무원 근무 규정에 따라 징계받았다. 미시마 유키오의 방위성 점거사건 당시에도 미시마의 의견에 동의하는 자위관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자위대는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철밥통'으로 알려진 직장이라 한다. 전쟁에 나갈 일도 없고, 무기를 다루지만 사람을 죽일 일도 없는 데다가 일단 장기근무를 하게 되면 평생직장이 된다. 자위대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다거나 누군가를 죽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이러한 점들 때문에 일본 내 우익들은 줄기차게 "자위대 해체, 국군 창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단적 자위권 이슈가 불거지고, 그에 따라 점입 가경으로 징병제 이슈까지 떠오르자, 일본의 사람들은 바로 옆 나라의 사례를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는 이자카야를 나와서 라면으로 해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술을 거하게 한잔 걸치면 라면같이 따뜻한 국물로 해장을 하곤 한다. 나는 술이 깨는것이 아까워서 만두를 주문하고 맥주를 마셨다. 살짝 취한 상태에서 내일의 일정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태그:#망명, #이예다, #마츠모토 하지메, #병역거부, #집단적자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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